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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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단편집 중 빗장 지른 문(1909)삶에 사슬로 매여 있듯이 주인공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담는다. 이때 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를 충족하고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2년 후 출간된 중편 소설 이선 프롬(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1911, 212쪽 분량)은 충분히 사랑하고 살아볼 수 없었던 사람, 환상과 몽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삶조차 곧바로 빼앗겼던 인물을 그린다. 미국 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의미로 최초의 여성 작가라 불리는 이디스 워튼은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다작 작가이면서 <순수의 시대>로 여성으로는 처음 퓰리처상을 받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선 프롬>서로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문제(p.176)라고 평했고 워튼은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큰 즐거움과 가장 큰 편안함을 느꼈다(p.174)고 전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 이선 프롬이 겪는 관계에서의 갈등과 그로 인한 고통은 그만큼 온전히 독자에게 닿는다.

 

이선 프롬은 여러 겹의 굴레에 갇혀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 스탁필드를 떠나지 못하고, 이웃인 하먼 가우의 표현에 의하면 이곳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났다. 생명력을 곧바로 무기력으로 대체하는, 추위와 강풍이 여섯 달 동안 지속되는 혹독한 기후를 거듭 견뎌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은 프롬의 농장 노동과 벌이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들은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간병을 도왔던 사촌 누나 제노비아 피어스(지나)는 프롬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한 부탁으로 떠나지 않고 아내가 되었는데, 일곱 살 연상의 그녀 역시 복잡한 질병을 앓기 시작한다. 아내의 친척 매티가 부모를 잃고 지나를 돕기 위해 온다. 일은 능숙하지 못해도 대화의 즐거움을 깨우쳐주는 매티가 프롬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화자인 엔지니어가 들려주는 이선 프롬의 젊은 날을 기록한다. 화자는 프롬의 집이 유독 위축되어 보이는 이유가 허물어 사라진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본채보다 더 뉴잉글랜드 농가의 중심이면서 초석인 엘, ‘땅과 연관된 데다 그 자체로 따뜻함과 자양분의 주요 원천을 포함하는 삶’(p.23)을 상징하는 엘의 철거는 황량한 가운데 프롬을 속수무책 홀로 서 있게 한다. 반면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프롬네 집안의 묘석들은 산 자들의 땅에 자리 잡은 채 시선과 목소리로 말을 건다. 너도 결코 떠나지 못할 걸, 우리처럼, 하는 속삭임으로. 프롬은 냉담한 아내 지나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럴수록 매트의 젊음과 생기에 마음이 이끌린다. 아내 지나가 매트를 내보내겠다고 결정했을 때, 프롬은 갈등한다.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다.

 

프롬은 추위와 상관없는 낙원 같은 곳, 이미 기억에서 흐려진 플로리다에 다시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공과 대학 실험실로 돌아가 그의 꿈을 마저 이룰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상기된 추억은 현실의 진공 같은 밀폐를 부각할 뿐이다. 프롬은 매트와 서부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남겨둘 수도 없었고 선한 이웃을 상심케 할 수도 없었다. 매트를 배웅하던 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기쁨만이 그의 전부였다. 그리고 망설인 끝에 그녀의 결심에 동조하고 계획은 빗나간다. 지금까지의 비극은 비극도 아니다. 앞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소설의 결말은 독자의 예상을 저만큼 뛰어넘고 이전에 제시된 전조와 암시, 복선들을 헤아려보게 만든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한 사람을 본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가슴 뛰게 만드는 세계에 투신하여 배우고 싶고, 먼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여건이 안 되었던 이선 프롬. 그는 벌써 죽어서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p.10)지만 여전히 우체국에 들러 지나를 위한 의약품 봉투와 구독지 한 부를 찾아간다. 아마도 계속될 그의 일상이다. 소설은 창과 칼로 공격하는 것 같은 혹한의 날씨가 인간을 무력하게 하듯이 환경과 상황, 시선이나 주변의 기대가 의지와 상관없이 개인을 옥죄는 현실을 보여준다. 탈출의 방편을 모색하나 문학에서 길을 발견한 작가와 달리 프롬은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작품은 영상 같은 이미지, 긴장감 넘치는 침묵, 차가운 감각과 초조한 순간들을 쌓으며 섬세하게 독자를 이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작가는 이웃의 목소리로 매티가 죽었더라면 이선 씨는 살았을 거라고 보탠다. 그러면서 프롬 집안의 묘석들을 다시 불러낸다. 죽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은 대를 이어 새기고 쌓인 죽음의 증거들에 일 획을 미리 보태는 듯 암울하다. 젊음의 정점에서 갇힌 삶이 프롬과 매트에게 동일하게 반복된다. 지나의 입지 변화 또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보편적인, 그러면서 비극적인 작품이 마치 경종처럼 다가온다.

 



 책 속에서>


이선은 묘석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변화를 피하려던 욕망은 다 사라지고 이 조그마한 울타리가 따뜻한 존속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p.50)

 

광기에 사로잡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갑자기 깨닫자 그 광기가 사라지며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속에 남게 될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설령 아내를 버릴 배짱이 있더라도 그를 동정하는 인정 많은 두 사람을 속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농장으로 돌아왔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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