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국민의 풍요로움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사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1편에서 노동생산성이 분업에 의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에게 풍요로움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은 분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미개 사회와 분업이 진행된 문명사회를 비교한다. 미개 사회에서는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노동을 하고, 생산물은 사회구성원간에 가능한 한 평등하게 분배된다. 그렇지만 노동생산성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총생산물로 모든 사회구성원을 부양할 수 없다. 때문에 어린아이나 노인, 병자 등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일부가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 141쪽
밀레니얼 가족은 가족공동체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부부 개인의 니즈를 존중한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2019년 8월 한국의 성인 남녀 4,83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서도 개인을 중시하는 밀레니얼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생의 밀레니얼 세대는 성공적인 인생의 모습을 수입은 적지만 좋아하는 일, 취미 활동을 즐기면서 사는 삶‘을 1순위로 꼽았다.(27.5%) 반면, 1970년대생인 X세대의 경우 ‘큰 걱정 없이 안정된 수입으로 가족과 화목한 삶‘이 1위를 차지했다(66.2%). 가족을 1순위로 두는 기성세대와 달리, 가족 안에서도 개인이 존중받길 원하는 밀레니얼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148쪽.
* 반복 (repetition)들뢰즈에게 반복이란 결코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니다.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처럼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를 반복하지만 항상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반복을 같은 것, 즉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박복은 오히려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차이는 반복의 결과이다. * 파레르곤 parergon파레르곤은 에르곤ergon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에르곤이 작품의 본질을 의미한다면 파레르곤은 작품의 본질이 아닌 주변적인 것 혹은 장식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예술작품에는 원래부터 본질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분하는 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적인 것도 아니고 주변적인 것도 아닌 틀 자체가 예술작품의 의미이다. *도식 scheme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적 사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성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령 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원이라는 형상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원이라는 형상은 특정한 원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원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이 형상은 원이라는 개념이 가능하기 위한 일종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상상력에 의한 보편적 형상을 칸트는 도식이라고 부른다. * 파르마콘 pharmakon원래 약을 지칭하는 희랍어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문자(글)를 파르마콘에 비유하였다. 그 이유는 약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말 그대로 약이 되지만,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열 두통약은 통증에는 좋지만 위에는 매우 큰 손상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문자는 말을 기록하여 영원히 보존하고 널리 전파할 수 있지만,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의도가 왜곡되어 말 자체의 의미를 헤칠 수도 있다. *다양체 multiplicity다양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다양성이라 외형상 다채로움을 의미한다. 하지만 들뢰즈의 다양체는 어떤 존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무궁무진한 잠재성을 지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모습은 다양체로서의 그 사물이 겉으로 드러난 일부의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사물에 대한 우리의 정보를 사물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는 사물 자체가 지닌 잠재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 합목적성 purposiveness어떤 존재에 목적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가령 비행기의 날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동체가 날 수 있고 나는 동안에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비행기의 날개는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비행기의 날개가 비행과 균형유지에 적합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을 때 그것을 합목적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표상 representation재현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때로는 표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표상을 의미하는 영어의 representation이나 불어의 repre‘sentation에 비해서 독일어의 vorstellung이란 vor(앞에) stellen(가져다 놓음)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것을 앞에다 가져옴이 표상일 터인데, 가령 내 앞에 있는 가죽을 된 속이 비어있는 구를 보고 축구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축구공‘이라는 표상을 그 사물 앞에 내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표상적 사고란 우리의 세상이나 사물을 우리의 개념 혹은 표상을 덧씌워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 표상 체계의 폭력을거부하다. 데리다와 들뢰즈가 ‘개념을 폄하‘하는 것은 세상을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 ‘세상의 다양성‘이 사라져버린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개념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현실의 풍부함‘을 되찾겠다는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에는 개념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면서 이 세상을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기존 철학자 중에서도 개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진실은 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상가는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 1770~1891이다. 이 세상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헤겔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변증법도 세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의 일종이었다. 헤겔이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결국 차이가 아닌 동일성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차이란 곧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령, 우리의 지식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이 정작 이 세상의 본래 모습과 다르다고 해보자. 세계에대한 우리의 지식이 정작 세계 자체와 차이가 난다면 그 지식은 분명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실재의 모습이 동일한 완전한 지식을 꿈꾸었다. 완전한 지식을 꿈꾼 사상가는 헤겔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려 플라톤 Platon, BC 428?-347?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사상은 줄곧 세상의 본래 모습과 ‘동일한‘ 지식을 추구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헤겔이 살았던 근대는 인간의 지식이 완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인간의 지식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특성이 있었다. 헝가리 출신의 사상가 죄르지 루카치는 근대 철학의 특징을 "세계를 더 이상 인식 주체와 독립하여 성립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세계를 인간 자신의 산물로서 파악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24쪽
나는 선천적으로 수동적인 게 싫었고, 매사에 능동적이라야 직성이 풀렸다.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배워야만 했다. 나는 좋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좋은 학습자였다. 나는 도서관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수천 권, 수만 권의 책들을 마음대로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거닐고, 특별한 분위기와 다른 독자들과의 조용한 동행을 즐겼다. 그들은 모두 나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자신만의 것‘을 추구했다. 63쪽인큐내뷸러 incunabula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유럽에서 활자로 인쇄된 서적을 가리키는 말)64쪽나는 아무 곳에나 내키는 대로 시선을 던졌는데, 그러다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고는 ‘이게 웬 횡재냐‘하고 쾌재를 부르며 내 자리로 가져오곤 했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책을 읽으며 자기만의 세상에 몰입했지만,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나 친밀감도 존재했다. 책의 물질적 속성(이를 테면 같은 책꽂이, 심지어 바로 옆에 꽂혀 있는 경우)이 매개체가 되어, 그런 책들을 만지고 공유하거나 주고받거나, 심지어 대출한 독자들의 이름과 대출 날짜를 확인하는 가운데 유대관계까 새록새록 생겨났다. 66쪽. 허탈해하는 내 모습을 본 도서관 사서는,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디지털화되었다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제본된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데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서 대체될 수 없는 무엇, 즉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67쪽.
중세인들 앞에 놓인 삶에는 세 가지의 길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 험난하고 참단한 세상을 부정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그런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것을 더 좋고 더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이다. 세 번째는 더 좋은 세상을 직접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꿈꾸는 것이다. 만약 지상의 현실이 절망적일 정도로 비참하고 그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러한 이상의 환호속에서 지저분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중세 후기의 꽃인 기사도와 궁정 연애에서 이 세 번째의 길을 발견한다. 이것을 『호모 루덴스>의 언어로 말해보자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문화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자신의 작품이 성공작으로 평가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면 자신의 행복한 발명과 기발한 상상력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이 상상력의 발휘는 곧 놀이 정신과 상통한다. 실제로 『호모 루덴스의 개략적 주제를 밝히는 1장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다. 그 본질과의미"에서 하위징아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이런 종류의 연기를 펼칠 때 상상력(imagination)이 충만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린아이는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고상한 것, 더 위험스러운 것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imaking an image)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는 왕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사악한 마녀가 되고혹은 호랑이가 된다.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기쁨에 넘쳐 자기자신의 밖으로 나가 버린다(beside himself), 너무 황홀하여 그 자신이 왕자, 마녀, 호랑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러는 중에서도 "일상적 현실"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다. 그의 재현(다른 어떤 것이 되기)은 가짜 현실이라기보다 외양의 실현이다. 바로 이것이 imagination의 원뜻이다. 14-15쪽. 이종인 역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격나고 또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혀 왔다. 21쪽.
놀이의 존재는 인간적 상황의 초논리적 특성을 끊임없이 확인해 준다. 동물들은 놀이를 하기 때문에 기계적 사물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34쪽. 은유라는 것이 실은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이런 식으로 삶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의 세계 바로 옆에 제2의 세계, 즉 언어의 세계(시의 세계)를 창조했다. 또는 신화의 세계를 살펴보자. 이것 역시 외부 세계의 변모 혹은 ‘이미지 만들기(imagination)‘이다. 원시 사회는 신성한 의례, 희생, 성화, 신비를 수행했다. 이런 예식은 모두 세상의 웰빙(안녕과 복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순수한 놀이 정신의 구체화이다. 문명 사회의 위대한 본능적 힘인 법과 질서, 상업과 이익, 기술과 예술, 시가, 지혜, 과학 등은 신화와 의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놀이라는 원초적 토양에서 자양을 얻는다. 36쪽.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놀이는 진지함의 정반대 개념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놀이와 진지함의 대립 관계는 확정적인 것도 고정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놀이는 아주 진지하기 때문이다. 37쪽 놀이의 유의미한 기능이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인 반면, 웃음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생리적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웃는 동물(animal ridens)"이라는 개념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확실하게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해 준다. 38쪽
놀이는 어리석지 않다. 그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대립 관계를 초월한다.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적 관계, 나아가 진리와 허위, 선과 악 등의 대립 관계 바깥에서 존재한다. 놀이가 비물질적인 활동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기능을 가진 활동은 아니다. 선과 악의 평가 기준은 놀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놀이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놀이는 생활의 한 기능이지만 논리적, 생물적, 미학적 정의들 중 어느 하나도 포섭되지 않는다. 40쪽. 무엇보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