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해제 (1)>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글의 종류는 **‘엑소테리카exoterika‘로서, 그의 스승이었던 플라톤의 작품처럼 *대화체 형식으로 대중을 위해 쓴 글이다.

두 번째는 ‘에소테리카 esoterika‘라고 불리는 글로서 일반 대중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뤼케이온 학원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이나 각별한 관계에 있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 대내용 글들이다.

세 번째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글들로서 연구와 토론을 위한 일종의 **자료모음집 성격을 띠고 있으며, 제자들과의 공동 저술로 추정되는 글들이다.

<시학>은 이 가운데에서도 뤼케이온 학원에서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초록 형태로 작성했던 내대용 저술, 즉 ‘에소테리카‘에 해당된다.

실제로 <시학>은 그 자체에 상충되는 부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 따라서 토도로프의 말대로 <시학>을 번역한다는 것은 "하나의 해석이 될 수밖에 없으며, 다시 말해서 서로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때로 상반되는 여러 독서 행로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578-79쪽

<모방이냐, 재현이냐>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 고전기의 *비극 작품들과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대상으로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창작 원리"를 분석하고 이를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어 <시학>이라는 강의 초록 형태로 정리하였다.

뒤퐁록과 랄로는 **<시학>의 핵심 논제를 "시 전체가 아니라 시적 미메시스, 즉 사람의 행동을 언어로 재현하는 활동"으로 보고 논의를 이끌어간다.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미메시스 mimesis‘는 라틴어로 imitatio로 번역되었고 그에 따라 영어와 프랑스어에서도 이를 대부분 imitation, 즉 모방이라는 뜻으로 옮겨 썼으며, 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된 번역본이나 해설서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모방‘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모방‘이란 말에는 ‘모델‘이 되는 원본과의 거리나 차이, 그리고 때로는 가짜나 모조품이라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다는 점에서 에서 미메시스를 ‘모방‘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그 개념이 단순히 예술 양식이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 ‘닮음‘, ‘유사성‘에 근거한 동일성의 철학적 전통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메시스를 둘러싼 이 논쟁이야말로 근대 리일리즘만이 이니라 서구 미학사 전체를 관류하는 핵심 논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모든 논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티 흘러나은다.


581-2쪽


  미메시스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은 『국가』 3권과 10권에서 볼 수 있는데, 3권에서는 *예술의 기본 원칙을 *미메시스-모방이라고 보고, *모방은 환영을 만들어내며 그래서 인간의 *영혼을 *이데아-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시인들에 내한 플라톤의 반감도 거기서 비롯된다. 10 권에는 그 유멍한 시인 추방론이 나온다. "**사실상 이 모방자들은 실제의 존재가 아니라 환상들만을 만들어낼 따름이다." 

시인들은 원초적인 이데아의 타락되고 변질된 이미지나 환상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든 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을 보다 덜 모방함으로써 덜 혹세무민하는 "가장 근엄한 모방자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이 들어 있다. 현실은 이데아의 반영이며 모상(模像)에 불과하므로 그러한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시)은 ‘모방의 모방‘으로서 진리의 세계에서 두 단게나 멀어지게 된다. 

또한 아름다움이란 유용성이므로 두려움과 연민 같은 감정은 쓸모없을 뿐 아니라 관객을 부패시키고 오염시키는 해로운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떤 형태의 모방 -
‘환영(illusion)‘ 도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미학)은 감정의 정화를 실현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윤리적 덕목이 들어설 자리가 여기에는 없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플라톤은 『국가』 3권에서 보복이 들어설 자리가 여기에는 없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플라톤은 <국가』 3권에서 **모방의 양태를 구분하고 **서열을 매기는데, 문학 장르의 원초적 유형론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구분은 등장인물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연극에서처럼 엄밀한 의미에서의 모방(미메시스)과 화자가 이야기의 주체로 등장하는 서사시에서처럼 간접적인 모방(**디에게시스)의 대립에 토대를 두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미메시스는 배우를 매개로 등장인물이 마치 자기가 실제 인물인 것처럼 말하는 발화 행위 형태이며, 디에게시스, 즉 이야기는 화자가 등장인물 뒤에 자신을 숨긴 채 이야기되는 사건을 마치 자기가 본 듯이 말하는 발화 행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미메시스와 디에게시스의 중간 유형으로 플라톤은 "혼합된" 양태를 제시하는데, 등장인물의 대사와 화자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는 호메로스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581-3쪽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4장에서 ‘재현‘을 통해 즐거움과 배움을 얻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재현하려는 성향과-사람은 유난히 무언가를 재현하려는 성향이 있으며, 재현을 통해 배움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재현된 것들에서 쾌감을 느끼는 성향을 동시에 타고난다."

여기서 재현의 즐거움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능동적인 것으로 무언가를 재현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수용과 관련된 것으로 재현한 작품 앞에서 느끼게 되는 독특한 쾌감이다.

사람은 재현하거나 재현한 것을 보면서 배우고 즐거움을 느낀다. 이는 재현 활동 자체가 고유의 형태를 ‘추상화‘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자연의 대상을 재현된 대상과 연관시킴으로써 놀라움 thaumazein과 동시에 배우는 manthanein 쾌감, 즉 무언가를 ‘발견‘하는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는 재현 활동 자체가 대상의 정확한 복제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논거가 될 수 있다. "**모든 재현 활동은 특수한 것에서 보펴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시삭> 그 어느 곳에서도 미메시스 개념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583-4쪽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이 소설의 원제목은 ‘animal triste‘다.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풋내기 수도사 아드소는 야생적인 소녀와의 첫 경험 이후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을 최초로 실감하면서 저 관용구를 상기한다)

(...)

그날 이후로 두 남녀는, 각자의 가족이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24쪽)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자신의 경우는 후자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남자, 프란츠를 만나면서 그녀의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어느 날 가족에게로 되돌아가고,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멈췄다. 이제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또 실천했다.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66-8쪽

<5.18과 4.3 사이>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은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

대체로 인간 개개인의 진실이라는 것은 도무지 한두 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일 때가 많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실은, 이렇게 시작되는 긴 이야기의 끝에서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전짓불을 들고 있는 이들은 그 이야기를 다 들을 생각이 없었으리라.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원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가장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9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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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헤밍웨이>
허무, 허무 그리고 허무


해럴드 블룸은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에서 현대 단편소설이 두 개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체호프-헤밍웨이‘ 양식과 ‘카프카-보르헤스‘ 양식.

중년의 사내는 홀로 카페를 정리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는 노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허무였다. 모든 것이 허무였고 인간 또한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241쪽)

이 소설의 제목인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여기에서 나왔다. **삶의 허무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장소, 노인이 밤마다 떠나지 못하는 그 카페 같은 곳.

이어 중년의 사내는 특별한 주기도문을 외운다. 성스러운 단어들의 자리에 모두 스페인어 ‘nada‘(허무)를 집어넣은 이상한 주기도문을.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
당신의 이름으로 허무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허무하소서.

하늘에서 허무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허무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허무한 것을
허무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허무를 허무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허무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허무에서 구하소서.

허무로 가득한 허무를 찬미하라,
허무가 그대와 함께하리니.


60쪽.


다음은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다.
"헤밍웨이는 문학과 삶 사이의 장막을 축소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작가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일이죠."

61쪽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제임스 설터, <어젯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가?‘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신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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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 당신의 지겨운 슬픔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신형철, <책을 엮으면>,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세 해석들은 모두 특정한 가치관에 근거한, 또 그것을 확산시키려는 마음의 소산일 터인데, 차례로 말하면 반전과 평화의 가치관, 인과응보의 도덕적 가치관, 신과 운명 앞에서의 겸허함에 대한 그리스적 가치관이 그것이다. 그러나 <킬링 디어>에 없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가치다.

란티모스 감독은 어떤 가치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 보인다. 그는 벗기고 무너뜨리고 조롱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아르테미스의 분노에 관해서는 가장 간단한 해석, 즉 단지 아가멤논이 실수로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택했고, 아르테미스보다는 아가멤논의 고뇌와 선택에 더 주목한다.

‘인간다움(인간성)‘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비참한 희극으로 그려내는 것이 란티모스 감독의 특장이라는 평가에 일말의 이견도 없다.

전작 <랍스터>에서도 그랬거니와 그는 난제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앞에 선 인간이 느낄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는 윤리학을 일종의 논리학처럼 다룬다. 이 영화에서도 윤리적 딜레마에 휘말린 인물은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수험생처럼 보일지경인데, 여기에는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역이 있을 뿐이다.

딜레마의 덫을 놓고 그것에 걸린 사람이 발버둥 치다가 피투성이가 돼 바져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 이 창작자는 인물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냉철함을 더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요컨대 이 잔혹한 윤리학 실험실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이를테면 교육학이다.


20-23쪽

<슬픔에 대한 공부>
발터 벤야민과 함께


-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의 3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특별히 발터 벤야민의 글 <이야기꾼>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패전국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왕은 왜 그랬을까? 그의 마지막 슬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오래전에 몽테뉴는 이렇게 해석했다.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조금만 그 양이 늘었어도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길, 428쪽) 딸과 아들까지는 잘 눌러참았는데 시종을 보자 그 슬픔이 흘러넘쳤다는 것.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를 감독시키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감동시키는 것들이 많다. 이 시종은 그 왕에게 단지 그러한 배우였을 뿐이다."

우리는 정작 내 가족들의 고통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 ㄹ때는 뜻밖에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가족에 비해 시종은 확실히 왕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다. 그 거리 때문에 왕에게 시종은 일종의 극화된 비참으로 다가온 것일 수도 있었겠다.

이제 벤야민 자신의 해석을 들어볼 차례다.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 시종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헤로도토스의 실제 <역사> 이야기 속 노인은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다. 왕 자신의 해명도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크옵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벤야민에게 속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가 소개한 해석들로 우리는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이런 것이 슬픔에 대한 공부다.

29-32쪽

<터널 앞에서>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울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42-3쪽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그것에서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날 밤의 남편이 그랬을 법한 뒷모습을 한 채로 걷는 것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59쪽)"


그녀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말하지 말자. 그저 이 ‘뒷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한 소설이라는 것만 말하자.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44)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이 신비스로운 것이다." (6.522)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 그런 것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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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듀오와 같은 결혼정보회사가 1인 가구를 말할 때는 미혼의 청춘남녀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사회복지사의 1인 가구는 독거노인들을 부르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것은 그 사람들이 일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혼자 산다는 것이 냉탕과 온탕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삶은 때로는 자유롭고, 어떤 때는 처량하고 그런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혼자 사는 삼ㄹ을 선택한 사람도 매우 많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확고한 철학이나 이념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혼자 사는 사람이 된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념을 신봉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고, 이혼의 철학 때문에 이혼을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이혼을 택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7-9쪽

<머리말 2>


삶의 단계 단계마다 혼자 사는 것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서점에서 요리책과 함게 인문학 책을 사는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혼자 사는 것에서 환상을 느낀다면,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늙고 추한 남자가 요리책과 인문학 책을 사는 모습과 마주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판타지의 대상인 싱글과 *사회적 사실로서의 혼자 살기는 다르다. 싱글이 판타지로 다루어질 때는 상상력만 필요하다. **상상력은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날 때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 판타지의 충족감은 현실과의 가리에 비례해서 커진다.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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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은 충분히 얻기 위해 나름대로 값을 치렀고, 그래서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때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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