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의 비밀을 밝히다
브라이언 페스킨 외 지음, 김성동 외 옮김 / 푸른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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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비싸요.. 일반인은 사보지 말란 얘기? 의사들만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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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은 손수건 위에 - 톱 세일즈맨이 실천하는 작은 규칙들
가와다 오사무 지음, 한혜정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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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영업 스킬이 아니다. 마인드다.  

스킬은 마인드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신의 기질과 환경에 맞게.. 

그래서 영업 스킬을 가르치는 수많은 매뉴얼책(how-to book)은 의미가 없다. 허당이다.   

예전에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읽었던 때가 기억난다.  

코비는 자신의 리더십 이론은 이제까지의 이론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이 이번에 들고 나온 이론은 '성격'중심의 접근법이 아니라 '성품'중심의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가지'가 아닌 '뿌리', 피상적인 변화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지적하는 말이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보이고 싶은 대로 억지로 꾸며서 포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나의 성품' 나의 뿌리, 나의 근본은 마치 나에게서 묻어나는 향기처럼 말로 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향과 같은 것이다.  

이 사람 가와다 오사무 씨가 그런 사람이다. 실적 경쟁의 살벌한 보험영업 세계에서 이토록 인간미 넘치는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잔 스킬이 아니라 고객과 영업 활동을 대하는 그의 진심에 있지 않을까.  

새해 벽두에 이렇게 좋은 책을 읽게 되어 마음 한편이 훈훈하다. 꼭 보험영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영업이나 세일즈에 관련된 누구라도 꼭 읽어볼 책으로 추천한다. (참, 이 책의 저자 인세 전액은 캄보디아의 초등학교 지원 사업에 쓰인다니.. 역시 가와다 씨 답다!) 

오늘도 화이팅! 가와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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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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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분야의 책을 몇 권 번역해본 사람으로서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네요.  

저는 좋은 번역자란 무엇보다 원서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독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좋은 번역자로서의 '표준적인 독자'란 외국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읽을 줄 아는 독자, 혹은 해당 언어권의 대다수 독자들이 읽는 방식대로 읽는 독자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번역에 대한 저 나름의 큰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번역에서 도착어의 표현 문제, 구체적인 '글쓰기' 문제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그 하나하나의 팁을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짚어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다시 원론으로 조금 돌아가자면, 저는 원서를 벗어나는 '월권'을 행사할 수 없는 번역자의 '한계'와, 원저자의 의도를 자연스런 우리말로 살려내야 하는 번역자의 '책임' 사이에서 얼마나 지혜로운 妙를 부릴 줄 아는가가 번역의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제 '메타(meta) 번역학'도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타 번역학이란, 제가 만들어낸 용어인데,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무엇을, 왜' 번역하느냐의 문제를 고민해보는 일도 필요하다는(번역가도!) 생각에서입니다.  

통상 번역가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원서를 번역하는 데 몰두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질 높게 수행하려는 수고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번역가는 번역의 '어떻게'만 고민하면 되고, 번역의 '무엇을'과 '왜'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고민하는 번역가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볼까요. 한 권의 원서가 있다고 할 때 번역을 결정할 수 있는, 즉 이 책을 번역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돈 등 책 이외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죠)   

다시 말해 '왜 이 책을 번역해야 하는지'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 메시지가 한국에서 누구의 소용에 쓰이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저는 그것이 해당 원서를 가장 '자신 있게' 읽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자신 있게'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위 두 질문에 대한 대답뿐 아니라 번역의 '어떻게'에 대한 것, 심지어 이 책의 편집과 홍보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혼융'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가도 이제는 번역의 '안'만큼이나 '밖'에서도 책의 관련 당사자들(독자, 출판사, 해당분야 전문가 등)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기능을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특히 번역의 '효용가치'가 높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첫째, 한국인들은 우선 다른 나라보다(일본 제외) 영어 해독력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영어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이 아니라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외국어로서의 영어)입니다. 둘째, IT기술의 발달과 젊은 세대들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욕구는 영어로 된 서구 콘텐츠 유입의 속도와 범위에 점점 가속도를 더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세째, 한국은 영어사용권 문화와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신적, 심성적 거리도 무척 먼 편입니다. 이 거리가 멀 때 번역이 더 큰 효용가치를 갖습니다.  

(영어 책 한 권을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유럽어로 번역하는 경우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어 책이 한 권 있다고 할 때 그것의 유럽어 번역본은 하나의 불어 '버전', 독일어 '버전'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것은 여러 '버전'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에 맞도록 재탄생한 하나의 '새로운 작품'에 더 가깝다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이런 점에서 한국은 영어책 번역의 효용가치가 높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번역가들이 활동할 무대가 그만큼 넓다는(그리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제대로 된 원서를 '자신있게' 읽을 줄 아는 안목, 그러면서도 표준적인 원서 독자의 눈으로 읽을 줄 아는 균형잡힌 안목을 갖추는 일입니다.(또 자기 관심분야에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노력도 기울여야겠죠.) 누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요? 출판사? 기획자? 편집자? 출판 에이전트? 해당분야 전문가? 아마 번역자가 조금 더 유리할 것입니다.  

여기에 '메타 번역학'의 소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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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통혁명 - 통증혁명 실천편
로널드 시걸.더글러스 존슨.마이클 어당 지음, 이재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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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역자입니다.   

리뷰 란에 역자가 글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yes24에는 그런 란이 있더군요), 홍보성 글은 아니고 이 책에 대한 역자의 애정의 표시라고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 책과 저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만성적인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던 제게 마치 '구세주' 같은 책이었다고 할까요. 당시 저는 온갖 병원이며 치료법을 모두 동원해보았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무척 우울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의 원서를 읽게 되었고, 그로부터 큰 자신감을 얻고 회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통증치료법이란 허리 통증의 원인이 오직 신체 구조적인 문제에만 있다고 보고 '고장난' 허리를 고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치료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통증은 다만 신체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통증에 다가가느냐에 따라 통증은 꽤 큰 편차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통증이 다만 신체적인 것만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통증 + 저항 = 고통'이라는 공식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통증 감각 자체가 신체적인 것이라면 그에 대해 싫어하고 저항하는 마음은 분명 심리적인 것입니다. 이 둘을 서로 구분해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통증(마음까지 뭉뚱그려져 있는, 우리가 통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덜 휩쓸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작업, 즉 몸(통증감각)과 마음(저항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서로 분리해서 보게 하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으로 많은 분들이 필요 이상의 고통으로부터 하루 빨리 회복되어 보다 건강하고 질 높은 삶을 사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저자인 로널드 시걸 박사는 2008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마음챙김과 심리치료'라는 주제로 불교방송에서 강연을 한 바도 있습니다(저는 그때 박사와 인사를 나누면서 저자와 역자로서의 귀한 인연이라고 생각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도 내게 도움을 준 책을 쓴 저자가 직접 한국에 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요). 책 속에 등장하는 운동 동작의 모델이 바로 시걸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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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과 심리치료 - 불교명상과 심리학의 만남
크리스토퍼 거머 외 지음, 김재성 옮김 / 무우수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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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상과 심리치료인가 

 명상과 심리치료 모두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며 처방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상은 동양에서 인간의 정신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오래된 방법으로서, 프로이트 이후 인간의 정신 문제 해결을 위해 심리치료라는 기법을 고심해오던 서양 심리학자들에 의해 치료의 새로운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동양의 명상에 대한 서양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증가는 동서양의 교류가 보다 활발해진 20세기 이후의 사정을 고려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자신의 치료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목적에서 서양 심리치료자들이 동양 명상의 정신과 기법을 도입하여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 있어 명상과 심리치료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으며, 특히 심리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 명상의 치유적 메커니즘을 '알아차림'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자 한다.

 

문제의 진단
명상을 인간 정신 문제의 해법으로 보는 불교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바로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무지한 마음(무명, avijja)에서 찾는다. 탐은 좋아서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마음, 진은 싫어서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마음, 치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는 말 그대로 무지한 마음임을 알겠는데, 탐과 진은 뭐가 무지하다는 것일까? 무엇을 모른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를 그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고통인 것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알고, '나, 영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런 것이 있는 줄 잘못 아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정신적 문제(번뇌, kilesa)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세 가지 독심(毒心)이다. 그렇게 잘못 알기 때문에 탐하고 성낸다는 것이다. 성냄은 지금 성내는 대상 말고 다른 것을 탐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탐심과 다르지 않다.

 

붓다, 오직 고통과 그 해결만을 말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우리는 동의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탐심과 진심, 치심을 갖는 것은 잘못이고 나쁘다'는 일종의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5계 등의 지계(sila) 역시 이런 '부도덕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불교가 탐진치를 경계하고 계를 지킬 것을 권장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존재의 실상인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데 그 참뜻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알지 못할 경우, 5계를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억압하는 장치라고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다. 붓다는 인간을 '단죄'하려고 하지 않았다. 붓다는 오직 인간 고통의 원인과 해결만을 말하였다. 그것을 치열하게 모색한 결과,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3가지 실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고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갈애(tanha)와 집착(upadana)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해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법은 탐진치의 독성을 바로 알고 계율을 지키는 바탕 위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붓다는 탐진치와 계율을 이야기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계, 정, 혜 3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계는 몸과 입을 통해 이미 겉으로 드러나 버린 거친 번뇌(vitikkama kilesa)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정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번뇌(pariyutthana kilesa)를 다잡기 위한 것이며, 마지막 혜는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아주 미세하고 잠재된 번뇌(anusaya kilesa)를 뿌리째 뽑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세 가지 수준의 번뇌에 대응하여 각각의 번뇌에 보다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1) 여기서도 우리는 계를 어떤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붓다는 오직 인간의 고통과 그 해결법을 말한 것이지, 그 외의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알아차림' - 인간 고(苦)에 대한 처방
그렇다면 이런 식의 문제 진단에 이어 불교, 특히 위빠사나 명상이 내리는 처방은 무엇인가? 인간의 삼독심으로부터 비롯된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가 제시한 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12연기와 4성제, 8정도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보자.

우선, 12연기의 [무명 > 식 > 행 > 명색 > 육입처 > 촉 > 느낌 > 갈애 > 집착 > 유 > 생 > 노사]의 윤회의 굴레에서 특히 [느낌 > 갈애]의 순간에 알아차림을 두면 그 느낌이 갈애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4성제로 설명하자면 고통인 줄[苦]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에[集] 역시 얻는 것은 고통뿐이며[苦], 고통에서 벗어나기[滅] 위한 처방으로 8정도[道]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8정도에서는 지혜 그룹(바른 견해, 바른 의도), 지계 그룹(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집중 그룹(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집중)으로 크게 나누어(계, 정, 혜) 인간 고통의 해결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바른 알아차림이다.2) 인간의 정신적 고뇌 해결의 측면에서 볼 때 12연기, 4성제, 8정도의 가르침을 하나로 압축한다면 단연코 '알아차림 혹은 마음챙김(sati)'이다

 

범박한 해법
인간 고의 원인에 대한 이런 식의 진단과 처방이 심리치료를 하는 서양 심리학자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아마도 그건 너무 범박한3) 해법이라고, 인간의 무의식이나 개인의 다양하고 특수한 삶의 배경과 정신 역동을 고려하지 않은 '무딘' 해법이라고 하지 않을까? 혹은 지나친 일반론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불교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계율을 정해 놓았다고까지 할지 모른다(이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교는(명상은) 각 개인의 정신적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개인의 배경, 정신 역동에 따라 엄청난 다양성을 지니는—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고통에 내재한 힘(에너지, 욕구 등)의 '방향성'4) 혹은 '양상'에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고통이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 내재한 어떤 힘의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서양 심리치료가 불교의 인간 고에 대한 인식 혹은 진단을 너무 범박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 같다.5)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식의 해법은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보다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이냐 양상이냐' 부분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
이런 식의 진단이 범박한 것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 범박함 때문에 문제 해결이 효과적이지 못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많은 심리치료자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명상이 지닌 심리치료적 한계와 관련한 맥락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자아가 먼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명상은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자아가 확립되지 못하여 명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아강도가 약한 사람은 주위에 흔치 않은 것 같다.6) 그리고 그런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맞추어 명상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한 생산적인 논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떤 명상법으로 어떻게 명상하고 있느냐, 즉 제대로 명상하고 있느냐이다. 즉, 자아의 강도가 문제가 되어 명상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므로 논의의 실익이 별로 없음을 위에서 말하였다—'제대로 하지 않아서' 효과가 없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명상의 효과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명상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관건이며, 우리는 그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대로 명상 수행을 하여 일정한 성취에 도달한 경우에 한하여 그것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7)

 

올바른 명상수행의 기준
명상 수행을 제대로 하느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올바른 불교의 가르침인가를 확립해야 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어떤 불교 전통이 그 가르침을 지금 현재에 실천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가르침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8)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 이래 2,500년 동안 그 고유한 가르침이 4성제, 8정도, 12연기의 가르침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으며9) 하나의 완정한 삶에 대한 관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전통이 가장 원본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역시 미얀마 등지를 위주로 한 테라와다(Theravada)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테라와다 불교를 접해본 많은 이들이 이 전통이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불교의 전통임을 이야기한다.

명상의 심리치료적 적용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처럼 명상이 속해 있는 구체적인 불교 전통의 맥락을 흐리거나 왜곡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명상을 지나치게 실리적 목적을 위한 테크닉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명상의 본질에서 멀어질 소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명상과 심리치료
보다 구체적으로 명상과 심리치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명상

심리치료


1. 정신 병리는 누구나 갖고 있는 것

2. 초(超) 인지적 과정

3. 자각 능력 증대

4. 문제와 맺는 관계(양상)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에 개의치 않음

6. 보다 창의적, 주체적

7.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


1. 특정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

2. 인지적 과정

3. 해석 능력 증대

4. 내용 중심의 해법

5. 사례 및 상황별 서로 다른 전략

6. 보다 기법적

7. 특정 이론에 바탕한 해법(정신분석, 행동주의 등)


근본 예방책으로서의 명상
우선 1번을 비교해보면, 불교 명상은 정신병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본 반면 심리치료는 특정한 정신 병리를 갖고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명상에서 말하는 정신병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탐진치, 무지, 무명을 말하는 것으로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기능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 한한 정신병리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차이가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양자의 태도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선, 별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시 했다는 점에서 불교는 인간 존재와 고통에 대해 매우 섬세하고 철저한 진단을 내렸다. 자그마한 싹이라도 남겨두면 무성한 잡초로 자라나고 말 것이라는 인식이다. 명상은 마치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를 말하듯이, 인간이란 존재는 계, 정, 혜의 3학을 부지런히 갈고닦지 않으면 흐르는 강물에서 노를 젓지 않은 배가 하류로 떠내려가듯이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본다. 한편 심리치료는 정신의 기능적인 이상을 호소하는 때에야 비로소 작업에 착수한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문제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는 예방적 성격이 보다 짙다고 하겠다.

내용이냐 양상이냐
2~5번까지는 모두 문제의 '내용 대 양상'의 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위에서 보듯이 명상은 심리치료에 비해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와 맺는 관계 양상에 보다 주목한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 초인지적적(meta-cognitive) 과정을 다루며 당사자의 문제에 대한 해석 능력보다 자각을 증대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해석은 내용에, 자각은 양상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의 내용을 다루는 것—심리치료가 하는 일—이 적절한가, 아니면 모든 고통에 내재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양상을 다루는 것—명상이 하는 일—이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내용과 양상이라는 이 두 차원은 어느 사태에든 본질적으로 수반되는 두 차원이다. 어느 한 차원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두 차원 모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차원 모두 적절하게 다루어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의 심리치료에서 자각과 양상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으로 게슈탈트 심리치료나 ACT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명상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 문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그 문제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 중심적 대응 방식보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주체) 중심의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명상을 통해 사람의 바탕 자체가 질적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그럴 때 각 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은 그 사람이 명상수행을 통해 터득한 지혜로써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명상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명상과 심리치료에 대한 이런 비교를 통해 인간 고의 문제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해결을 양자가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註 

1) 우 빤디짜 사야도(보리수선원 법문, 2008. 12) 
 

2)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12연기는 인간 번뇌의 원인과 발생 과정에, 8정도는 그 해결방법에 보다 무게중심을 둔 설명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4성제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3) 범박하다 (泛博/汎博-) [형용사]데면데면하여 구체적이지 못하고 범위가 넓다.  
 

4) 여기서 '방향성'이란 탐심이라는, 나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힘, 진심이라는 나로부터 밀쳐내려는 힘처럼 '나, 자아'를 중심으로 한 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다.   

5) 이것은 마치 동양의 한의학이 인간의 모든 질병을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6)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극심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명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Boorstein). 

7) 이것은 마치 3류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켜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하여 그 선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8)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수행방법에 관한 문제는 각 개인의 기호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적어도 수행방법에 관한 한, 필자의 기호와 신념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일 뿐 특정 전통이 완벽하게 옳은 것임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9) 불교의 가르침이 불교 이전의 가르침과 가장 다른 것은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기 위한 수행법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붓다가 등장한 것은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빤디짜 스님, 보리수선원 2008년 12월 법문). 붓다 이전에도 사마타 등의 수행법은 많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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