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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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분야의 책을 몇 권 번역해본 사람으로서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네요.  

저는 좋은 번역자란 무엇보다 원서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독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좋은 번역자로서의 '표준적인 독자'란 외국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읽을 줄 아는 독자, 혹은 해당 언어권의 대다수 독자들이 읽는 방식대로 읽는 독자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번역에 대한 저 나름의 큰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번역에서 도착어의 표현 문제, 구체적인 '글쓰기' 문제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그 하나하나의 팁을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짚어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다시 원론으로 조금 돌아가자면, 저는 원서를 벗어나는 '월권'을 행사할 수 없는 번역자의 '한계'와, 원저자의 의도를 자연스런 우리말로 살려내야 하는 번역자의 '책임' 사이에서 얼마나 지혜로운 妙를 부릴 줄 아는가가 번역의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제 '메타(meta) 번역학'도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타 번역학이란, 제가 만들어낸 용어인데,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무엇을, 왜' 번역하느냐의 문제를 고민해보는 일도 필요하다는(번역가도!) 생각에서입니다.  

통상 번역가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원서를 번역하는 데 몰두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질 높게 수행하려는 수고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번역가는 번역의 '어떻게'만 고민하면 되고, 번역의 '무엇을'과 '왜'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고민하는 번역가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볼까요. 한 권의 원서가 있다고 할 때 번역을 결정할 수 있는, 즉 이 책을 번역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돈 등 책 이외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죠)   

다시 말해 '왜 이 책을 번역해야 하는지'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 메시지가 한국에서 누구의 소용에 쓰이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저는 그것이 해당 원서를 가장 '자신 있게' 읽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자신 있게'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위 두 질문에 대한 대답뿐 아니라 번역의 '어떻게'에 대한 것, 심지어 이 책의 편집과 홍보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혼융'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번역가도 이제는 번역의 '안'만큼이나 '밖'에서도 책의 관련 당사자들(독자, 출판사, 해당분야 전문가 등)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기능을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특히 번역의 '효용가치'가 높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첫째, 한국인들은 우선 다른 나라보다(일본 제외) 영어 해독력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영어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이 아니라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외국어로서의 영어)입니다. 둘째, IT기술의 발달과 젊은 세대들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욕구는 영어로 된 서구 콘텐츠 유입의 속도와 범위에 점점 가속도를 더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세째, 한국은 영어사용권 문화와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신적, 심성적 거리도 무척 먼 편입니다. 이 거리가 멀 때 번역이 더 큰 효용가치를 갖습니다.  

(영어 책 한 권을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유럽어로 번역하는 경우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어 책이 한 권 있다고 할 때 그것의 유럽어 번역본은 하나의 불어 '버전', 독일어 '버전'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것은 여러 '버전'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인의 심성에 맞도록 재탄생한 하나의 '새로운 작품'에 더 가깝다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이런 점에서 한국은 영어책 번역의 효용가치가 높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번역가들이 활동할 무대가 그만큼 넓다는(그리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제대로 된 원서를 '자신있게' 읽을 줄 아는 안목, 그러면서도 표준적인 원서 독자의 눈으로 읽을 줄 아는 균형잡힌 안목을 갖추는 일입니다.(또 자기 관심분야에서 끊임없이 공부하는 노력도 기울여야겠죠.) 누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요? 출판사? 기획자? 편집자? 출판 에이전트? 해당분야 전문가? 아마 번역자가 조금 더 유리할 것입니다.  

여기에 '메타 번역학'의 소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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