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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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염전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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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밝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그러나 킥킥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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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선물이다. 선물은 거래가 아니다. 되돌려 받고자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행하는 상호작용이다. 선물을주고받는 문화는 지구상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내려왔다. 선물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주는지이해하는 것은 린치핀이 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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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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