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의 게레로 거리는 무엇보다 공동묘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1974년의 공동묘지도, 1968년의 공동묘지도, 또 1975년의 공동묘지도 아닌 2666년의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송장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눈꺼풀 아래서 잊혀진 공동묘지, 무언가를 망각하고 싶어 한 끝에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 한쪽 눈의 무심한 눈물 같다.
일상은 단지 몇 초 동안 지속되는 얼어붙은 투명함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와 일상을 바라보았고 일상이 나를 둘러싸도록 가만히 있었다. 난 어머니야, 솔직히 공포 영화가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아. 내가 일상에게 말했다. 그때 일상이 비눗방울처럼, 그러나 미친 듯이 부풀어 올라 펑 터졌다.
그러나 반쯤 왔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거리에는 이미 임팔라가 없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내 임팔라는 가버렸다.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도 가버렸다. 내 임팔라가 머릿속에 되돌아왔다. 내가 머릿속에 되돌아왔다.그때 나는 멕시코인 특유의 사고방식이 발동해서 겸허하게, 그러면서도 당혹해하면서 우리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폭풍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익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교활한 자들만, 나는 틀림없이 아닌 그런 자들만 조금 더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들처럼 해안을 항구의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 P27
따라서 사람이 사물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 그건은 이미,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강요되고 나서인 경우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들뢰즈는 사고란 비의지적인 것, 강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사고를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란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을 방해하는 ‘불법침입‘이고 ‘폭력‘이며 ‘적‘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철학philosophie이란 앎(sophia)을 사랑하는 것(philo-)‘이라는 말은 자주 듣는 어원담이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사유의 출발점에 있는 것은 ‘애지愛知‘가 아닌 ‘혐지嫌知‘이다. - P101
무질서란 단순히 우리가 바라고 있지 않은 질서이다. 목적이나 의지는 없어도 어떤 메커니즘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이 기대하고 있지 않은 질서가 나오면 ‘무질서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유감스러워하는 기분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 P107
우리의 자유는 거울을 복원하는 데 있다. 그것이 매 순간마다 우릴 해석해내기에. -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