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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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와다(Theravada, 상좌부) 불교 스님의 글이 우리나라의 유명 작가에 의해 소개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기쁘다. 테라와다 불교가 어떤 것인지, 우리나라 불교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Ajahn Brahm
<아잔 브라흐마의 사진>
 
테라와다(상좌부) 불교

현재 불교는 크게 북방불교와 남방불교, 혹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라는 식으로 나뉘어지고 있으나 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나뉨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100년이 지나고 나서 불교에는 부파불교 시대가 열리었는데 그때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 불교(나중에 대승불교가 됨)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은 부처님의 법을 따르고 의지하는 데에는 별 의미가 없는 나뉨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인도, 티벳, 중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어온 대승불교권에 속하게 되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로 전파된 남방불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테라와다(T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합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사용하셨던 팔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여,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대승 경전과 대비됩니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여진 것으로 기독교 시대가 열린 이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나 다른 어떤 경전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전승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상좌부 불교에 거의 접근해 보지 못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도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일 뿐이어서 상좌부야말로 살아있는 불교의 전통이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불자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선(禪), 티벳의 밀교에 관심이 많아 단순하고 역설적인 선의 직관적 방식이나 미묘한 교리상의 특징, 부처나 보살들이 펼치는 기적이나 환시(幻視)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전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뿌리에 근거를 둡니다. 말하자면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무아(無我), 사성제[苦, 集, 滅, 道] 등의 사상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설명되어집니다. 상좌부 불교 이론과 불교 심리학의 상당한 부분이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체계화시켜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 가지 번뇌’, ‘관(觀)의 네 가지 대상(4념처)’, ‘깨달음의 네 단계’같은 것들이지요. 다소 복잡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가르침들은 수행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정교하고 깨끗하게 다듬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은 마하 사티파타나(Maha Satipatthana : 4념처)입니다. 이 수행은 호흡하는 것을, 마음을 챙겨 지켜봄으로서 신체 각 부분과 감각 대상,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상좌부 불교는 삶을 덧없고 근본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유일한 실체적 가치는 깨달음의 성취, 즉, 열반(Nibbana)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상좌부 불교는 그 가르침과 수행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분명히 부정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단순한 상태, 그리고 통찰력과 지혜와 자유의 필요성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대승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붓다의 미묘한 기적이나 깨달음에 대한 찬양의 노래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선시(禪詩)에서 볼 수 있는 깨달은 자의 자유로움이나 본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의 시도 없습니다. 그리고 밀교의 복잡 미묘한 방법론이나 황홀경의 노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좌부 불교는 결코 희열을 배척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알란 와트(Alan Watt)는 마지막 저서인 [도(道) : 물길(The Watercourse Wa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좌부 불교가 번창하고 있는 나라에 사는 민족들은 모두 무한히 즐겁고 인간적인, 생각이 열린 사람들이다."

상좌부 불교는 인간의 정신과 삶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하고 균형 잡힌 정신력과 주의력, 그리고 통찰력을 통해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료: 보리수선원 http://www.boris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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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명상 -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지음, 손혜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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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왔던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의 개정판.

미국에서 많이 팔린 위빠사나 명상의 기본서. 저자는 80이 넘은 스리랑카 출신 노스님으로 미국에서 Bhavana Society(www.bhavanasociety.org)라는 불교 수행 단체를 이끌고 계신다. 2005년인가 1개월 동안 한국을 방문하신 적도 있다. 

당신 나는 안성에 있는 모 사찰에서 스님이 지도하시는 집중수행 코스에 참가한 적이 있다. 처음 스님을 뵀을 때의 그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어떤 감동인가는 아래에서 기술하겠다). 어쩌면 당시 스님에 대해 가졌던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지금도 이 '이상한' 이름의 수행을 놓지 않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나의 경험상 수행은 힘들여 열심히 하는 것보다 관심과 주의를 주는 듯 마는 듯 하며 -물론 그 본의는 수행의 이득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놓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마치 연애를 할 때처럼 나름의 묘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스님께 느낀 감동? 당시 집중수행을 위해 법당에 모인 50여명의 참가자들이 처음 스님을 뵌 것은  스님이 법문을 들려주시고 수행을 지도하시기 위해 천천히 법당으로 걸어 들어오실 때였다. 아주 유명한 스님이기에 따르는 시종만도 최소한 5-6명은 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전혀 뜻밖에도 스님은 홀홀단신 혼자 그 머나먼 길을 오셨다. 단지 통역을 위한 단 한 사람의 재미동포만 대동하셨다. 스님이 가지신 짐이라곤 어깨에 매는 바랑 하나.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스님의 움직임은 살아 있는 알아차림의 표본을 보는 듯했다.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나오시는 모습은 기력 없는 노인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발걸음을 포함한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고귀한 모습 그 자체였다. '알아차림'을 설법하는 많은 스님과 설법자들을 보았으나 나는 그것을 이 스님처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알아차림의 대가' '알아차림의 능숙한 달인'이라고 할까. 스님은 또한 법문에도 능숙한 분이다. 미국 모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실 정도로 논리적이고 지적인 분이시다.

여기서 알아차림이 도대체 뭐길래 그게 그렇게 감동적이냐가 설명되어야 내가 느꼈던 감동이 설득력 있게 전달될 것 같다. '알아차림'은 빨리어로 sati(사띠), 영어로 mindfulness(마음챙김)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미얀마나 스리랑카, 태국 등지에서 수행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설명을 위해 편의상 개념화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단히 실제적인 개념이다. 8가지 팔정도 중 하나인 정념(正念)이 바로 그것이다. '바른 기억'이라는 번역은 매우 불완전하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이라 하겠다. 불교의 8만4천 법문을 하나로 축약한다면 단연코 바로 이 '알아차림, 사띠'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우선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모든 감각, 경험, 생각, 의도 등을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로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철저히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그것들이 갖는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은 아직 인지과학, 인식론, 심리학, 철학 등의 분과 학문에서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중요한 것은 직접 수행을 통해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것들의 해로운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내 몸과 마음에 낀 습관적인 때가 제거되니 청정해진다.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몸도 더 건강해진다. 음주나 흡연 등 중독성 습관에서 해방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자애심이 샘솟듯 솟아난다. 알아차림의 이득은 여기서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는 수행을 통해 알아차림이라는 과정에 이토록 위대한 행복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공유하고 싶다.

위빠사나라고 하면 사람들은 일단 나와 관계 없는 먼 나라의 이상하고 신비스런 수행법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에 잘못 이끌려 실제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니 위빠사나라고 하여 괜히 어렵고 모호한 것으로 보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냥 '근본불교의 명상 수행법' 혹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바로 그 수행법'이라고 하자. 앞으로 더 많은 논의와 연구를 거듭하여 모든 인류가 더 잘 사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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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 2008-10-2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쉽고 명료하게 쓰신 리뷰가 아주 훌륭합니다. 메타님의 글을 보니 담마를 제대로 아는 분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아!요즘 사띠하며 붓다의 친해지고 있습니다. 행복도 함께요~ ^^
 
복리 - 마법의 재테크
우제용 지음 / 굿인포메이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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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고 복잡한 테크닉을 소개하는 보통의 재테크 책과 달리 재테크의 마인드에 보다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책으로 읽혔다. 부는 시간의 함수이니 조급하게 돈 벌 생각일랑 말아라. 사랑, 성실, 노력, 인내 등의 전통적인 미덕이 이 책의 콩나물 할머니가 주장하시는 바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하루라도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는 작금의 대부분의 재테크 독자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약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는 것이 우주의 순리가 아니라면 어떡하겠는가?(이 책은 그것이 순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이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별난 요행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해야 할 길은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을 길게 보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올바른 마음가짐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허락된 길이다. 그것이 우주의 섭리다. 이 책의 주인공 할머니는 바로 그런 길을 몸소 실천하신 분의 상징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리치(rich)와 웰시(wealthy)의 대비가 인상깊었다. 돈만 추구하는 것은 리치, 돈 이외의 삶의 다양한 영역을 함께 고려하는 것은 웰시다.  죽기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웰시한 삶을 살아야겠지.

돈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돈을 무시하는 것 또한 하나의 편견일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 책을 읽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나를 보았다. 다만 책의 효력을 지속시키려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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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보다 쉬운 독학 국사 - 7차 교육과정
박천욱 지음 / 일빛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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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급 공무원 시험 준비서로 이 책을 보았습니다. 과연 이런 책으로 수험준비가 될까? 생각했는데...되더군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저자는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관통하는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각조각난  정보와 지식의 창고인 것 같은 여느 교과서와 많이 다른 점입니다.

저자에게 역사란 흐름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의 틀과도 합치됩니다. 우리는 사물이나 상황을 인식할 때, 그것을 그냥, 그저, 마냥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머리속 어딘가 자리를 잡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가 잘 안찾아지면 우리는 그것을 '모르겠다' 하고, 또는 그것에 '관심없다'고 하는 것이죠. 이 책은 우리 머리속의 그 자리잡기를 쉽게 해줄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이유입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힐 뿐만 아니라 담고 있는 정보도 빠트린 것 없이 알차게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선생님의 '공부하기 싫어하는 중고등학생들'을 엄청나게 다루어보신 그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타가 좀 자주 눈에 띄긴 하지만 이 책의 미덕에 누를 끼칠 정도는 아닌듯 해요.

선생님, 앞으로 '독학 세계사' 만들어 주심 안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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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적 환경주의자 - 이 세상의 실제 상황을 직시하다
비외론 롬보르 지음, 김승욱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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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1천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다 읽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책의 구성상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책의 맨 앞과 맨 끝 부분만 읽어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본론의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언론과 과학자, 환경단체 들에 의해 조장되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에 대한 통계적 반론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이 책은 향후 환경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참고자료로서도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부제 'Measuring the Real State of the World'는 월드워치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지구환경보고서 The State of the World'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내가 이 부제에 마음이 끌린 것은 사실 최근 '귀농'이라는 나의 화두에 대한 좀더 객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자본주의의 소비문명이 싫었고(돈만을 추구하는 개인의 이기심이 보기 싫었고,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다른 부류임을, 그리고 또 다르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심각한 환경문제도 이런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소비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귀농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환경단체들에서 목높여 외치는 지구환경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귀농을 하지 않고 도시에서 지구오염에 일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삶이었다.

귀농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가 필요했다.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녹색평론>과 같은 책들을 보면 분명 귀농을 하는 것이 옳다. 귀농은 지구와 우리 후손들을 살리는 길이며, 도시에서의 자본주의 소비문명에 길들여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지구와 후손들을 망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자료가 좀 더 필요했다. 그래서 두꺼운 이 책을 집어들었다.

내가 파악한 이 책의 메시지는 이렇다. 1970년대 이후 연구기금이 필요한 과학자, 자신을 내세워야 하는 언론들, 감상적인 환경단체 들에 의해 환경위기의 심각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그러나 통계학자인 저자가 환경과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식량, 인구, 자원, 대기오염, 수질오염 등)를 모아 수십년 혹은 백년단위까지의 거시적인 흐름을 파악해 보았더니 환경은 점점 더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발달된 환경관련 기술을 이용해 앞으로도 환경은 점점 더 개선되어 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더 시급한 문제는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곤과 기근, 열악한 위생상태라고 한다. 사람이 가진 자원은 결국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결국 어디에다 이 제한된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을 먼저First Things First'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을 빌려, 저자는 '최악의 것을 가장 먼저Worst Things First'를 자신의 구호로 내세운다. 내가 판단하기에 저자는 결코 환경단체들에 '딴지'를 걸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확보된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환경과 관련하여 인류가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 보여줄 뿐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인류의 미래환경에 대해 '낙관적'이다. 책 맨 마지막의 말 '아름다운 세상이지 않은가'라는 말에 저자의 낙관론이 집약되어 있다. 다만 한가지 이 책에 대해 아쉬운 것은, 지구 환경이 나날이 개선되어 가고 있다고 해서, 인류가 환경에 대해 '방만'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다소 놓친 점이다. 서구인답게 객관적인 통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나, 발달하는 환경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지구인 한사람 한사람의 환경을 돌보는 소중한 '마음'임을 독자들은 잊어서는 안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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