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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는 최근,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고, 한국인의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이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
저자는 현대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의 틀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실용주의를 든다. 그런데 이들 '~주의'라는 단어만으로 저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책 속에서 저자의 부연설명을 직접 들어야 옳은 이해와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인생주의는 인본주의와는 다르다. 일이나 작품이 주제가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한국인의 인생주의의 뜻이다. 저자는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를 예로 들어 미국 드라마와 한국 드라마의 차이를 보인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의사, 변호사로서의 전문적 일이 드라마의 초점이 되는 데 반해 한국 드라마는 그것들이 개인의 삶을 비추는 하나의 배경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전문성이나 사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리고 허무주의라는 용어도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세상과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하는 비관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라는 긍정적 허무주의다. 건강한 허무주의다. 그래서 저자는 이 허무주의를 현세주의, 인생주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비유다.(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길...)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되비추어보는 데는 취약하다. 적어도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그냥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그러하다. 이것은 한국인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내가, 우리가 관찰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기에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책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함께하는 나와 나의 한국인 동시대인들에 대한 의문에 일정한 설명 틀로 그 궁금증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소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지닌 자기 폐쇄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한국인은 '좋음'을 추구하는 실용주의를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좋음'이란 '지금 상황에 적절함, 쓸모 있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저자는 '좋음'은 '진선미'의 가치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한다. '좋음' 앞에서는 '진선미'도 별로 맥을 못춘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렇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저자는 실용주의의 '구조'를 말한다. 그 구조란 '~에 유용한(쓸모 있는) 것은 좋다'라는 구조이다. 인용부의 '~'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 자리에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앞으로는 '사색의 즐거움(159쪽)'이나 '영혼의 정화(150쪽)'가 들어갈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조이기 때문에 시간적 지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마치 영어 문장의 내용은 바뀌더라도 '주어 + 동사 + 목적어'라는 형식(구조)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처럼(151쪽).
그러나 이 '좋음'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좋음'을 무채색의 중립개념인 듯 사용하고 있지만 독자인 내가 읽기에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의 자리에 지금은 '인생의 즐거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가 말하는 좋음이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한다. 본능에는 동물적 본능뿐 아니라 존경받고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본능까지도 포함되는데, 내가 보기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음'은 이런 미세하고 포괄적인 본능을 지금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런 구조의 지속성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그것 자체로 어떤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지속인가를 우리는 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한국적 지혜의 속성은 존재한다. 의식주 등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베인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 조상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은 그런 한국적 지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저자는 '문화에는 DNA가 없다'며 단절에 의해 문화는 불연속적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다소 과격한 주장이다. 내 몸과 생각, 느낌 속에는 수천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내 조상의 DNA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혜에는 언제나 평정과 절제, 자기반추와 숙고가 녹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좋음'에는 이런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본능의 효율적 충족을 좋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발전과 향상이 존재하기 힘들다. 인류 보편의 문제와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국인에게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은 지혜의 민족이라고 믿는다.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라는 저자의 설명 틀로는 인류 보편의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한국인의 기여가 충분히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거리'를 제공해준 저자와 책에 감사한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줄여야겠다. 그리고 더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