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렉의『보통 이하의 것들』(김호영 옮김, 녹색광선, 2023, 212쪽 분량)에 담긴 아홉 편의 글은 실험실에서 도출한 듯한 재기발랄한 에세이와 자유로운 사유가 빛나는 아름다운 단편을 고루 보여준다. 첫 번째 <무엇에 다가갈 것인가?>에서 작가는 우리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떤 식으로 채워지며 날이 바뀌고 인생이 나아가는 동안 무엇을 남기는가 질문한다.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며, 본질 또는 진짜 스캔들, 진짜 사회적인 불편함은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p.16)이라고 강조한다. 평범한 것들에 언어를 부여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p.17)이라고 선언한다.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화두와는 상당히 배치된다.
우리에 대해 말한다는 행위,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은 페렉을 본보기 삼을 수 있다. 그가『공간의 종류들』에서 집요하게 점유해 나갔던 공간은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명명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 두 번째 실린 <빌랭 거리>는 ‘장소들’ 프로젝트라는 틀 안에서 공간을 재탐색한다. <빌랭 거리>는 양가가 폴란드 이주 유대인이었고, 2차 대전 당시 부모를 잃었던 작가에게는 태어나고 자랐던 유년의 장소다. 그는 도시정비사업으로 사라질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12년 동안 총 24번의 묘사를 계획했으나, 작업은 계획과 달리 중성적인 묘사 여섯 번과 회상을 담은 여섯 번에 그쳤고, 책은 중성적인 묘사 여섯 개를 모아 놓은 것이다.
24쪽 빌랭 거리 지도와 함께 1969년 첫 번째 기록부터 75년까지 총 여섯 번의 기록을 남긴다. 첫 번째 기록은 분량이 가장 많고 좀 더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뒤로 갈수록 언급되지 않은 번지가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한다. 방문했을 때의 변화를 삽입하고 주변 사람들을 언급하며 덧댄다. 여섯 번째인 마지막 기록은 1975년 새벽 2시경 방문 스케치인데 왜 그 시간에 찾아갔을지 그의 새벽 외출을 짐작한다. 또한 시멘트 펜스라는 단어와 노동은 고문이라는 등식 낙서가 고되고 막막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트라우마가 있는 장소를 매년 한 번씩 찾아가 감정을 배제하고 기록한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감정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했을 객관적 기록이라는 형식은 충분하고 필요한 안전장치였을까.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저편으로 넣어 버릴 수 없고 잃어버리지 못하는 기억에, 어쩌면 무의식 가까이 가라앉아 있어서 꺼낼 방법이 없는 무언가에 닿겠다는 의지의 실현이었을까. 나름의 구조 절차가 아니었을까, 그는 목적을 달성했을까,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기록해야 할까, 기록해야 했을까, 내가 기록하지 않음으로 이미 잃어버린 장소, 곧 풍화되거나 무화될 수 없는 삶의 빈약한 조각은 무엇일까 자문한다.
<생생한 컬러 엽서 이백사십삼 장>은 울리포의 조합 문학 창작 방식을 따라가며 한계를 넘어 언어에 내제된 ‘무한한 표현 가능성’(p.51)을 전한다. 역자 노트가 이 장을 대신하는데 작가의 창작이 인공지능(AI)의 방식으로 작성된 최초의 글쓰기 사례 중 하나이며, 페렉은 이 모든 수고를 직접 수작업으로 해냈다니 놀라움을 안긴다. 그 결과물이 이탈로 칼비노에게 보내는 끝이 없어 보이는 안부 엽서이겠다. 반복되는 패턴의 글 묶음은 엽서라는 한정된 지면에 쓰기에 단문일지라도 마치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니 인내력 부족한 필자는 ‘미친다’, ‘화난다’ 등의 단어를 여백에 적어 넣으면서 읽고 있다. 인내력 테스트의 장이다.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엽서 수신자인 이탈로 칼비노의『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었어야 한다. 칼비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화를 돋군다.
<런던 산책>은 무척 아름다워서 다시 읽고 싶다. 그 안에 사용된 단어(명사)와 명소, 실존 인물과 책 속 인물, 거리 풍경과 작품 속 배경이 우아하게 교차한다. <지성소>는 글에서 잠시 스친 진통제 영향인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알카 셀처>를 감상하며 읽어도 좋겠고 무엇보다 결말이 신의 한 수다. <천구백칠십사 년 한 해 동안 내가 먹어치운 유동식과 고형 음식들의 목록 작성 시도>는 ‘글을 쓰자’ 고 마음 먹는다고 바로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니 있었구나, 최소한 일 년 전에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돌입 했겠구나 알게 된다. 독자는 책을 읽는 동시에 분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매일 식탁에 남아서 또는 잠들기 전에 꾸깃한 메모지에 오늘 먹은 음식을 적어 넣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다가 벌떡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애초에 이런 시도를 결심한 자신을 탐탁치 않아하며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는 기록했을 테고, 분류하고 합산하였을 텐데 합산은 월별로 묶어서 한 후에 계절별로 더하거나 최종 일 년을 모았을 테다. 육 해 공 음식 재료 중에 어떤 재료로 만든 음식을 앞에 배치할 지를 궁리했을 수도 있다. 조리법 별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생선류, 소고기류, 송아지고기류, 돼지류, 양, 닭, 토끼로 이어지는 단백질 공급원들을 지나 치즈, 과일, 파이, 아이스크림, 주류 쪽으로 이동하면 이편이 좀 더 기호에 맞다고 눈독을 들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라진 음식들을 2026년의 한 독자는 품평하고 있다. 아니 왜 커피는 없어? 나라면, 나라면, 하고 군침을 흘리며 나의 목록 작성 계획을 저울질 하고 있다.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도 매력이 넘친다. 보르헤스의 미로 또는 뫼비우스 띠가 생각나는 글 앞에서 독자는 눈에 힘을 준다. 아이고 눈이 팽팽 도네, 달라진 단어는 무엇인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활자에 기울기를 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어지는 <나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에서도 여러 가지 참견을 하였지만 “알베르 카뮈를 왜 싫어해? 말도 안 된다” 하나만 꼽겠다. 해설도 아껴 읽어야 한다. 상실과 애도로써의 페렉의 글쓰기는 먹먹함을 남긴다. 어머니의 미용실 흔적이 남아 있던 24번지 건물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게 페렉 사망 다음날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떠나지 못하게 붙든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2월 숭학당 논제 세미나 도서로 선택하였다. 토론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읽는 도중에 읽기란 무엇인가 내가 읽는 행위가 유의미한가를 미심쩍어 할 만한 지점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따뜻하게 안착한 작품이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을 모토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쓰는 행위가 중압감과 때론 좌절, 열패감까지 고루 선사하고 강타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게 옳다는 걸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그가 살아낸 치열한 삶에 감동하며, 그럼에도 밝은 에너지 가득한 흑백 사진에 고마워하며, 오늘도 담백 하고는 거리가 먼, 감정으로 가득한 평을 쓴다. 페렉의 작품을 다시 읽기로 한다. 그의 태도와 스스로 멈추지 않은 결기를 기억하며 페렉 읽기를 권한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