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함부로 말을 하고,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으면 무례할만큼, 말대답을 하는, 좋은 말로 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쁜 말로 하면, 참 재수없는 인간이다.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야지, 강자앞에서는 할말을 당당히 하는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이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고등학교까지 12년, 나는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못난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을 가면서부터 정말로 할 말을 조금씩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문제는, 그게 강자 앞이 아니라 한없이 약한 약자 앞이라는 게 문제가 되긴 하였지만 말이다.  

지금은, 힘있는 사람 앞에서도 조금씩 말을 할 줄 되었다. 심각한 건, 그게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상처를 주는 말이라는 거다.  

그리고 오늘 아주 신경쓰이는 전화를 받았다. 실은 별 거 아니지만, 계속 생각나는 걸 보면, 난 참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가 보다.  

나는 직장생활을 잘 하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학창시절 왕따 아닌 왕따를 너무 심하게 겪은 탓인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몸에 배여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나를 잘 알지 못했는데, 어느 날, 직원들이 모두 모여 연수를 가게 된 바로 그 날,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별로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실은 내가 먼저 그들을 피한 거였는데, 지금은 모든 직원들이 기피하게 된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다. 그 때 얼마나 마음이 휑했는지, 그 때 얼마나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피맺히게 느꼈는지 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런 감정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직원 회의를 할 때마다, 이리저리 지나치면서 보는 직원들의 눈빛을 마주칠 때마다, 아 나를 싫어하는구나, 라는 격한 감정을 매일 느끼고 있다. 별 거 아니야,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 그렇게 말을 해봐도,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좋은 선생도 되어있지 못했다.  

오늘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재작년 우리반 아이 엄마의 전화였다. 아이가 담임샘 때문에 너무 피곤해 하고, 학교도 가기 싫어한다는, 근데 그 전화를 받고, 혹 우리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을까? 하는 무서움이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온 숱한 상처많은 말들이 아이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 건 아니였을까?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심한 말들을 내가 했던 건 아니였을까?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내가 학교를 가기 싫어했던 것처럼, 아이들도 나 때문에 학교 오는 걸 싫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묘한 공포감이 들었던 거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좋은 선생은 되고자 했다. 수많은 동료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가면서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쪼개고 아이들을 위해 수업을 열심히 하는 선생이 되고자 했는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린 건 아니였을까? 동료직원들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이들에게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는 그런 괴물이 되어있는 건 아닌가? 하는.  

죄많은 인간이구나, 죄가 많아 인간으로 태어난 무자비한 사람이구나, 내일 아이들의 얼굴을 어찌 볼까? 괴물처럼 변해버린 나와, 이미 나에게서 등돌린 아이들과 어찌 또 하루를 보내야 할까? 사는 게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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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순이에서 참 마음에 들었던 대사가 있다. 바로 

심장이 아주 많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라는 말.  

한 때 아니 지금까지도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서른 조금 넘는 시간동안 겪었던 일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참 불행하고 역겹고, 그래서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의 상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난 가슴이 딱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졌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도 하등의 마음의 상채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내 말을 듣고 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독설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스스로 되어갔던 건가 보다. 

그렇게 서서히, 좋게 말하면 참으로 이성적인, 나쁘게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그런 목적이 아니었지만, 과거를 추억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외려 일부러 타인의 감정, 나의 감정을 읽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처참한 인간이라고 할까? 나는 그런 괴물이 되어버렸다.

늘, 인간은 외로운 거야, 혼자 태어나고 혼자 떠나고, 죽을 때도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외로움, 그건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니 유한한 생명을 지닌 유기체로 태어난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거지, 그렇게 스스로 체념하고, 스스로 단념하고 살았다. 어쩌면 난 스스로 외로움을 찾아다녔던 건지 모르겠다. 나에게 인간들은 스트레스만 던져주는 쓰잘데기 없는 생명체 뿐이라고 잘난 척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같이 사는 사람들이 서서히 결혼을 하고, 결혼할 준비를 하는 걸 보면서 이 집에 나와 엄마밖에 남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니, 외로움이란 건 이런 거구나 를 생각하게 되었다. 서서히 내 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주 급작스럽게 그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 게 외로움이라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 거다.  

어쩌면 나는 고독하다고 아니, 고독은 인간의 태생적 운명이라고 유식한 척 한, 아주 뜨거운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사랑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 애정결핍이 아니라 나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주었던 옆의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던 고집불통 꼬마 아이였구나 라고 말이다.  

내 곁에는 항상 나를 생각하고 나를 아껴주었던 날 아주 많이 사랑한 사람들이 항상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애정결핍이네 인생은 외로운 거네 라며, 쇼를 하고 있었던 거란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참  슬프다. 정말 외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 같아서,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 방에 혼자 울고 있어도 아무도 내 곁에 없으리란 심각한 외로움이 내 앞날에 창창히 펼쳐진 거 같아, 무섭다. 정말 무섭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정말 유치한 인간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항상 날 염려해준 사람이 항상 내 눈 앞에 내 등 뒤에 있었는데, 그 소중한 사람들을 그동안 못 보고 살았다니, 나는 참 유치한 꼬마였다. 난 어른이 되어서도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이었던 거다. 미안하다, 그 사람들한테,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항상 내가 눈을 돌리면 내 옆에 언제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럴 수 없겠지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알아보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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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장 사계절 1318 문고 49
최나미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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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발랄할 중학생, 이 책은 그 중학생 때의 아련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서는 중학생 졸업식, 알몸 졸업식이라는 헤드라인이 나온다. 참 정말, 지금의 중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교과부에서는 알몸 졸업식을 학교폭력으로 치부해 정밀 조사를 벌인다 한다.  

하지만 알몸 졸업식이 진정 학교폭력으로 축소해석될 수 있을까? 그들이 찢은 것, 벗은 것은 사복이 아니라 교복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 같다. 왜 중학생이,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교복을 찟기고 벗기고,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짓들을 벌였던 것일까? 그건 그들만의 놀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중학생들에게 경쟁과 승자독식만을 가르칠 뿐,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 살아있는 것,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지 못 한다.  

나만 아니면 돼, 이 말을 1박 2일에서 부르짓는 것을 본 그 날, 참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가 합창하듯 따라하는 것을 보고, 신자유주의는 마음뿐 아니라 몸도 반응하게 하는 로고스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물론 이 책에서도 왕따, 선후배간의 폭력,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주인공은 이 모든 어려움을 중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순진함으로, 풋풋함으로 이겨낸다. 그래서 읽고 난 후, 내 학창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아주 잠시동안.  

나의 학창시절은 없어도 되는, 있으나 없으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그래서 친구도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왜 그 때 이성친구를 만들지도 못했을까? 마음을 나눌만한 한 명의 친구도 만들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가끔, 하게 만드니 말이다. 나이가 든 지금에서는 설레임을 느끼게 해주는 이성도, 내 모든 고민을 그래, 그래, 또는 야, 그 정도는 괜찮아 라며 지껄여주는 친구도 만들 수가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과거는 늘 그렇듯 핏빛 추억만을 새겨준다. 물론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게 해줄까? 라는 주문을 받으면 결단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지만, 이렇게 앉아, 회상해보면, 그래도 꽤나 낭만적이었을 것만 같은, 그런 일들만이 생각나는 건, 내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과 따돌림, 매일 밤 땅이 꺼졌으면, 하늘이 무너졌으면 그런 기도를 하고 잠이 든 하루하루가 지금에 와서는 그래, 그때는 참 아름다웠지 그렇게 거짓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재준이를 남자친구로 만들었을까? 진경언니는 절로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했나? 주인공 우령이는 열매와 계속 친한 친구로 지낼까? 라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어려움, 그때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상처도 시간이 흐른 후 되짚어 보면 별 거 아닌 일로, 우령이의 가슴 속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실은 지금, 여기는 항상 어렵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나를 붙잡는 가족의 짐스러움 때문에, 현실은 항상 고달프다. 중요한 건, 이런 현실이 곧,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를 지금, 여기서 다시 생각하면, 그래, 그때가 좋았는데, 그 땐 참 아름다웠는데 하고 추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다.  

항상 현실은 추악하지만 과거는 아름답다. 그렇지 않고는 이 힘든 삶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내가 지금껏 살아있는 것도 그래도 옛날에는, 그래도 그때는 이라는 단서가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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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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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 말은 참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사람을 명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명랑은 차가운 눈물 역시 담고 있는가 보다. 혁명은 하는 사람들, 스스로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20대, 참 어리고 또 기계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20대란, 그저그런 사춘기의 연속일 뿐이었지만, 지금의 20대를 생각하면 왠지 갑갑하고 답답하고, 또 어쩔 수 없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속의 20대들은 참으로 똑똑했고, 또 깊은 우울과 명랑을 같이 가지고 있는 세대였다.  

일명 방살이로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개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똑똑하고 어여쁘겠지만, 집단적으로 보면 기존 세대들에게 한없이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일어나 목소리내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참 답답하다, 만 연신 되내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대구분으로 딱 20대라고 구분짓지 않아도 한국에는 이미 전부, 비정규직, 알바, 계약직이라는 이름의 불안정고용이 자리잡고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지 않아, 유령직으로 바꿀까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국사회는 무식하고 현실참여적이지 못하다. 비정규직이 어감이 좋지 않아 단어를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걸 진정 모르는 것일까?  

2월, 내내 사표를 쓸까? 휴직을 할까? 그런 생각으로 지냈었다. 그래서 구인사이트, 구인모집 등등도 이리저리 알아보았었다. 그런데 내 스펙이 참으로 초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구직을 하기에 내 나이가 참으로 많다는 것도 알게됐다. 아르바이트도 29세 이하가 태반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학습지 교사가 전부였다. 참으로 어디에 이력서하나 넣기도 구차한 게 바로 나란 인간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냥 견디기로 했다. 미칠 것 같았는데,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는데 그냥 또 견디기로 했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이번에 그냥 사표를 내고 말면, 어느 사회를 가든지 견디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어디를 가나, 돈 버는 건 치졸함의 정도만이 다를 뿐, 다 치사하고 더럽고 악한 인간들의 무리에 속한다는 것이니 그냥 참으라고 말이다. 참는다는 건 어떤 걸까? 굽신대고 아부하고, 뒤에서 다른 사람들 욕하고, 또 그 사람들이 내 욕하는 걸 전해전해 들으면서 내 속의 명랑함과 처절함을 잊고 사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20대에게 구직은 어떤 의미일까? 아니 20대가 아니라, 많은 실업자들에게 직장은 어떤 의미일까? 이미 종신고용은 없어졌고, 경쟁과 나 하나만 잘 되면 돼, 라는 언표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지금.  

내 목표는 빵집을 하는 것이다. 자영업,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은 극히 일부분만 제외하고는 잠재적 실업자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도 나는 빵집을 하고 싶다. 그건 내가 아직 실업의 공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을 많이 벌면 꼭, 해야지 하는, 이 더럽고 못된 인간들에게 보란 듯이 사표를 던지고 나와서 말이다. 하지만 정작 더러운 건 직장동료가 아니라, 이 사회라는 걸 무식한 내가 모르는 것일 뿐일까? 

그래서 행복할 거 같지 않다. 지금도 미래도 아니 과거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게 꼭 고용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내 나이 서른 둘에 생각해보는 지금의 나와, 먼 미래의 나는 그리 행복할 거 같지 않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그런 당위적 목소리가 아니다. 6.2 지방선거에 진보정당이 이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너무도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매일매일의 밥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라, 지역에서부터 시작하는 공동체에 참여하라, 그리고 실천해라라는 말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탓이다. 나만해도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활비에 보험료에 쌀값에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냥 죽어지내는 1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건 내가 자폐적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 더 긍정적이었으면 나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책은 내 도피처다. 현실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해방구이면서, 천국인 것이다. 책속에서나마 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지금의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야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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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 장애.장애 문제.장애인 운동의 사회적 이해
김도현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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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서드 비니어즈 섬은 유전학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비율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게 나타나는 사회다. 그래서였을까? 그 섬에서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차별이나 아니 구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섬 사람들은 모두, 수화를 모국어처럼 쓰기 때문이란다.   

나의 누나, 나의 사촌, 나의 외할머니 그 중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수화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 모국어처럼 배워야 했다. 그래서 수시간이 지난 후, OO 사람에 대해 물으면, 그는 부자였고, 우리집 옆에 살았고, 자전거를 잘 타고 다녔어요, 라고 대답하지, 그는 청각장애인이었어요, 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은 그냥 사람이다. 특별한 상황, 조건에서만 장애인은 장애인이 된다, 사실 장애라는 정의도 모호하다. 손상, 불능, 사회적 분리 등 그 외연이 참으로 넓다. 그런 면에서 장애는 쉽게 진보적인 운동과도 손잡을 수 있다.  

저자는 장애인 운동이 장애라는 틀을 넘어, 반자본적 운동과 연합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보도되는 장애인 시설의 비리, 성폭행, 감금에 대해, 나는, 윽 그런 일이 있었어, 참 사람들은 악해, 라고만 치부하고 말았다. 또 주위의 시각장애인이나, 정신지체 장애인을 마뜩치 않게 쳐다보기도 하였다. 설마 내 일이겠어? 내 주위에는 저런(?) 사람들은 없어, 라고 타자와 구분되는 '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사회에는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그 타자들이 있기에 누구는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타자에는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타자의 존재들은 자꾸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타자를 자꾸 만들어내고 그 타자를 나와는 다른, 그것이 시혜의존재가 되었든, 역겨움의 존재가 되었던, 구분짓는 사고는, 점점 더 주체로서의  '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타자, 타인들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장애, 나는 장애를 모른다. 아니 내가 여성임에도 여성을 잘 모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타자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점점 더 모르게 만들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많아,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어, 라는 공포감이 점점 더 타자들을 분리시키는 몸짓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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