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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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이스마일 카다레의 『피라미드(이창실 옮김, 문학동네)』는 활자가 영상으로 실시간 탈바꿈하는 소설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공감각을 자극해 독자를 따가운 사막 한복판에 세운다. 작가는 1988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고립되고 억압적인 공산주의 체제였던 고국 알바니아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1990년 프랑스로 망명한 후 1992년 파리에서 알바니아어와 프랑스어로 출간되었다. 레닌 찬양시를 쓰라는 강요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는 글을 썼던 카다레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2005년)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고립된 나라 출신의 세계적 작가가 된다. 실로 첫 소설(『죽은 군대의 장군』,1963)로 “그는 그의 조국 알바니아보다 유명하다”라는 찬사를 듣는다. 우리나라 유일한 국제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의 제 9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내한하기도 했다. 카다레를 수식하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뒤를 잇는 작가”라는 소개가 가장 인상깊다. 그들이 다뤘던 무력함과 고독의 끝간데 없음이 카다레에게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피라미드』가 소중해지는 이유가 된다.

새 파라오 쿠푸가 처음부터 피라미드를 원한건 아니었다. 젊은 파라오의 암시에 대제사장을 비롯한 측근의 대신들은 아연실색하며 쿠푸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다. 피라미드는 위기의 시대에 구상되었으며 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풍요, 즉 안락한 생활이었다. 안락한 생활의 여파로 독립심과 자유정신이 고조되자 이는 “권위 일반”, 특히 “파라오의 권위”에 반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한 탈출구, 백성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킬 방법, “요컨대 심신을 지치게 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철저히 무용한 무엇”, “백성들에게 무용한 만큼 국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업”(p.15)을 생각해낸다. 여러 선택지 중에서 시간에 훼손되지 않을 기념비, 거대한 묘비이자 왕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조명된다. 파라오는 설득되고 과업이 시작된다.

소설은 파라오의 선포 이후 도취와 절망 사이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심리, 타자로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개인의 몰개성, 고통과 무력감을 전한다. 의심과 자부심 가운데 피라미드의 돌 하나도 아직 다듬어지기 전 채찍 제조소들은 알아서 상품 생산 속도를 높인다. 피라미드 내부 설계를 맡은 그룹이 직면할 일, 결코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처럼 “비밀은 그 비밀의 열쇠를 쥔 사람과 함께 영원히 매장되어야 한다는 것.”(p.34)또한 공공연한 사실이다. 채취, 적재, 운반, 제 위치에 자리잡기까지 서수로 매겨진 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내력을 새긴다. 돌 자체가 위협이라 피와 죽음은 일상이 된다. ‘태만의 돌’처럼 이름이 붙은 돌도 있고 돌이 모인 ‘단’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니 개념정의도 추가된다. 새로운 권위의 명령으로 위에서부터 단의 번호를 매기게 되자 “어떻게 무에서 출발해 수를 센다지?”, “허공에 닻을 내리겠다는 거군!”(p.64) 혼란은 가중된다.

소설은 영원을 취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추한다. 진정한 시간이란 ‘압축적’이어야 한다, 또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p.71)고 의견은 분분하다. 7장 “건축일지”는 특히 인상깊다. 돌이 초래한 죽음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이름이, 이전 돌에 비교해 희생자가 적을 경우 천사라 할 만해 ‘착한 돌’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기록으로 순간을 방부처리한다. 『피라미드』는 시간을 탐구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권력에의 비틀린 갈구를 담는다. 책은 영원성의 상징 피라미드의 노화, 마모와 균열, 소멸을 향한 변화도 포착한다. 소설 후반에 이르자 인간이 직접적으로 돌의 자리를 대체한 피라미드를 등장시킨다. 14세기 중앙아시아 티무르 왕조가 쿠푸의 것과 흡사한 피라미드 만들고는 등장의 선후를 바꿔버린다. 마지막은 사진 속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세련되고 함축적인 결말은 오래된 전설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 사건들과 나란히 놓는다. 환상적 허구를 현실에 잇댄다.

『피라미드』는 구조적으로 완결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전체 작품 틀 안에서 단어라는 돌을 어디에 놓을지를 모두 결정한 후 단순한 후속작업으로 타이핑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상상케 만든다. 적확하고 유려하다. 드러난 주제는 선명한 반면 내포한 의미는 느슨하면서도 풍성하다. 참혹함이 일상으로 다시 유머마저 곁들여지는 진행은 감탄을 자아낸다. 차례의 소제목들은 모레먼지가 일 것처럼 건조하고 서사의 끝을 향해서 무심히 전진한다. 160여쪽 분량에서 다루는 시간은 인간의 영역을 가뿐히 초월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데 속도감까지 느껴진다. 의도에 따라 시간이라는 열차는 양방향으로 가속하며 대답을 요구할 수 있다. 답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선택과 행위에 대해서.

소설은 피라미드라는 신비한 거대 건축물을 빗대어 서술하지만 역사소설은 아니다. 역자는 “형식면에서 그렇듯 내용 면에서도 켜켜이 다중의 의미를 감춘채 전체주의의 가혹함을 끈질기게 암시한다.”(p.167)고 짚는다. 동시에 피라미드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 초청하는 영광일수도, 영광에 이르지 못한 짐으로, 또 하나의 우상으로 읽힐 수 있다. 계속 책을 읽어오다 보니 나만의 독서기호가 만들어졌다. 『피라미드』는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기호를 추가시킨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물결모양인데 “무서워서 덜덜 떨린다”로 해독할 수 있다. 여러 곳에서 새로운 기호는 꿈틀댔다. 깊이 침잠하며 질문케 하는 책, 이제 긴 여운을 뒤로하고 얼마전 출간된 『부서진 사월』로 만날 카다레를 기대한다.

책 속에서>

어떤 불가해한 도취감에 몸이 오그라들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순식간에 피라미드가 그들 삶 속에 들어와 단 며칠도 안 되어 그들은 중얼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거 없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 수 있었다지?”(p.20)

가까이에서, 특히 내부에서 바라보면 한 세대 한 세대는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지만, 외부 관찰자의 눈-즉 조각상들에나 가능한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사막의 모래언덕들만큼이나 고만고만하다.(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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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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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성(권혁준 옮김, 창비, 1926)』은 “실종자”, “소송”과 함께 고독의 3부작이라 불리는 세 작품 중 마지막 미완성 장편이다. 또한 미완성임에도 "작가의 집필의도와 구상이 훼손되지 않은 작품"(p.447)으로 평가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하고 독문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꿔 14년 동안 상해보험공사 직장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한다. 그는 1904년 「어느 투쟁의 기록」을 시작으로 「변신」 「유형지에서」 등의 단편과 『실종자』 『소송』 『성』등 장편을 비롯해 일기, 편지 등 많은 글을 남겼다. 헤르만 헤세는 1935년 바젤의 투고 글에서 “마침내 나오고 있는 아름다운 카프카 전집의 제3권은 소설 <성>이다. 약 10년 전에 막스 브로트가 작가의 유고에서 찾아낸 작품이다.”라며 “대부분의 독자들이 가장 좋아할 작품”이라고 덧붙인다. 또한 “저 두려운 <소송>”과는 다른, 차라리 “대작 동화라 할 만한 작품”(p.31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김영사)이라고 평한다. 시간을 거슬러 작품이 막 출간되던 순간의 황홀함이 전해진다. 또한 독일의 저명한 평론가, 학자들이 꼽은 “20세기 10대 독일 소설”에서 『소송』과 『성』은 두 번째와 아홉 번째 순서에 이름을 올린다.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p.7) 평이한 첫 문장은 이후 예측 불가능한 지점으로 독자를 데려갈 것이다. 초빙을 받고 마을에 도착한 토지측량사 K는 날이 밝고 나면 본격적으로 업무에 착수하거나 최소한 그를 위한 절차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성에서 맡기려는 일을 파악하고 성에, 혹은 환경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성 아래 마을에 머물기를 선택하고자 한다. 첫 날, 그는 성을 향해서 길을 나선다. 성의 외관을 살피고 방향을 감지하며 나아가지만 길은 성으로 이어지지 않고 의도를 갖고 주인공을 내치는 듯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결국 도달하지 못한 채 성은 다시 멀어져간다. 책은 총 25장으로 16장을 제외하고 20장까지는 소제목이 있고 21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장 번호로만 표기하고 있다. 막스 브로트가 편집한 초판과 달리 비평판은 35년의 두 번째 판 이후 1982년 발간되었다.

K는 조력자여야 하나 훼방꾼과 진배없는 두 명의 조수를 만난다. 조수로 삼고 싶은 성의 심부름꾼 바르나바스를 통해 성에 도달코자 한다. 바르나바스는 안내자로 다가왔을까? 그는 곧 간파한다.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위장한 조력자는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그의 힘을 파괴하는 데 일조했”(p.49)음을. 헤렌호프에서 만난 프리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클람에게 가는 여정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인물이다. K는 그녀를 선택한다. K는 멈추지 않고 모색하며 전진한다. 입장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다. 분노를 제어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희생자인양 하기보다는 돌파하고자 한다. 허들 넘기에 초점을 맞추는 K, 주도면밀한 그임에도 접근을 허용치않는 공략은 전방위적이고 다차원적이다. 그는 결국 어디에 닿는가.

몇 년 전부터 재독이 시급한 작품들이 체증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 중 꼽히는 작품이 카프카의 『성』이었다. 『성』의 이미지와 주제, 힌트를 선명히 불러내는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K가 성을 갈급해하듯 나 또한 조급증이 들었다. 카프카 전작읽기에 참여한 이유도 『성』 때문이었다. 오래 전 두 권짜리 문고본 깨알 글씨로 읽었던 『성』, 어떤 페이지들은 확고한 인상으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박혀 있었다. 대표적인 세 장면과 재회하자 생각보다 지엽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는 장면임에 놀랍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반짝인다. 밑줄과 별을 그리고 몇 번을 다시 보태도 부족할, 나와 함께 나이 든 찰나이자 정신에 박제 돼버린 문장, 스러지지 않는 빛이다.

그 중 하나. “하지만 그를 직접 대면해본 적은 없어요. 그는 이곳에 내려올 수 없이 언제나 일에 파묻혀 지내거든요. 내가 들은 바로는 그의 사무실에는 차곡차곡 쌓인 서류 뭉치 기둥들이 사방벽을 가리며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 모두 소르디니가 당장 처리중인 서류들이라는 거예요. 그 뭉치에서 서류들을 빼기도 하고 끼워넣기도 하는데 모든 일이 몹시 다급하게 이루어져 서류 뭉치 기둥들이 줄곧 무너진다고 해요. 기둥이 바닥으로 무너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것은 소르디니 사무실의 특징이 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소르디니는 진정한 일꾼이고, 하찮은 일에도 중요한 일을 대할 때와 똑같은 세심함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p.97) 이토록 환상적일수가! 나도 이렇게 일하고 싶다고 청년일 때 선망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다정하면서도 차디찬 문체로 카프카는 진기한 장면과 상황을 만들어내고 각각의 이미지는 유기체처럼 연결된다. 물론 분리시키고 떼어내도 훼손당하지 않을 에너지를 갖는다.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1924)”에 꼭 맞는 세계다.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처럼 『성』 역시 모순과 부조리, 부조화의 일상성을 치밀하게 구현한다. 우리는 도달하려는 목적지를 구체화함으로 대상에 근접하고, 베일을 거두고 싶다. 하지만 드러내고자 할수록 숨는 이치. -그런데 관청은, 그 대신 관청은, 이렇게 함으로써 관청은, 대신 관청과는, 따라서 관청이, 그렇게 되면 관청은...(p.86)-하고 이어지는 서술은 집중할수록 모호함만을 배가시킨다. 그렇다면 귀 기울여 보자. 『성』 읽기는 독자에게 듣기이면서 동시에 보기다. 필요한 것은 어쩌면 시력보다 청력이다.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과 논지를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풀어낼 때 독자는 최대한 집중해서 그 목소리를 쫓는다. 그 목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까지 놓치지 않으려 의지를 곧추세우는 일이 『성』 읽기다. 상징과 은유, 장치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별개다. 독자의 기억에 정돈되어가는 프리다가 있다면 예레미아스와 함께 있는 프리다는 낯설면서도 수용가능하다. 이에 더해 페피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프리다는 또 다른 인물이다. 인물들은 시작과 끝을 가진 작품 안에서 유동적이고 변신을 거듭하며 여전히 고정되기를 거부한다. 이번에도 좌절은 익숙하다.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읽기도 힘들다니, 정녕 너는 대리석이라는 말인가! 그래도 읽는 대리석 아니냐 편든다.

토지 측량 좀 하자고요, 토지 측량을 하려했을 뿐이고, 요청에 부응하려했을 뿐이고, 상식적이고 마땅한 최소한의 의무이자 권리를 원했을 뿐이다. 우리는 문제될 일이 없는 사항에 삐끗 잘못이 인지될 때 약간의 수고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긴다. 없었으면 더 좋았을, 그러나 직면케 되버린 사건이기에 성실하게 절차를 따라가다보면 ‘문제 해결’이라는 해피 엔딩과 만날 것이다. 나, 원래 침착한 사람이야!라는 증명까지 부가적으로 따라오면 좋으련만 한 순간 폭풍의 눈 안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틈새로도 발을 내뻗을 수 없는 토네이도급 폭풍의 눈, 어쩌면 인생이라는 폭풍의 눈일까. 이런 일은 낯설지 않다. K의 비현실적인 고투가 우리 삶의 재현일 수 있고 수 많은 은유는 사소한 개인의 일상이 “평행이동”한 듯, 나아가 “합동”임이 증명되는 순간이 작품 안에서 연속된다. 이와 같은 확인이 『성』을 읽는 일, 성으로 향하는 K가 겪는 일, K의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독자가 경험을 나누고 무엇이 되었건 명명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성』의 권위있는 해석들에 비교해 나의 해석은 부분집합으로 포함될지, 교집합에 방점을 둘지, 독립적인 서로소일지, 아니면 애초에 어긋난 오해, 잘못된 방향일수도 있겠다. ’명명하기‘는 그럼에도 중요하다. 그 후로 계속해서 다르게 읽힐 발견의 텍스트이기에 더 그렇다.

마크롤 가비에로(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나 조반니 드로고(타타르인의 사막), 요제프 K(소송)에게서도 확인했던 하나의 목표에 투신하는 인간상은 K와 동일한 결말을 맞는다. 카프카의 친구이자 유고를 세상에 내놓았던 막스 브로트에게 구두로 전했던 성의 결말(p.485)과 같다. 그 쓸쓸한 최후에 어떤 의미부여가 가능할까. 의미라는 단어에 해당하지 않는, 형식상 필요했던 그저 왜소한 온점만으로 기능하는가. 너무도 가차없었던 개고생 대(vs) 먼지처럼 녹아버리는, 쪼그라들며 흩어져버리는 죽음은 양적으로도 불균형 자체다. 아마도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모두에게 구원은 비밀하고 개별적으로 노크할 것이며 순간 알아차릴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비록 K만한 기개가 없을지라도 누구나 삶에서 최대한 분투한다. 그런 대결, 무익하고 쓸모없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울 안간힘에 책은 미완의 노래를 부른다. 작가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른 노래, 시간을 뛰어넘어 바통은 이어지고 『성』은 지금껏 메아리치며 공명한다. 걸음에 힘이 실린다.

책 속에서>


(중략) 당신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요? 성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이곳 마을 사람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무엇이기는 하죠. 이방인, 즉 깍두기 신세로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늘 신세를 끼치는 사람-왜, 하녀들이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잖아요-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 게다가 우리의 가장 사랑스러운 귀염둥이 프리다를 꾀어내는 바람에 속절없이 이 아이를 당신 아내로 내줘야만 하게 만든 사람이죠. 기본적으로 이런 이유들로 당신을 비난하지는 않아요.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한 인간이니까요.(p.73)

그뿐만 아니라 성에 이르는 길은 몇 개나 있어요. 어떤 때는 이 길이 유행이어서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 길로 달려가고, 어떤 때는 다른 길이 유행이어서 모두들 그 길로 몰려가요. 어떤 규칙에 따라 이런 식으로 길이 바뀌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아침 여덟시에 모두가 어떤 길로 가다가 삼십분이 지나면 다른 길로 가고, 또 십분 뒤에는 세 번째 길로, 또 반시간 뒤에는 아마도 다시 첫 번째 길로 돌아가 그날 내내 그 길로 달리는 거죠. 하지만 매 순간 길이 바뀔 수도 있어요.(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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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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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추미옥 옮김, 문학동네,2012)』은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소설로 1958년 출간 당시 원제는 “운명의 일화”였다. 작가의 본명은 카렌 블릭센이며 필명 이자크 디네센은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구약의 인물 이삭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할 때의 개인적 경험을 훗날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펴내고 이는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바베트의 만찬』도 가브리엘 악셀 감독이 1987년 영화화 하면서 아카데미에서 수상한다. 다양한 소설과 산문집을 남긴 이자크 디네센은 1954년과 1957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헤밍웨이와 카뮈에게 돌아가며 수상은 불발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가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진다.

“노르웨이, 높은 산 사이로 길고 좁은 바다의 지류가 흐르는 피오르 지역에 비를레보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p.7) 두 자매 마르티네와 필리파는 이 지역에서 독실한 교파를 일궜던 목사의 딸들로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신도들에게는 소중한 존재다. 시간이 가며 신도들의 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서로간에 반목하고 다투는 일도 잦아져 우려스럽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은 계속된다. 두 자매의 집에는 바베트라는 프랑스인 가정부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녀는 필리파를 아쉽게 떠나야 했던 아실 파팽의 전갈을 지닌채 혁명으로 가족을 잃고 위험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백 번째 생일을 딸들은 의미있게 기념하기 원한다. 남아 있는 신도들 사이의 어두운 그림자, 냉기와 죄, 상처와 깊은 원한들이 자매에게는 마음의 짐도 옅어지기를 바란다.

이때 바베트는 자기가 가진 프랑스 복권이 당첨돼 당첨금 만 프랑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린다. 또한 바베트는 두 자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한다. 의심과 불신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던 외딴 마을 작은 집에 특별한 식탁이 차려진 그날 밤, 아름다운 기적이 피어난다.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p.74)라는 바베트의 말처럼 탕진이 아닌 예술, 결코 가난해질 수 없는 예술적 가치의 현현이었다.

베를레보그의 자매에게 유행이 파고들 구석이 없었던 것처럼 금욕적 삶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사랑의 가능성도 오래 전 지나가버렸고 아쉬움은 흔적도 없는듯하다. 단지 아버지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노쇠한 신도들간 어긋나는 관계가 안타깝다. 이때 찾아온 바베트는 궁지에 처한 도피자에서 ‘정신적 자극’으로, 마르타에 비할 법한 이방인에서 ‘모퉁이의 머릿돌(p.30)’로, 결국 당면한 문제를 녹인 화합의 가능성으로 변모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12편의 에피소드를 잇대며 바베트의 만찬 저녁, 마법같은 절정을 향해 서서히 고조된다.

간결한 문장은 때론 몽환적이면서 동화같은 온기를 보여주지만 때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제시한다. 로벤히엘름 장군이 삼십 년이 지난 후 자기 인생의 ‘가시’(p.53)는 무엇이었나 숙고한 끝에 솔로몬의 유명한 고백,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 이르는 지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책은 금기와 축복,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혼의 약속 등 화두를 던진 끝에 바베트의 입을 빌린 예술론으로 정점을 찍는다. 세상의 끝과도 같은 외딴 곳에 잊혀진 인간처럼 살았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인간 보편의 삶과 가치를 대변하면서 소설은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서정적인 배경 묘사와 재치 있는 비유, 생생한 심리 서술은 짧은 분량임에도 독자를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든다. 고골의 『외투』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에미 비야무사의 필선이 아늑한 삽화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작가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다”(p.83)는 『바베트의 만찬』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지, 활자를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이 어떻게 구현되었을지 기대된다.

책 속에서>

훗날 이날 저녁을 떠올릴 때, 그들이 그토록 고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 자신들이 지닌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신도들은 단지 로벤히엘름 장군이 말한 무한한 은총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소망하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 땅의 헛된 환상이 연기처럼 녹아 사라지고 만물이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p.67)

"네, 마님, 파팽 씨요. 그분이 제게 말씀하셨죠.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요. 또 말씀하셨죠.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짓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둬달라는 외침뿐이다.’"(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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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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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EBSBOOKS)』는 당대의 ‘문제적 인물’들을 만나며 끊임없이 시대의 징후를 읽어온 인터뷰어 지승호 작가가 철학자 강신주를 10년 만에 다시 만난 기록이다. 또한 자신만의 철학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쟁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기획된 인터뷰집 시리즈 〈EBS 인생문답〉의 첫 책이기도 하다. 강신주는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거리의 철학자’ 등으로 불리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가장 사랑받는 철학자로 《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의 다상담》등을 썼다. 50시간의 인터뷰를 기록했던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후 10년 만에 마주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지승호와 강신주는 연약해진 육신을 달래며 그럼에도 더 빛나는 통찰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첫 만남,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에서 강신주는 자신이 다뤄왔던 사람들을 “우리 패밀리들”이라고 칭한다. <강신주의 역사철학·정치철학>은 그들을 정연하게 기록하는데 많은 지배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패밀리를 “많이 구축”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는 것”(p.41)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람의 문맥을 읽는다는 것”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의미를 명확히 한다. 그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콘텍스트까지 이해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p.50) 말이나 텍스트에 사로잡히면 안되는데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p.51)라고 설명한다. 변화하지 않는 가치와 연결된 철학자의 역할을 물을때 변화하니까 덧없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니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며 “인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계속 존재할 테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져요. 그래서 소중한 거죠.”(p.68)라고 덧붙힌다. 그는 영원에 대한 욕망에 흐르는 권력적이고 지배적인 사유를 지적하며 영원의 형이상학, 피의 형이상학, 돈의 형이상학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강신주는 쉬운 언어로 초점을 무엇에 맞춰야 할지 환기시킨다.

4장, “스마트폰 사회경제학”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혁명이라 볼 수 없고 그저 스마트폰이 확장시킨 시장이자 젊은 세대에게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라는 이야기라 본다. 더 이상 노령세대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과 소통 시간도 빼앗긴다. 스마트폰이 MZ세대의 “외장형 심장”(p.123)이 되어버렸고 이 상품이 필수품인지 사치품인지 고민할 정치 경제학적 감각이 없는 그들은 “자신의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불리를 계산하는 벤담적 자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스마트폰에서 마침내 완성”된다고 평한다. 그 위험을 알지만 제어하기 어려운 순환고리를 독자는 한 번 더 확인케된다. 부르주아사회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p.137)고 설명하는 지점, 나아가 전문가를 인간적 불구로 보는 시선도 인상깊다. 5장에서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진짜 교육”(p.168)이라고 교육을 재정의한다.

책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본다. 현상을 분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근본과 본질을 건드려 원인을 노출시킨다. 이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고 나은 미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답변은 현학적이지 않았다. 어원을 풀어 이해시키고 과거의 예가 어떻게 현대에 재현되는지 보여주거나 논리와 논리가 연결될 때 느껴지는 쾌감은 이 책의 부가적 장점이다. 인용을 위해 등장하는 책들이 팡세 재독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비롯해 필독 문사철 범위를 확장시킨다. 또한 철학자가 애정과 자부심으로 모은 그의 패밀리들을 함께 기대하며 비록 다 읽지는 못할지라도 일단 사두리라 마음먹게 했다. 현실 밀착형 답변은 사유하는 삶이 어떻게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작동 가능한가를 제시한다. 그가 다룰 카프카와 베케트는 얼마나 새롭고도 아름다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예술가와 가짜 예술가의 대조(p.337), 나가르주나와 비트겐슈타인을 동·서양의 에베레스트에 견주며 결론을 내지 않고 지적으로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철학자가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일깨우는 등 읽는 내내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의 유명한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다. 열 한 번의 만남을 따라가며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대화의 장면들이 있었지만 에필로그는 정점을 찍는다. 먼지 뒤집어쓰며 오랫동안 책꽂이에 서있던 “해변의 묘지”가 아무리 찾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구판은 절판이고 개정판이라도 다시 들여야겠다. 이 지혜롭고도 다정한, 초록과 푸름으로 아름답기까지 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진심을 담아 권하며 앞으로 10년 후의 인터뷰를 기다린다.

책 속에서>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은 아이들은 이미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요. 그러니 국가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급적 물을 떠나지 않으려 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경향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갈 거예요. 여기에 바로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죠.(p.179)

분업 체계에 포획되지 않은 사유, 분업 체계를 가로질러 전체를 사유하는 사유, 그래서 소수의 지배와 명령을 무력화하는 사유! 바로 이것이 철학이에요. 제가 누누이 철학은 민주주의와 인문주의를 지향한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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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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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이인규 옮김, 문학동네)』는 1952년 출간된 작가 생전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뛰어난 성취라 일컬어진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기 이전까지 전쟁의 상실감, 허무함을 다룬 작품들로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 작가로 불렸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 말년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1953년 퓰리처상을,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헤밍웨이는 신문기자 시절 습득한 단문 위주의 문장 구사로 하드보일드 문체의 개척자로 여겨지며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도 “서사 기법에 정통하고 현대문학의 스타일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라고 명시한다.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이인규 역자 번역본(문학동네)은 지금껏 쓰여온 돌고래 대신 어부들의 용어 ‘만새기’로 옮기는 등 노인의 입말에, 시간이 축적된 일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 일 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p.9) 오늘도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을 맞을 때 소년 마놀린은 마음이 아프다. 소년은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줬던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사랑하며 함께 바다에 나가고 싶지만 노인의 운이 다했다고 믿는 부모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노인과 소년은 함께 했던 추억과 상상으로 꾸며낸 대화와 야구와 팔십 오일째에 틀림없이 만날 행운을 이야기한다. 노인은 멀리까지 나가볼 생각으로 노를 젓는다.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된 사투 끝에 미끼를 문 청새치를 잡고 집이 있는 곳, 아바나의 불빛을 향한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최초의 상어가 물고기에게 덤벼들고 새로운 분투가 다시 시작된다.

영웅적 의지와 인간적 면모를 동시에 지닌 산티아고 노인은 잊지 못할 하나의 전형을 완성한다. 그는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또 한 번의 현재, 행운이 깃들 팔십 오일째 날로 삼는다. 노인은 오늘을 사는 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대신 정확하고 성실하게, 진지하지만 낙관하고, 고통스울지라도 엄살부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타자의식 없이 내적 자유를 분별하고 선택할 줄 안다. 그의 선의는 소년은 물론 잠시 날개를 쉬어간 작은 새와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넘어 ‘라 마르’라 부르던 바다, 사자가 나오는 꿈속까지 닿는다. 이 온기는 강력하게 독자 마음을 사로잡는다. 치장 없이 간결한 문체, 적확한 단어의 연결은 감동을 증폭시키는 주요인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부연에 부연을 포개며 화려하게 이어지는 문체와 대비된다. 또한 ‘작은 배에서 살아남기’투의 소소하지만 긴급한 목표들과 그로인한 상념을 시적인 독백, 연극적인 대화체로 서술함으로 망망대해에서 주인공 홀로 버티는 시간이 긴장감 넘치게 진행된다.

상어가 없었다면 노인의 성공은 보존되고 인정받으며 영광으로 보답받았을 것이다. 물리쳐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상어가, 점점 부실해져가는 도구로 맞서는 노인이 보편적 삶의 자화상으로 비친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으면 이를 비웃듯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온다. 때론 서서히, 때론 죠스 뺨치게 빠르다. 이건 반칙이죠, 분노할 때도 있었다. 작게 보면 ‘당면한 문제’로 인해, 종국에는 ‘한정된 시간’이라는 생의 조건 때문에 예정된 위기에 봉착한다.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삭이지 못하는 분노를 품고 죽음도 불사하고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반면 산티아고에게 물고기, 청새치는 목표물이면서 동시에 탄생과 죽음이라는 조건 앞에 동일하게 내던져진 생명체라는 연대와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상어들이 밤중에 달려들면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한다? “싸우는 거지, 뭐.” 노인은 말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거야.”(p.121)- 이 문장에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네! 엄마잖아! 엄마를 어떻게 말려!” 명랑함과 결연함이 반반으로 섞인 엄마가 상한 손과 약한 몸으로 여전히 ‘계속해보겠습니다!’ 라고 외친다. 없는 기운에도 파이팅만은 우렁차다. 노인은 또다시 배를 띄울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누구나 한 번쯤 읽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책” 즉 칭송은 하지만 읽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 정의했다. 설마 내가 『노인과 바다』를 안 읽었다고? 그렇소! 무수하게 전해들었고 보았고 짐작했을 뿐 당신은 활자를 읽지 않았소,에 해당한다면 지금 만나보기를 권한다. 고난 가운데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산티아고 노인에게로, 그가 보여주는 관계맺기의 향연으로, 그 빛나는 문장으로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다만 더 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p.34)

이런 일들은 난 잘 모르겠어, 노인은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가 태양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야. 바다에서 살아가며 우리의 진정한 형제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야.(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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