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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민용재 옮김 / 김영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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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구약성서는 이러한 구절로 시작한다. 어째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말'일까? 물론 성서라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것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그 '말'이 기저에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의사소통(communication).
우선 그 '말'의 주체인 '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 혼자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넋두리가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다. 의사소통이라 함은 화자와 청자의 교감이다. 화자인 '나'가 있고 청자인 '너'가 있다. 여기에서 '너'란 존재는 비단 실질적인 상대방(You)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혼잣말에서와 같이 실질적인 '나(I₁)'의 상대인 또다른 가상의 '나(I₂)'로써도 가능한 것이다.

소설은 의사소통과 같다. 작가는 독자를 의식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예전에, B급 영화로 유명한 장난꾸러기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관객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관객은 바로 '나'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처럼 작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자뿐만 아니라, 독자인 가상의 자신을 설정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고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볼까.

'당신'은 소설의 시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앞에서 장황하게 '나'라느니 '너'라느니 실컷 떠들어 대더니 이번엔 난데없이 어쩌면 쓸데없는 것으로까지 느껴지는 이런 질문이라니!'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 대개는 아무런 생각없이 화자와 교류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텍스트에서는 '나(I)'라는 1인칭과 '그(He)'나 '그녀(She)', 혹은 '그들(They)'라는 3인칭만이 화자로써 나타나기 마련이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종종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이라느니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느니 '3인칭 작가 관찰자 시점'이라는 등의 말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읽고있는 독자는 자연스레 화자에게 몰입해 아무런 저항감없이 흐름에 동승한다.

그런데, 이 기묘한 소설 <아우라>에서는 바로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다.

글의 첫머리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화자인 '나'나 '그'가, '너'에게 말이라도 건네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겨가다 보면 당신은 오직 '너(You)'라는 화자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대체, '너(You)'라는 2인칭으로 진행되는 소설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너(You)'만이 이 이야기에서 튀어나와 이것을 지휘하고 있을 따름인데?

어째서 이런 특이한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일까? 역자는 이것을 '최면적 2인칭 화법'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너'가 묘령의 부인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아우라'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니 '환상주의'라는 해설이 붙은만큼, 이 소설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하고있다. '너'만이 표면에 떠올라 있고 그것을 읽고있는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느껴야 하는 것일까? 도스또옙스끼의 소설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의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화자를 신뢰할 수 없다면 독자는 그 이야기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우라>의 후반부에서 '너'에 대한 믿음에 혼란이 생기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 진짜 '너'인지에 대해서도 독자들은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 소설은 짧다. 더불어 뒷편에는 이것의 스페인어 원전이 실려있다. 전공자들은 직접 '나'와 '너'의 존재에 대해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자를 통해 한번 체에 걸러 텍스트를 접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면서 '나'와 '너'에 관해 진지하게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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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강아지는 어째서 강아지는 어째서 부드럽지?
강아지를 코트 속에 넣고 걸을까.
강아지 꼬마 강아지 어째서 강아지는 부드럽지?

난데없이 웬 강아지 타령이람…

빠알간 머플러를 눈사람 마냥 치근치근 휘감고서 시간에 맞춰 주파수를 맞추었다. 찌릉찌릉 귀뚤이 조차 잠들어버린 밤, 독서실을 나서던 나는 발길에 채이는 흙이 굴러가듯 여느때처럼 알 수 없는 선곡에 그저 웃어버리는 수밖에. 구릿빛 만월이 비춰주는 길을 따라 하얀 입김이 결정이 되어 총총 빌로드 같은 까만 하늘에 밖히는 것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 정말. 코트 속에 강아지라도 넣으면 따뜻해 지겠는걸…

습관적으로 집에 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고선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시큼한 향이 코끝에 번졌다. 오우, 이거야.

마침 에릭 버든과 애니멀즈의 스카이 파일럿이 나왔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성급한 모양새로. 선곡표를 무시하고서 세치기라도 한 듯. 당황한 아저씨의 뒷수습.

'이런이런. 에릭 버든과 애니멀즈가 방송 사고를 내버렸군요!'

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뿔의 습격이라도 받았는지 한꺼풀은 목이 잠겨버린 아저씨의 외로운 투쟁. 오오오, 박수. 그래도 새빨간 거짓말은 계속됩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어쩐지 고파진 배를 슬슬 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두리번두리번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의 레이다망에, 이럴수가! 라면이다. 어째서 저렇게 독립적으로 당당히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내 나이 스물셋. <아저씨 통신>을 들으면서 밤(夜)이 노릇노릇 익어간다. 후루룩, 쩝쩝. 역시 라면이 제격이란 말이지. 다이어트? 그런 건 내일부터.

자, 나도 한번 사연이나 보내봐야지. 뭐라고 시작할까… 그래!

'안녕하세요, 무라카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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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Mr. Know 세계문학 33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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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블레이드 런너'라는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설사 보지는 못했더라도 이런저런 경위로 제목이나마 접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음울한 비와 함께 노래하는 영화 속 미래 가상현실은 당신의, 나의,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무채색으로 한켠 두켠 칠해 나간다.

SF? 이 단어를 들은 당신의 얼굴은 어떻게 바뀔까? 흔히 Science Fiction의 약자로 알려져 있는 (혹자는 Science Fantasy, Speculative Fiction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때때로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외면해 버리는 반응을 보게 하는가 하면 (우리 부모님의 경우이다.) 얼굴이 빨개져 가면서까지 열변을 토하는 (혹은 호흡 곤란을 동반하는) 상태를 몰고 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SF가 과연 무엇이길래?'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어떠한 명쾌한 답변을 (슈퍼 컴퓨터가 수초만에 간단히 내어놓는 마냥) 제시해 줄 수 있는가?

글쎄, 개인적인 견해로는 (당신이 이것에 대해 발끈해서 화를 낸다거나 만면에 웃음을 띄고 끄덕이든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상상력이 결여된 공간이라고 할까. 소설 속의 사회가 유토피아적이든지 디스토피아적이든지 간에 그 곳은 지독히 무상상적이다.

상상력. 이것에 대해서 자각하고, 갈고 닦거나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만약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별로 흥미진진하지 못한 이 감각이 위협 받는다면? '자, 오늘부터 당신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란 선고를 받게 된다면?

스뚜르가츠키 형제의 매혹적인 소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에서는 이것이 현실(우리에게는 하늘에 떠있는 별만치 머나멀지만)로써 펼쳐지고 있다. 밀랴노프를 위시한 등장 인물들은 미지의 힘(우주의 항상성이라 이름 붙여진)에 의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박탈당할 (이 '박탈'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 의해 그러하게 된다'는 수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요즘의 시대란 자진해서 그것을 원하는 경향을 띄지 않나 싶기도 하다.) 위기에 처한다. 처음에는 물질적이거나 지위적인 회유로, 그 다음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나아가서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거대한 음모로써 말이다.

우주의 항상성이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등장 인물들의 추측상에서 불명확하게 넌지시 비춰질 뿐이다. 사실 이것은 중요치 않다. 많은 독자들이, 이것을 스딸린 시대의 탄압이라든가 억압에 의해 설명하고 공감한다. (이 형제 또한 그러한 연유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시대에 우리의 상상력을 얼마만큼이나 보존시키고 확장시켜 나갈 수 있나 하는 점이다. 많은 등장 인물들이 결국 그 힘에 굴복하고 (표면상은 그렇지만, 소극적인 반항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베체로프스끼 홀로 투쟁을 계속해 간다. 그러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10억년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다.

에일리언이라든지, 슈퍼맨 등이 등장하지 않는 (게다가 배경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레닌그라드이다.) 이 SF 소설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욱 그 현실을, 공간을 사실적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 나에게 아직 상상력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면서, 그것을 무기로 독특한 제목의 이 공간에 다시 한 번 뛰어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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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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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평소, 일본 문학에나 힐끔이던 나로써는 전혀 생소한 인물일 뿐더러 책 한켠에 조금은 으스스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녀의 사진은 대체 어떠한 깜찍발랄한(사진 속 흑백의 조화가 빚어내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아름다움처럼) 이야기를 선사해 줄 것인가 하는 기대감에 사뭇 나를 설레게 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녀는 이 사진만큼이나 괴기스런 입담으로 나에게 기대치 않은 공포를 선물했던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유령과 같은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 때때로 인간을 휩쓸어 버리는 재해나 재앙들? 아니면 자신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타인의 폭력? 이러한 갖가지 공포들은 충분히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일 게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서 연유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는 더할나위 없이 가장 악질적이고 지속적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자신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일 뿐더러 한 개인을 휩쓸어 버리고, 종말(혹은 죽음) 전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억압하고 부정하며 토끼 몰듯 자신을 궁지로 이끈다. 잊을만 하면 잘못 걸린 전화가 오듯 문득문득 떠오르고, 행복한 기분이 들 때면 물에 검은 잉크가 퍼져 나가듯 서서히 기분 나쁜 눈초리로 잠식해 오는 것이다.

우리 주인공 에밀 또한 평생을 그 공포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죽였어. 어쨌든 그건 분명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 안의 무엇인가는 이미 예전의 빛을 잃고 바래 버렸다. 그는 자신이긴 하나, 동시에 더이상 자신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어둠은 있다. 아멜리 노통은 이웃집 남자의 방문이라는 일상(이 소설에서는 특이한 형태로 표출되는)적인 소재로, 인간의 내면을 무서우리만치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다. '감추어 보아라! 나는 그것들을 파헤쳐 주리라!'

알공달공 펼쳐지는 전원 수채화 같은, 늘어지는 동화의 초반부에 손을 떼지 말기를. 예측 가능한 결말은 당신을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잔혹한 세계로 안내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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