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의 소리 2009.3.4 - 창간호
함석헌기념사업회 엮음 / 함석헌기념사업회(월간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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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는 아니더군요. 창간호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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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도 - 사야도 우 조티카의 수행지침
우 조티카 사야도 지음, 박은조 옮김 / 연방죽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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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조티카 사야도는 <여름에 내린 눈>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진지한 구도 정신과 한없는 겸손함, 수행의 바탕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명징하고 절제된 언어... 나에게는 수행문학의 백미로 읽혔다(보리수선원과 한언 두곳에서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보리수선원의 번역이 훨씬 좋았다).  

오랜만에 스님의 새 책이 나왔다기에 눈독을 들였는데 책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근데 오늘 동네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이 떡하니 두 권씩이나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얼씨구나 하고 집어들었다. 그런데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느낀 것은 -내용은 차치하고- 아무도 이 책을 보지 않았다는 거였다(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감각으로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주제이리라.  

그렇다. 이런 책은 인기가 없다. 재미 있는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사는 데 딱히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그렇다고 법정 스님처럼 저자가 유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꼭 독자들을 탓할 일만도 아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이런 책이 자기 자신의 실질적인 삶에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그 "접점"을 쉽게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그 접점을 찾아줄 수 있는 역할이 요청된다. 무엇과 무엇의 접점인가? 聖과 俗의 접점, 이상과 현실의 접점, 가르침이라는 보편과 나라는 특수의 접점이다. 그래야 이 책의 메시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聖, 이상, 가르침이라는 보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잊고 지내는 자각(awareness) 혹은 의식(consciousness)이 갖는 보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 다루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sati)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대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보지 못하는, 나의 의식의 숨겨진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 회사 가고 일하고 퇴근하고 사람 만나고...이런 일들을 모두 내가 알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혹 내가 마치 "기계"처럼 아무 생각없이 하루를 지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그리고 삶이 꼭 왜 이렇게 지리멸렬해야만 하는지, 해결책은 없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본 이라면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이런 숨겨진 차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거기서 얻은 지혜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때 삶은 아주 피상적이 되기 쉽다. 요즘 모두들 경제, 경제 하는데 과연 지금의 경제 문제를 어떤 시스템이나 물질적 차원에서만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경제를 운용하는 주체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고 치유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무절제한 탐욕과 분별없음이 빚어낸 경제적 폐해에 대한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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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교] 불교 스승들의 가르침 (Budhhism reminders from master)
    from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mple Life 2011-08-13 09:29 
    여기에 적어 놓은 불교 스승들의 가르침은 메뉴판과 같습니다.맛집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하다가, 이제서야 식당에 들어와 메뉴를 펼친 것이죠.하지만 맛이 어떤지, 먹고 나면 소화가 잘 될지는 알지 못합니다.그래서 이곳에 적인 메뉴들을 하나씩 먹어보고,맛은 어떤지 나에게 맞는지 시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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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는 최근,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고, 한국인의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

저자는 현대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의 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실용주의를 든다. 그런데 이들 '~주의'라는 단어만으로 저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 속에서 저자의 부연설명을 직접 들어야 옳은 이해와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인생주의는 인본주의와는 다르다. 일이나 작품이 주제가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한국인의 인생주의의 뜻이다. 저자는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를 예로 들어 미국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의 차이를 보인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의사, 변호사로서의 전문적 일이 드라마의 초점이 되는 데 반해 한국 드라마는 그것들이 개인의 삶을 비추는 하나의 배경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전문성이나 사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용어도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세상과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하는 비관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라는 긍정적 허무주의다. 건강한 허무주의다. 그래서 저자는 이 허무주의를 현세주의, 인생주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비유다.(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길...)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되비추어보는 데는 취약하다. 적어도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그냥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그러하다. 이것은 한국인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내가, 우리가 관찰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기에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책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함께하는 나와 나의 한국인 동시대인들에 대한 의문에 일정한 설명 틀로 그 궁금증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소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지닌 자기 폐쇄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한국인은 '좋음'을 추구하는 실용주의를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좋음'이란 '지금 상황에 적절함, 쓸모 있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저자는 '좋음'은 '진선미'의 가치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한다. '좋음' 앞에서는 '진선미'도 별로 맥을 못춘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저자는 실용주의의 '구조'를 말한다. 그 구조란 '~에 유용한(쓸모 있는) 것은 좋다'라는 구조이다. 인용부의 '~'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 자리에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앞으로는 '사색의 즐거움(159쪽)'이나 '영혼의 정화(150쪽)'가 들어갈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조이기 때문에 시간적 지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마치 영어 문장의 내용은 바뀌더라도 '주어 + 동사 + 목적어'라는 형식(구조)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처럼(151쪽).

그러나 이 '좋음'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좋음'을 무채색의 중립개념인 듯 사용하고 있지만 독자인 내가 읽기에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의 자리에 지금은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가 말하는 좋음이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한다. 본능에는 동물적 본능뿐 아니라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본능까지도 포함되는데, 내가 보기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음'은 이런 미세하고 포괄적인 본능을 지금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런 구조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그것 자체로 어떤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지속인가를 우리는 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한국적 지혜의 속성은 존재한다. 의식주 등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베인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 조상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은 그런 한국적 지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저자는 '문화에는 DNA가 없다'며 단절에 의해 문화는 불연속적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다소 과격한 주장이다. 내 몸과 생각, 느낌 속에는 수천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내 조상의 DNA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혜에는 언제나 평정과 절제, 자기반추와 숙고가 녹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에는 이런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본능의 효율적 충족을 좋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발전과 향상이 존재하기 힘들다. 인류 보편의 문제와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국인에게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라는 저자의 설명 틀로는 인류 보편의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한국인의 기여가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거리'를 제공해준 저자와 책에 감사한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줄여야겠다. 그리고 더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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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서 -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 - EBS 다큐멘터리
EBS 동과서 제작팀.김명진 지음 / 예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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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은 전체를 보고 서양인은 부분을 본다...등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았다. 굳이 우열을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내용으로만 본다면 동양의 판정승(?) 같다. 그런데 이런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 누구냐를 볼 때 동양의 섣부른 판정승이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이 연구 자체가 서양의 지식 생산기지인 대학이라는 체제 속에서, 특히 심리학이라는 근대 과학의 원리와 지도 아래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동양인 교수도 나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는 교수들이다). 누가 이런 연구를 왜 애시당초 기획을 했고 구상을 했느냐에 있어 동양이 주도권을 뺏긴 것이라 본다면 너무 경쟁적인 시각일까?

동양의 판정승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 대한민국이라는 '동양'이 얼마나 책에서 주장하는 동양적 가치를 잘 실현하고 있으며 또 그에 따라 조화롭고 전인적인 삶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금의 동양은 온전한 동양이 아니라 서구 근대화에 의해 '변형된 동양'이다. 제도, 문물 등 많은 부분이 서양의 수입물로 채워져 있으며 젊은 세대들은 세련됨, 현란함, 독립적, 시각적, 속도, 개인 등의 표현으로 대변되는 서양적 가치를 더 우수한 것으로 생각하며 숭앙하고 있다.

책과 다큐에서 내세운 우수한 동양적 가치를 실제로 구현하며 사는 '동양적 행복'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누렸으면 좋겠다. 그를 위해 필요한 지혜 또한 우리의 동양적 사유방식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며...

실제로 서양 사람들은 이 책에서 얘기한 동양적 사고방식을 자기네들이 갖추지 못한 시각, 인류의 보다 높은 지혜의 완성을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현하며 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이 책을 통해 동양과 서양, 그 둘의 만남의 양상과 의미,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양을 맞이해야 하는가에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동양의 것이라 무조건 고집하고 서양의 것이라 무조건 거부하는 자세(혹은 그 반대)보다 무엇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 판단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한편, 동양(인)에게는 동양적인 '무엇'이, 서양(인)에게는 서양적인 불변의 특성(property)이 있다는 생각 자체도 서양적 단견일지 모른다(이는 위에서 얘기했던, 서양 학자들이 쥐고 있는 연구의 주도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겠다). 모든 것은 주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나고 유지되다가 소멸되는 일종의 '과정(process)'일 뿐이라는 것이 더 동양적 지혜에 가까울 것이다. 혹시 한국에 오래 산 미국인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종종 그가 미국 사람보다 한국 사람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가져본 적이 있다.(미국에 오래 산 한국 사람도 별로 한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서양보다 동양에 더 가깝다. 결국 동양과 서양에 귀속되는 속성, 특질, 유전자가 있다기보다 문화라고 일컫는 주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고 유지되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연한 태도로 그런 흐름을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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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아들아 -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전하는 희망 메시지
마이클 J. 다이아몬드 지음, 이재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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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남자들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겉으로 내놓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가슴 한편에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이런 궁금증 혹은 호기심은 삶의 큰 사건들, 결혼, 아들의 탄생, 아버지의 죽음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당면하여 더 거세게 일어난다.

우리 모두-적어도 남자들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존경일 수도, 흠모일 수도, 애증일 수도, 동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삶의 각 단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매우 역동적인 것이다(이것은 엄마와 딸이 갖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감정과는 또다른 것이다).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그런 묘한 역동을 각 생애단계별(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기, 노년기 등)로 나누어 저자의 실제 심리상담 사례들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책의 기조를 이루는 정서는 역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돕는 존재라는 것, 인생을 무대로 삶의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관계라는 것, 그리하여 개체적 생명체로서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삶에의 영원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아주 실질적인 아들 교육 지침서는 아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영감을 주는 책이다. 그런 영감 속에서 관계의 구체적인 해법도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지나친 자신감일까?

아버지와 아들, 남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은 엄마와 아내와 딸들도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남자들의 '알 수 없는' 속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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