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대 신화가 계보와 전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화와 철학 또는 뮈토스와 로고스의 유사점을 보기보다는 신화 안에 합리적 시도의 서사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단초를 본다.

신화, 즉 이야기에는 ‘이해‘ 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합리성이 혼재(混在)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합리적이지 않지만 합리적 시도와 실패의 서사가 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신비(mystery)의 의미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신비는 어떤 신성(神性)에 대한 비밀스런 숭배라는 이미를 지닌다. 

어원적으로 신비는 ‘눈 또는 입을 닫는다(to shur theeyes or lips)‘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의 동사(myein)에서 유래한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 어원 역시 비밀을 지키는 비교(敎)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눈과 입을 닫는다는 것을 살 생각해보면 그것은 곧 신비성이 합리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과 입은 이성과 지식의 상징이다. 관조, 사유, 이론 등의 어원인 그리스어 ‘테오리아(theoria)도 원래 ‘보다‘ 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입은 ‘말하다(legein)‘는 것과 연관 있고 이것은 ‘로고스(logos)‘와 밀접하다. 따라서 신비는 합리로 바뀔 수 있다. 눈을 뜨고 입을 열면 되기 때문이다.

신비가 신비인 것은 어떤 이치를 품고 있으되 명시적으로 소통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비를 합리적으로 풀어내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즉 이야기로서 신화(mythos)가 되는 것이다. 이때 합리성은 신비의 세계와 삼투압적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합리적 체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화에서 신화와 합리는 혼재한다. 이야기 안에서 신비와 합리는 살마키스의 몸과 뒤엉킨 헤르마프로디토스 같다.


8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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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독일에서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하나의 돌발 사건이었으며, 아름다운 소비였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처참한 관점에서 예술가를 규정짓는 일은 위대한 인간을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그들에게서 어떤 이익도 끌어낼 수 없었다는 점.
이것이 바로 위대한 예술이다.

/ 우상의 황혼

22쪽


나의 친애하는 그림자여,

내가 너를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기쁘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빛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르듯,
언어에 간결함이 전해지듯,
성격에 선량함과 견고함이 존재하려면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적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는 늘 정답게 손을 잡고 있다.
빛이 사라질 때 슬며시 그림자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빛을 따라간 것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4쪽

비극의 탄생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은 그리스 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을 일깨워 주었다.

호메로스적인 아폴론의 리라에 익숙했던 그리스 인들은 음악을 리듬의 물결이라고 생각했으며, 상태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조형으로 여겨 왔다.

아폴론의 리라는 한마디로 암시적인 음조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전파한 새로운 음악은 영혼을 흔드는 멜로디였다.

그는 여러 음을 한 가지 주제로 통합시키는 화음을 발명했는데, 이 디오니소스적인 화음을 처음 접한 그리스인들은 그동안 **억제해 왔던 **본능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 황홀한 감정에 그들은 순간적으로 미쳐 버린 것이다.

인습적인 한 가지 음에 길들여진 그리스 인들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에서 자연이 처음 잉태되던 순간을 떠올렸고, 아폴론의 리듬이 지배하던 이성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아침, 이 모든 꿈에서 깨어난 그리스 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놀라움은 디오니소스가 보여 준 환희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뒤집어쓴 가면 속에 이토록 **환희의 절정이 숨겨져 있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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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1>
/ 수음하는 오디세우스, 노래하는 세이렌



윤희중은 하인숙의 노래(<목포의 눈물>)를 들으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꼼꼼히 평가한다. 윤희중에 따르면 하인숙의 목소리에는 ‘꺾임‘
고 가라짐‘과 ‘청승맞음 이 없다. 그 대신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다른 어떤 것이 있다. 

윤희중은 하인숙의 목소리에서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what is in the object more than the object itself)‘ 을 발견한다. 

 그가 발견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 이란 "무자비한 청승맞음"과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이다. 그것은 ‘광녀의 냉소‘와 ‘시체의 냄새‘로 환유된다. 말하자면 하인숙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미친 여자와 자살한 술집 여자의 계열로 진입하고 있다. 

*충동의 공간인 무진에서 *매혹이 발생하는 첫 장면은 하인숙이 그녀의 노래와 함께 광녀와 시체 사이의 빈칸으로 점유해 들어오는 순간이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사랑이란 *대상(object)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대장 이상의 어떤 것(object a)‘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의 환상을 붙들어매고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대상‘을 욕망하게 한다.

**사랑에 관한 모든 담론은 그 ‘대상 a‘ 를 순화하고 길들여서 상징화하려는 시도이다. Renata Salecl and Slavoj Žižek (ed.). Gaze and Voice as Love Objects, Duke UP,
1996, p. 3)


101쪽

<무진기행 2>


지금 현재 윤희중이 매혹당한 것은 한 인간 전체가 아니라 하인숙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충동(drive)과 욕망(desire)의 구별은 중요하다. 윤희중은 하인숙을 ‘욕망‘할 수 있거나 하인숙의 목소리에 ‘충동‘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윤희중이 놓여 있는 층위는 후자이다.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위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다리가 끝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라다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176쪽)

위 대목에서도 역시 하인숙은 그 자신의 ‘목소리‘ 로 윤희중의 "생애 속에 끼어든"다. 이런 경우의 ‘목소리‘, 즉 충동의 대상이 되는 대상을 프로이트는 **‘부문대상(partial object)‘이라고 불렀다. 

위에서 살핀 대로 윤희중은 하인숙의 ‘목소리‘라는 부분대상에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그 목소리라는 대상 안에서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들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을 라캉은 **‘대상 a(‘objet petit a)‘ 라고 명명한다. 

하인숙의 ‘목소리-노래‘에서 윤희중은 광녀의 비명과 시체의 침묵, 즉 거세된 *치명적인 향유의 잔여물인 *대상 a를 보고 있는 것이다.


// 반대로 **전체로서의 개인을 우리의 *리비도적 대상으로 취할 때 우리는 *충동의 층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층위에 있는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 앞의 책,
" 우리는 충동의 의의나 살레클, 앞의 책, 87쪽)


102쪽

<무진기행 3>


라캉 정신분석에서 **환상 fantasy은 고전적인 의미의 환상, 즉 ‘욕망이 실현된 상태를 상연해주는 상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환상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혹은 *욕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틀로서 기능한다.

남자는 여자가 그의 환상의 틀로 들어가는 한에서만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라캉은 지적한다.

윤희중은 스스로를 핑커튼의 자리에 옮겨놓지 않고서는 하인숙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윤희중이 자기 자신을 핑커튼의 위치에 갖다놓는 순간, 즉 하인숙이 윤희중의 환상의 틀에 ‘나비부인‘으로 들어오는 순간, 윤희중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목포의 눈물>이라고 하는 *충동의 차원으로부터 ‘나비부인‘이라는 *환상의 매개를 거쳐 윤희중은 *욕망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윤희중은 **충동의 층위에서 욕망의 층위로 이동한 것이다.

왜 이동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일반론적인 대답은 충동은 위험하고 최종 심급에서는 언제나 죽음충동 death drive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이때 **충동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욕망이다.

그리고 충동이 욕망에 의해 방어될 때 사랑이 발생하는 것이다. 혹은 충동이 욕망으로 수준을 낮출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말해도 좋다. (**오직 사랑만이 (충동의) 향유를 욕망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 라캉 세미나 10)

**사랑은 우리가 실제로은 타자의 대상 a에 매혹됐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는 주체가 자신의 (충동의 만족인) 향유를 방어하는 매커니즘이다.

그런데 또 환상은 주체가 타자의 충동(향유)으로부터 주체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환상을 통해 우리는 타자의 충동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되고 이때 환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즉 **환상은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타자의 욕망에 대해 그에 걸맞은 해답을 주체에게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나비부인‘ **환상은 하인숙에 대한 윤희중의 **욕망을 지탱한다. (욕망은 충동의 향유를 가면 씌우는 환상 시나리오에 의해 지탱된다 / 레나타 살레클)


13-5쪽

<무진기행 4>


하인숙의 충동을 하인숙의 욕망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욕망의 수준에서 하인숙은 분명 ‘나비부인‘처럼 보인다. 그녀는 핑커튼을 간절히 기다리는 나비부인처럼 ‘서울 냄새‘가 나는 윤희중과의 엑소더스를 꿈꾼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윤희중의 *욕망의 대상으로 정립한다.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자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늘 타자에게 묻는다.


// 여자는 남자가 그녀에게서 보는 그 대상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염려하기 *늘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이상의 것에 궁금해한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그녀는 끊임없이 **타자(the Other)의 욕망에 대해 질문한다.


106쪽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1>
/ 김영하의 90년대와 배수아의 2000년대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에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리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場)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어쩌면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42쪽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2>


한국문학이 이와 같은 의미의 ‘윤리‘ 를 사유하기 시작한 시점을 묻는일은 가능할까? 가능한 한 근(近)과거로 당겨잡는다면 ***90년대 초반의 지형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과 행위의 준거를 제공해주는 이념이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좋았던 옛 시절‘ 이었다.

 그러나 **90년대가되면서 이념이라는 좌표는 희미해졌다. **좌표가 사라지면 자유가 오는것이 아니라 좌표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온다. 

*폐허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기 입법의 자유와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비로소 도덕이 아니라 *윤리를 사유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작가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윤대녕은 ‘나‘ 라는 개별적 주체의 기원을 탐문하면서 **주체란 외상(外傷)적 기억의 상실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구멍난 존재라는사실을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목가‘ 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신경숙은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과 대면하고 타자를 용납하는 일의 지난한 종교성을 언어화하면서 레비나스의 시대 (바디우)와 공명했다.

장정일은 풍속/법의 불안정한 위선을 천진난만한 외설로 폭로하면서 바스티유의 사드(Sade)를 반복했다.

 이 세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어떤 윤리의 장을 개시(開始)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 ***세 작가는 각기 ‘주체‘ ‘타자‘
큰 타자‘ 에 대해 탐구하면서 윤리학의 삼각형을 구성했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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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서는, 태초에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카오스Chaos라고 가르친다. 이 카오스라는 말은 요즘은 보통 *‘무질서‘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많은 신화책들이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고 적고 있지만(보통 신화 입문서로 많이 쓰이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아기의 영향이다), 

원래 **희랍어로 Chaos라는 말은 **하품하다chasko‘와 연관된 말 로 ‘**큰 틈을 의미한다(여기서 영어의 틈chasm‘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틈이라고 하면, 당장 그 틈의 가장자리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기 쉽지만 일단 여기서는 그냥 넓고 넓은 허공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곧이어 땅(가이아(Gaia)과 지하 세계의 심연(티르타로스Tartaros)이 생기기 때문에 이 틈은 그것들에 의해 한정되게 된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맨앞에는 하느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카오스와 유사한 개념이라 하겠다.

 카오스 다음으로 생긴 것은 **가이아와 에로스Eros다. 이 둘이 어떻게해서 생겨났는지는 소개되어 있지 않은데, 카오스가 스스로 분화하여 셋으로 나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태초의 이 세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해 보지면, **카오스는 원초적 공간 또는 분리의 원리이고, **가이 아는 모든 것의 원재료가 되는 원초적 질료이며, **에로스는 결합의 원리라 할 수 있겠다.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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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마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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