"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약속은 오히려 신화에 내재된 운명적 필연성과 지배의 원리에 갇히게 되는 결과로 나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로 돌아간 계몽의 이성은 이성의 도구화로 귀결된다.
1) 폐쇄적 필연성에 갇힌 이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을 약속했던 이성이 신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학문적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 실증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사상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사유 thinking는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자와 과학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연구 방법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증명이 가능한 절차였으며 이는 동시에 수량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양적 기준, "등가원칙, 혹은 형식논리로 환원되며, 여기서 질적 차이, 목적, 인식자의 관심 등은 무시되거나 배제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방식은 신회적 필연성으로 회귀하는 것과 같다. 신화에서 인간이 신탁에 의해 확정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듯이 근대적 계몽에서 인간은 이제 논리적 필연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계몽은 형식논리에 따르는 폐쇄적이고 운명적인 필연성의 계기이다. 여기서 사실과 형식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존재하지 않는다.
272쪽.
2) 지배 원리로서 이성
이제 학문의 대상이 된 자연은 계싼에 의해 파악되고 지배될 수 있는 소재나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파악될 수 없는 자연은 인간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자연에 의해 인간 자신이 지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은 남김없이 파악되고 지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제 지상명령이 된다. 근대 계몽주의는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의해서 후자가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몽의 본질은 양자택일인데, 이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자연 밑에 굴복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연을 자신의 지배하에 둘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지배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 귀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몽의 기획에 따라 인간은 이제 스스로를, 나아가 타인을 자연물처럼 다루고 통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이 아니라 사물처럼 사실성과 유용성의 범주로 환원되어 이해된다.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철저하게 사물처럼 지배하는 사람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물로 추락하기 이전의 근원적 자연을 기억해야 한다. "근원으로서의 자연이 기억될 때 계몽은 완성되고 스스로를 지양한다."
273-4쪽.
3) 자연과 인간의 사물화와 도구적 이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폐쇄적, 지배적 이성에 갇힌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 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뿐 아니관 인간 역시 사물화시킨다.
여기서 사실성과 유용성, 계산 가능성과 교환 가능성이 없는 자연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감금되고 배제된다. 계몽은 살아 있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죽은 자연 사물 혹은 객체로 취급하는 과학주의, 시장지상주의에 빠져든다.
과학 자체가 신화가 된다. 여기서 모든 질적인 차이는 교환가치라는 양적차이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이질성은 동일성의 이름으로 소환되고 억압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연 지배를 본질로 하는 주체는 모든 자연에서 생명을 앗아간다고 본다. 남은 것은 객관적, 수량화된 사실뿐이다. 이와 함께 계몽을 추구했던 이성 역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다. 여기서 이성은 사실적 무비판적 이성으로 나타나게 되며 양화에 이바지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판과 성찰의 능력을 잃고 도구적 이성의 모습을 띠게 된 이성은 사회적 경제적 생산에 이바지하는 것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최대의 역할로 여기게 된다. 이성은 더욱더 많은 부와 더욱 효과적인 사회억제 체제를 산출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생산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 이제 더 이상 이성은 살아 있는 정신이 아니며, 모든 것은 도구화된다.
2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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