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1> / 수음하는 오디세우스, 노래하는 세이렌
윤희중은 하인숙의 노래(<목포의 눈물>)를 들으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꼼꼼히 평가한다. 윤희중에 따르면 하인숙의 목소리에는 ‘꺾임‘ 고 가라짐‘과 ‘청승맞음 이 없다. 그 대신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다른 어떤 것이 있다.
윤희중은 하인숙의 목소리에서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what is in the object more than the object itself)‘ 을 발견한다.
그가 발견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 이란 "무자비한 청승맞음"과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이다. 그것은 ‘광녀의 냉소‘와 ‘시체의 냄새‘로 환유된다. 말하자면 하인숙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미친 여자와 자살한 술집 여자의 계열로 진입하고 있다.
*충동의 공간인 무진에서 *매혹이 발생하는 첫 장면은 하인숙이 그녀의 노래와 함께 광녀와 시체 사이의 빈칸으로 점유해 들어오는 순간이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사랑이란 *대상(object)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대장 이상의 어떤 것(object a)‘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의 환상을 붙들어매고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대상‘을 욕망하게 한다.
**사랑에 관한 모든 담론은 그 ‘대상 a‘ 를 순화하고 길들여서 상징화하려는 시도이다. Renata Salecl and Slavoj Žižek (ed.). Gaze and Voice as Love Objects, Duke UP, 1996, p. 3)
101쪽
<무진기행 2>
지금 현재 윤희중이 매혹당한 것은 한 인간 전체가 아니라 하인숙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충동(drive)과 욕망(desire)의 구별은 중요하다. 윤희중은 하인숙을 ‘욕망‘할 수 있거나 하인숙의 목소리에 ‘충동‘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윤희중이 놓여 있는 층위는 후자이다.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위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다리가 끝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여자가 *정말 무서워서 떠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라다주기를 청했던 바로 그때부터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든 것을 느꼈다. (176쪽)
위 대목에서도 역시 하인숙은 그 자신의 ‘목소리‘ 로 윤희중의 "생애 속에 끼어든"다. 이런 경우의 ‘목소리‘, 즉 충동의 대상이 되는 대상을 프로이트는 **‘부문대상(partial object)‘이라고 불렀다.
위에서 살핀 대로 윤희중은 하인숙의 ‘목소리‘라는 부분대상에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그 목소리라는 대상 안에서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들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것‘을 라캉은 **‘대상 a(‘objet petit a)‘ 라고 명명한다.
하인숙의 ‘목소리-노래‘에서 윤희중은 광녀의 비명과 시체의 침묵, 즉 거세된 *치명적인 향유의 잔여물인 *대상 a를 보고 있는 것이다.
// 반대로 **전체로서의 개인을 우리의 *리비도적 대상으로 취할 때 우리는 *충동의 층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층위에 있는 것이다." (레나타 살레클, 앞의 책, " 우리는 충동의 의의나 살레클, 앞의 책, 87쪽)
102쪽
<무진기행 3>
라캉 정신분석에서 **환상 fantasy은 고전적인 의미의 환상, 즉 ‘욕망이 실현된 상태를 상연해주는 상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환상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혹은 *욕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틀로서 기능한다.
남자는 여자가 그의 환상의 틀로 들어가는 한에서만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라캉은 지적한다.
윤희중은 스스로를 핑커튼의 자리에 옮겨놓지 않고서는 하인숙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윤희중이 자기 자신을 핑커튼의 위치에 갖다놓는 순간, 즉 하인숙이 윤희중의 환상의 틀에 ‘나비부인‘으로 들어오는 순간, 윤희중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목포의 눈물>이라고 하는 *충동의 차원으로부터 ‘나비부인‘이라는 *환상의 매개를 거쳐 윤희중은 *욕망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윤희중은 **충동의 층위에서 욕망의 층위로 이동한 것이다.
왜 이동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일반론적인 대답은 충동은 위험하고 최종 심급에서는 언제나 죽음충동 death drive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이때 **충동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욕망이다. 그리고 충동이 욕망에 의해 방어될 때 사랑이 발생하는 것이다. 혹은 충동이 욕망으로 수준을 낮출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말해도 좋다. (**오직 사랑만이 (충동의) 향유를 욕망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 라캉 세미나 10)
**사랑은 우리가 실제로은 타자의 대상 a에 매혹됐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는 주체가 자신의 (충동의 만족인) 향유를 방어하는 매커니즘이다.
그런데 또 환상은 주체가 타자의 충동(향유)으로부터 주체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환상을 통해 우리는 타자의 충동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되고 이때 환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즉 **환상은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타자의 욕망에 대해 그에 걸맞은 해답을 주체에게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나비부인‘ **환상은 하인숙에 대한 윤희중의 **욕망을 지탱한다. (욕망은 충동의 향유를 가면 씌우는 환상 시나리오에 의해 지탱된다 / 레나타 살레클)
13-5쪽
<무진기행 4>
하인숙의 충동을 하인숙의 욕망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욕망의 수준에서 하인숙은 분명 ‘나비부인‘처럼 보인다. 그녀는 핑커튼을 간절히 기다리는 나비부인처럼 ‘서울 냄새‘가 나는 윤희중과의 엑소더스를 꿈꾼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윤희중의 *욕망의 대상으로 정립한다.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자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늘 타자에게 묻는다.
// 여자는 남자가 그녀에게서 보는 그 대상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염려하기 *늘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이상의 것에 궁금해한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그녀는 끊임없이 **타자(the Other)의 욕망에 대해 질문한다.
106쪽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1> / 김영하의 90년대와 배수아의 2000년대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에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리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場)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어쩌면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42쪽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2>
한국문학이 이와 같은 의미의 ‘윤리‘ 를 사유하기 시작한 시점을 묻는일은 가능할까? 가능한 한 근(近)과거로 당겨잡는다면 ***90년대 초반의 지형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과 행위의 준거를 제공해주는 이념이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좋았던 옛 시절‘ 이었다.
그러나 **90년대가되면서 이념이라는 좌표는 희미해졌다. **좌표가 사라지면 자유가 오는것이 아니라 좌표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온다.
*폐허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기 입법의 자유와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비로소 도덕이 아니라 *윤리를 사유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작가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윤대녕은 ‘나‘ 라는 개별적 주체의 기원을 탐문하면서 **주체란 외상(外傷)적 기억의 상실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구멍난 존재라는사실을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목가‘ 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신경숙은 **‘타자의 얼굴 (레비나스)과 대면하고 타자를 용납하는 일의 지난한 종교성을 언어화하면서 레비나스의 시대 (바디우)와 공명했다.
장정일은 풍속/법의 불안정한 위선을 천진난만한 외설로 폭로하면서 바스티유의 사드(Sade)를 반복했다.
이 세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어떤 윤리의 장을 개시(開始)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 ***세 작가는 각기 ‘주체‘ ‘타자‘ 큰 타자‘ 에 대해 탐구하면서 윤리학의 삼각형을 구성했다.
14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