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 장애.장애 문제.장애인 운동의 사회적 이해
김도현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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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서드 비니어즈 섬은 유전학적으로 청각장애인이 비율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게 나타나는 사회다. 그래서였을까? 그 섬에서는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차별이나 아니 구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섬 사람들은 모두, 수화를 모국어처럼 쓰기 때문이란다.   

나의 누나, 나의 사촌, 나의 외할머니 그 중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수화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 모국어처럼 배워야 했다. 그래서 수시간이 지난 후, OO 사람에 대해 물으면, 그는 부자였고, 우리집 옆에 살았고, 자전거를 잘 타고 다녔어요, 라고 대답하지, 그는 청각장애인이었어요, 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은 그냥 사람이다. 특별한 상황, 조건에서만 장애인은 장애인이 된다, 사실 장애라는 정의도 모호하다. 손상, 불능, 사회적 분리 등 그 외연이 참으로 넓다. 그런 면에서 장애는 쉽게 진보적인 운동과도 손잡을 수 있다.  

저자는 장애인 운동이 장애라는 틀을 넘어, 반자본적 운동과 연합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고도 하였다.  

사실, 텔레비전에서 보도되는 장애인 시설의 비리, 성폭행, 감금에 대해, 나는, 윽 그런 일이 있었어, 참 사람들은 악해, 라고만 치부하고 말았다. 또 주위의 시각장애인이나, 정신지체 장애인을 마뜩치 않게 쳐다보기도 하였다. 설마 내 일이겠어? 내 주위에는 저런(?) 사람들은 없어, 라고 타자와 구분되는 '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사회에는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그 타자들이 있기에 누구는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타자에는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타자의 존재들은 자꾸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타자를 자꾸 만들어내고 그 타자를 나와는 다른, 그것이 시혜의존재가 되었든, 역겨움의 존재가 되었던, 구분짓는 사고는, 점점 더 주체로서의  '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타자, 타인들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장애, 나는 장애를 모른다. 아니 내가 여성임에도 여성을 잘 모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타자를 만들어내고, 그들을 점점 더 모르게 만들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많아,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어, 라는 공포감이 점점 더 타자들을 분리시키는 몸짓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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