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디어> / 당신의 지겨운 슬픔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신형철, <책을 엮으면>,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세 해석들은 모두 특정한 가치관에 근거한, 또 그것을 확산시키려는 마음의 소산일 터인데, 차례로 말하면 반전과 평화의 가치관, 인과응보의 도덕적 가치관, 신과 운명 앞에서의 겸허함에 대한 그리스적 가치관이 그것이다. 그러나 <킬링 디어>에 없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가치다.
란티모스 감독은 어떤 가치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 보인다. 그는 벗기고 무너뜨리고 조롱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아르테미스의 분노에 관해서는 가장 간단한 해석, 즉 단지 아가멤논이 실수로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택했고, 아르테미스보다는 아가멤논의 고뇌와 선택에 더 주목한다.
‘인간다움(인간성)‘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비참한 희극으로 그려내는 것이 란티모스 감독의 특장이라는 평가에 일말의 이견도 없다.
전작 <랍스터>에서도 그랬거니와 그는 난제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앞에 선 인간이 느낄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는 윤리학을 일종의 논리학처럼 다룬다. 이 영화에서도 윤리적 딜레마에 휘말린 인물은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수험생처럼 보일지경인데, 여기에는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역이 있을 뿐이다.
딜레마의 덫을 놓고 그것에 걸린 사람이 발버둥 치다가 피투성이가 돼 바져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에 이 창작자는 인물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냉철함을 더 의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요컨대 이 잔혹한 윤리학 실험실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이를테면 교육학이다.
20-23쪽
<슬픔에 대한 공부> 발터 벤야민과 함께
-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의 3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특별히 발터 벤야민의 글 <이야기꾼>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패전국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토스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왕은 왜 그랬을까? 그의 마지막 슬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오래전에 몽테뉴는 이렇게 해석했다. "왕은 이미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조금만 그 양이 늘었어도 댐이 무너질 판이었다."(<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길, 428쪽) 딸과 아들까지는 잘 눌러참았는데 시종을 보자 그 슬픔이 흘러넘쳤다는 것.
"실제의 삶에서는 우리를 감독시키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감동시키는 것들이 많다. 이 시종은 그 왕에게 단지 그러한 배우였을 뿐이다."
우리는 정작 내 가족들의 고통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 ㄹ때는 뜻밖에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가족에 비해 시종은 확실히 왕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다. 그 거리 때문에 왕에게 시종은 일종의 극화된 비참으로 다가온 것일 수도 있었겠다.
이제 벤야민 자신의 해석을 들어볼 차례다.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 시종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헤로도토스의 실제 <역사> 이야기 속 노인은 ‘시종‘이 아니라 왕의 ‘친구‘였다. 왕 자신의 해명도 이미 이야기 안에 있었다. "제 집안의 불행은 울고불고하기에는 너무나 크옵니다. 하지만 제 친구의 고통은 울어줄 만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벤야민에게 속은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가 소개한 해석들로 우리는 슬픔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다. 이런 것이 슬픔에 대한 공부다.
29-32쪽
<터널 앞에서>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울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42-3쪽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그것에서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날 밤의 남편이 그랬을 법한 뒷모습을 한 채로 걷는 것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59쪽)"
그녀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말하지 말자. 그저 이 ‘뒷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한 소설이라는 것만 말하자.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44)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이 신비스로운 것이다." (6.522)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 그런 것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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