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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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이스마일 카다레의 『피라미드(이창실 옮김, 문학동네)』는 활자가 영상으로 실시간 탈바꿈하는 소설이다.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공감각을 자극해 독자를 따가운 사막 한복판에 세운다. 작가는 1988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고립되고 억압적인 공산주의 체제였던 고국 알바니아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1990년 프랑스로 망명한 후 1992년 파리에서 알바니아어와 프랑스어로 출간되었다. 레닌 찬양시를 쓰라는 강요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는 글을 썼던 카다레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2005년)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고립된 나라 출신의 세계적 작가가 된다. 실로 첫 소설(『죽은 군대의 장군』,1963)로 “그는 그의 조국 알바니아보다 유명하다”라는 찬사를 듣는다. 우리나라 유일한 국제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의 제 9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내한하기도 했다. 카다레를 수식하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뒤를 잇는 작가”라는 소개가 가장 인상깊다. 그들이 다뤘던 무력함과 고독의 끝간데 없음이 카다레에게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피라미드』가 소중해지는 이유가 된다.

새 파라오 쿠푸가 처음부터 피라미드를 원한건 아니었다. 젊은 파라오의 암시에 대제사장을 비롯한 측근의 대신들은 아연실색하며 쿠푸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다. 피라미드는 위기의 시대에 구상되었으며 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풍요, 즉 안락한 생활이었다. 안락한 생활의 여파로 독립심과 자유정신이 고조되자 이는 “권위 일반”, 특히 “파라오의 권위”에 반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한 탈출구, 백성들의 에너지를 소모시킬 방법, “요컨대 심신을 지치게 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철저히 무용한 무엇”, “백성들에게 무용한 만큼 국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업”(p.15)을 생각해낸다. 여러 선택지 중에서 시간에 훼손되지 않을 기념비, 거대한 묘비이자 왕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조명된다. 파라오는 설득되고 과업이 시작된다.

소설은 파라오의 선포 이후 도취와 절망 사이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심리, 타자로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개인의 몰개성, 고통과 무력감을 전한다. 의심과 자부심 가운데 피라미드의 돌 하나도 아직 다듬어지기 전 채찍 제조소들은 알아서 상품 생산 속도를 높인다. 피라미드 내부 설계를 맡은 그룹이 직면할 일, 결코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처럼 “비밀은 그 비밀의 열쇠를 쥔 사람과 함께 영원히 매장되어야 한다는 것.”(p.34)또한 공공연한 사실이다. 채취, 적재, 운반, 제 위치에 자리잡기까지 서수로 매겨진 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내력을 새긴다. 돌 자체가 위협이라 피와 죽음은 일상이 된다. ‘태만의 돌’처럼 이름이 붙은 돌도 있고 돌이 모인 ‘단’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니 개념정의도 추가된다. 새로운 권위의 명령으로 위에서부터 단의 번호를 매기게 되자 “어떻게 무에서 출발해 수를 센다지?”, “허공에 닻을 내리겠다는 거군!”(p.64) 혼란은 가중된다.

소설은 영원을 취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추한다. 진정한 시간이란 ‘압축적’이어야 한다, 또는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p.71)고 의견은 분분하다. 7장 “건축일지”는 특히 인상깊다. 돌이 초래한 죽음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이름이, 이전 돌에 비교해 희생자가 적을 경우 천사라 할 만해 ‘착한 돌’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기록으로 순간을 방부처리한다. 『피라미드』는 시간을 탐구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권력에의 비틀린 갈구를 담는다. 책은 영원성의 상징 피라미드의 노화, 마모와 균열, 소멸을 향한 변화도 포착한다. 소설 후반에 이르자 인간이 직접적으로 돌의 자리를 대체한 피라미드를 등장시킨다. 14세기 중앙아시아 티무르 왕조가 쿠푸의 것과 흡사한 피라미드 만들고는 등장의 선후를 바꿔버린다. 마지막은 사진 속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세련되고 함축적인 결말은 오래된 전설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 사건들과 나란히 놓는다. 환상적 허구를 현실에 잇댄다.

『피라미드』는 구조적으로 완결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전체 작품 틀 안에서 단어라는 돌을 어디에 놓을지를 모두 결정한 후 단순한 후속작업으로 타이핑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상상케 만든다. 적확하고 유려하다. 드러난 주제는 선명한 반면 내포한 의미는 느슨하면서도 풍성하다. 참혹함이 일상으로 다시 유머마저 곁들여지는 진행은 감탄을 자아낸다. 차례의 소제목들은 모레먼지가 일 것처럼 건조하고 서사의 끝을 향해서 무심히 전진한다. 160여쪽 분량에서 다루는 시간은 인간의 영역을 가뿐히 초월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데 속도감까지 느껴진다. 의도에 따라 시간이라는 열차는 양방향으로 가속하며 대답을 요구할 수 있다. 답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선택과 행위에 대해서.

소설은 피라미드라는 신비한 거대 건축물을 빗대어 서술하지만 역사소설은 아니다. 역자는 “형식면에서 그렇듯 내용 면에서도 켜켜이 다중의 의미를 감춘채 전체주의의 가혹함을 끈질기게 암시한다.”(p.167)고 짚는다. 동시에 피라미드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 초청하는 영광일수도, 영광에 이르지 못한 짐으로, 또 하나의 우상으로 읽힐 수 있다. 계속 책을 읽어오다 보니 나만의 독서기호가 만들어졌다. 『피라미드』는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기호를 추가시킨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물결모양인데 “무서워서 덜덜 떨린다”로 해독할 수 있다. 여러 곳에서 새로운 기호는 꿈틀댔다. 깊이 침잠하며 질문케 하는 책, 이제 긴 여운을 뒤로하고 얼마전 출간된 『부서진 사월』로 만날 카다레를 기대한다.

책 속에서>

어떤 불가해한 도취감에 몸이 오그라들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순식간에 피라미드가 그들 삶 속에 들어와 단 며칠도 안 되어 그들은 중얼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거 없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 수 있었다지?”(p.20)

가까이에서, 특히 내부에서 바라보면 한 세대 한 세대는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지만, 외부 관찰자의 눈-즉 조각상들에나 가능한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사막의 모래언덕들만큼이나 고만고만하다.(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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