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 IVP 모던 클래식스 14
엘리자베스 오코너 지음, 전의우 옮김 / IVP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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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정한 교회란 어떤 모습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란 어떤 형태여야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해보았을만한 질문들이다. 반면에 이런 질문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날의 교회들이 그런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통렬한 현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가나안 성도가 백만을 넘어 이백만을 향해 나아간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교회에 실망을 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고,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떠나는 이들도 너무나 많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에 목말라하고, 말씀에 굶주려있으며, 공동체에서 회복되길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 교회가 좋아요? 어느 목사님 말씀이 좋은가요? 괜찮은 곳 있으면 얘기 좀 해주세요. 이러한 이야기들도 종종 들린다. 그만큼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를 찾기가 힘든 시대라는 뜻이다. 슬픈 이 시대의 자화상이 아닐수가 없다. 


물론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 많은 대안교회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계속 새로운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목사들이 어떻게 하면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으며, 많은 신학생들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많은 실험을 해보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좌초되어 가는 배를 일으켜 세울만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듯 싶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혁신적인 교회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독특한 교회이다. 70여년 동안 150명을 넘겨본 적이 없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 소속된 일원이라면 다양한 훈련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서약을 해야하며, 각종 사역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야 한다. 물론 강제는 없다. 자신이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도 있으며, 나가더라도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엘리트적이고, 어떻게 보면 가혹하기까지 해보이는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세이비어 교회의 일원으로 들어가길 원하고 있는 것일까?


세이비어 교회의 철학은 어쩌면 지극히 간단하다. 내면이 안정되지 않고는 외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없고, 또한 외적인 행동 없이는 내면이 안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내적 여정과 외적 여정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과의 건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각각의 성도들은 스스로의 소명을 찾아 나갈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세이비어 교회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벌써 한국교회에서 가장 부족한 바로 그 점이 보인다. 내적인 여정을 떠나는 교회를 찾기 힘들고, 설사 그런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지도자의 깊이가 심히 부족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치중하고 덩치를 키워서 그럴듯하게 보이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찬양을 크게 부르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매일 쉬지 않고 큐티를 하며, 헌금을 성실히 하는 것이 오늘날 믿음 좋은 성도의 척도인 현실이 아니던가?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들조차도 교회 건물이 크지 않으면, 성도수가 적으면, 헌금 액수가 적으면 괜히 다른데 가서 위축되기 마련인 것이 오늘날 목사들의 자화상 아니던가? 


이렇게 정량적으로만 평가되고 내면을 어떻게 해야되는지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며, 오랜 시간에 걸친 경험도 전무한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영성을 이야기하지만 무엇이 영성인지는 모두의 말이 다르다. 말 그대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고 있는 격인데 그곳에서 무슨 열매가 맺힐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현실에서 세이비어 교회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화두를 준다. 세이비어 교회에서는 이러한 내면의 여정을 자신과의 소통, 하나님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라는 세가지 주제로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보고 마주하며 화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찾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이 빚어주신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고, 화해하지 못했던 것들과 화해하며, 척지고 있었던 내 자신과 다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그때서야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그리스도인들은 소명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 소명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세이비어 교회의 철학이고, 모두가 이 관점을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적어도 미션이 있고 비전이 있다면 그것을 구체화해서 무언가 과정을 만들어 낼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뭐든지 은혜로만 이루어지고 뭐든지 기도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그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정적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이비어교회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관점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심리학적인 지식도 활용되고, 카톨릭 교회에서 활용되는 여러 기도들도 활용된다. 우스펜스키와 구르지예프 같은 신비가들의 이야기들도 종종 보인다. 이 책이 나온 때가 1968년이니 당시 유행하던 사상적 흐름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제거하고, 응용할 수 있는 부분은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자세는 오늘날에도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다. 오늘날 4차 산업 혁명으로 천지개벽수준의 기술진보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들은 이것을 어떻게 성도들의 유익에 활용할 수 있을지 열린 자세로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한다. 사도 바울도 편지를 보낼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친절한 비유와 이야기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이런 토대를 쌓은 공동체라야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이비어 교회는 150명의 인원으로 220억원 규모의 사역을 하고 있는 강력한 교회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세이비어 교회가 어떻게 수많은 사역을 감당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떻게 소명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 소명을 향해 움직이는가?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공동체간의 유대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세이비어 교회의 사례들은 그 모든 일들이 어느날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각각의 지체들이 모두 함께 고민하고, 모두 함께 소통하며, 모두가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 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때, 그때 사역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이 없으면 아무리 인원이 많아도, 아무리 재원이 풍부해도 사역은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2011년 한국을 방문한 세이비어 공동체의 앤 딘 목사는 한국 목사들이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 주소일 것이다. 사역이란 기본적으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지표들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달리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뭐가 근본적인 문제인지 한번 고민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하지 않는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해서 문제인 것은 아닐까? 오히려 지금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할 때인건 아닐까?


언젠가 나도 좋은 교회를 찾고 싶어서 다양한 교회들을 찾아 다닌 적이 있었다. 그 와중에 배운 것도 많았고, 실망한 적도 많았고, 안타까웠던 적도 많았다. 좋은 목사들도 만날 수 있었고, 좋은 목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목사들도 만날 수 있었다. 실망스러운 목사들도, 그런 교회도 너무나 많은 현실이지만, 오늘날 낯을 들 수가 없는 추태가 계속 반복되고, 개신교가 개독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현실이지만, 미래를 향한 새싹들은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 한국스타일의 세이비어 교회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 책이었다. 나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기꺼이 그 일원이 되고 싶은 교회, 그런 교회가 태동하는 시기. 그런 시기가 바로 지금의 시기라고, 그렇게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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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스 4집 : 부치지 않은 편지 페이지스
익명의 발신인 82명 지음 / 77page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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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쓴다. 

받는 이는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때 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말들이 있다.


일렁이는 감정들을 잡아챈다.

떠도는 상념들을 붙들어 맨다.

손가락 끝, 펜 끝에 묶어맨 자락들이

하나하나 글씨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편지를 쓴다.

가족에게, 지인에게, 친구에게,

스쳐지나간 인연에게, 이루지 못한 사랑에게,

존경하는 누군가에게, 미래의 내 자신에게,

소중했던 어떤 존재에게,


한줄한줄 엮어낸 글자락들이

모여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쁘다.

때로는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는 아련함이 있다.

때로는 비탄에 잠겨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안개 속에 흐릿한 기억의 자취들을 

잊지 않기 위해,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종이파레트에 옮겨 담는다.


나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당신을 위한 이야기도 하다.

또는 이 글을 덧대고 있는 나같이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부지지 않은 편지가 제목인 것은

아마도 이야기를 완성하고 나서

주욱 읽어보며 크게 웃고 크게 울다가

조용히 서랍속에 다시 넣어놓는 것으로

이 책이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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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 상실의 아픔을 겪은 어느 크리스천의 정직한 고백, 개정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박혜경 옮김 / 좋은씨앗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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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스토프 씨, 에릭이 죽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수기. 누가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자식이 부모를 앞서 먼저 죽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내 아들을, 내 미래를, 내 후손 가운데 하나를 땅에 묻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나를 묻어야 할 사람인데...


아버지의 눈에서 방울진 눈물이 터져 나온다. 폭포같은 생각들이 머리를 휘감는다. 사랑의 대상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된다. 



우리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두번 다시는' 이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남은 삶 전체를 에릭 없이 살아내야 한다.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그의 죽음 때문에 겪는 고통을 멈추게 할 것이다. 


돌아온 모든 삶에 그 기억이 묻어있다. 나의 집에, 나의 방에, 나의 책상에. 나의 몸과 나의 마음에 나의 모든 것에서 그 흔적이 느껴진다. 그 흔적마다 눈물이고, 흔적마다 고통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삶에는 고통 이상의 것도 있다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나는 기쁨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에릭이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고 섣부른 위로를 하는 사람도 있다. 충분히 슬퍼하고 애통하고 나면 다시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지리라고 조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상처는 아물지 모르지만, 상처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 상처는 이제 나와 함께 가야한다. 



나는 내 삶을 회복하기 위해 너무나 힘겨운 투쟁을 하여야 하기에 당신에게 손을 내밀 겨를이 없다. 그 점에서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애통에 잠기지 않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 둘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합시다" 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 그때가 그들에게는 행복한 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가고, 수많은 부모들이 자녀들 잃었던 그 날, 많은 상담사들이 그들을 위로하러 갔었다. 그러나 그들을 위로한 것은 상담사의 따뜻한 말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남을 위해 기꺼이 달려와 그들을 돕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울어주었던 수많은 봉사자들이었다. '함께' 라는 단어에는 정말로 큰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후회와 더불어 살리라. 후회를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서 내 자신에게 입힌 상처 중 하나로 남겨두리라. 그러나 나는 그 후회를 영원히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회를 기억해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욱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것이다. 


'함께' 일 수 있기에 '홀로'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가슴을 저미는 기억의 흔적들, 말하지 못했던 것들, 해주지 못했던 것들, 그 모든 후회들. 그 후회들도 결국 나의 일부이고, 마주보아야할 내 자신이다. 그 후회를 통해 나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지나온 과거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다가올 미래를 보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세상의 상처에 마음을 열어라. 인류의 애통함에 함께 애통해하고, 인류의 통곡에 함께 통곡하고, 인류의 상처에 함께 아파하고, 인류의 고뇌에 함께 고민하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라. 곧 평안의 날이 다가오지 않는가!'


누군가가 내밀어준 손을 잡고 일어난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의 패배를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애쓰리라. 나의 삶 가운데 내 아들의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되지 않도록 하리라. 그러나 내가 일어날지라도 내 아들의 죽음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을것이다. 나의 부활이 그 상처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 상처는 나의 흔적이 되었다. 누구든지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나의 삶 가운데 내 아들의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되지 않도록 하리라' 남은 자가 먼저 간 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언제쯤 에릭의 말을 듣게 될까? '아빠, 다녀왔습니다' 라는 말을 정말 들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내가 만들었고, 내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자도 바로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좋습니다. 이제 안녕 에릭, 안녕,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소망의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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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데이터 - 빅데이터도 말하지 못하는 고객행동에 관한 놀라운 진실
마틴 린드스트롬 지음, 최원식 옮김 / 로드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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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책이다. 스몰데이터라는 제목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빅데이터는 들어봤는데 스몰데이터는 또 무엇인가? 그새 또 새로 배워야할게 늘어났나? 벌써 골이 아파진다. 책장을 열어보자.


저자가 말하고 있는 스몰 데이터란 일상 속의 작은 자취들에서 나타나는 숨겨진 욕망의 흔적들이다. 이런 스몰데이터를 찾기 위해서 저자는 10대 소녀들의 옷장을 살펴보고, 냉장고에 뭐가 붙어있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며, 소년들의 신발사이즈가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가정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과는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가? 그들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피하고자 하는 하는 근원적인 불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저자의 일이다. 저자는 자신의 선입관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 전혀 낯선 곳으로 자신을 던지고, 1년에 300일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호흡과 시야를 타겟 고객층과 맞춘다. 이것을 저자는 스몰데이터 마이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저자를 세계적인 브랜드 기획자로 만들어준 비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다양한 사례들이 나온다. 모든 데이터가 이제는 몰락한다고 예측했던 레고를 새로운 트렌드로 부활시킨 사례부터 시작한다. 소년들은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고 싶었고,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레고는 그 니즈에 충실히 부응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냈다. 쇼핑몰을 만들기 위해서 그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분석하고 그들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 단서들을 토대로 고객들이 원하는 바로 그 장소를 구현해낸다. 시리얼을 디자인하기 위해 고부관계를 관찰하고 그들의 시야과 관계,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고 들여다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니즈를 조합하는 핵심은 키라고 판단하고 키에 맞춘 디자인을 고안한다. 다이어트 상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건 팔찌 하나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맥주의 디자인에는 무엇이 들어가야하는지를 고찰한다. 소녀들의 옷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꿈꾸는 옷장으로 매장을 변화시킨다.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셜록 홈즈가 아주 작은 단서들로 범인을 유추해내는 것처럼, 저자는 일상속의 작은 단서들을 조합해서 고객의 근원적인 니즈를 파악해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고객의 모든 경험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자 한다. 그 치밀한 전개가 가감없이 책에서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또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아야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고객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작업이 필요한지도. 하지만 그 효과만큼은 절대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브랜드를 부활시킨 저자의 이력으로 증명되는 바이다. 친절하게도 마지막 파트에 자신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7C라는 프레임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거대 플랫폼이 모든 걸 지배하는 요즘, 모두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고객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 데이터를 통해서 모든것을 예측하는 요즘에 인간의 직관이나 상상은 이제 구시대적 발상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제 모든것은 데이터를 통해서만 검증되어야 하고 데이터를 통해서 증명되어야하며, 데이터를 통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 수많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은 오늘도 로데이터를 가공하고 있으며, 마케터들은 컴퓨터 화면의 대시보드를 바라보고 있고, 대표들은 보고서의 수많은 지표들을 분석하며 생각에 잠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잠깐. 무언가를 놓치고 있진 않아?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 상품을 만든다는 것. 어찌 되었건 사람에게 무언가 가치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가장 중심이 되어야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왜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지?


물론 저자도 빅데이터의 유용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한계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빅데이터란 근본적으로 상관성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것만으로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인과성을 찾을 수만 있다면 빅데이터로 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허무하게 가버린 이후 더 이상 인간의 직관력, 상상력은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 하다. 이런 시기에 이 책은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잡스같은 천재에게만 허용된 보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화는 어쩌면 너무나도 작은 곳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 바로 스몰 데이터이다. 



모든 사례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놓치게 된 것은 바로 잠재적 욕망이었다.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파악하게 되면 새로운 제품이나 브랜드, 신규 비즈니스로 실현될 수 있는 격차를 해소하는 데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균형에서 벗어나 있고 어떤 경우는 과장되어 있으며, 그 과장 속에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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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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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데 일단 이 책의 내용은 유튜브와 별로 상관이 없다. 영상매체가 기존의 문자매체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 논하는 파트가 부분부분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논제의 메인을 형성하진 않는다. 그냥 다른 주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 잠깐 지나가는 징검다리 수준의 논의이다. 나아가 이 책의 주제는 문해'력'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저자들은 문해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듯 하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논하는 주제는 문해라는 개념의 정체성에 대한 것에 가깝다. 문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삶의 리터러시라는 개념으로 표현해낸다. 상당히 철학적인 담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일단 제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도 책의 가치를 깎는 요소이지만 내용도 그리 접근성이 좋지 못하다. 이런 류의 책을 읽다보면 대중교양서와 학술서의 경계를 미묘하게 왔다갔다 하는데 그 중간에서 균형을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대중교양서라 하기에는 기반지식이 필요한 학술용어나 인용이 너무 많고, 학술서라 하기에는 개념의 정의나 논증의 정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자료의 출전도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 많아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불친절한 책인지라 어느 쪽도 만족시키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대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점에도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단 저자들의 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수들의 현란한 초식이 부딪히는 비무를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두 사람의 춤사위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연무를 보는 느낌도 없다. 오히려 논의의 흐름이 자꾸 끊어져서 갑자기 이 사람이 이 얘기를 왜 하나 이런 생각을 들때가 많았다. 한참을 앞장을 다시 읽어봐도 도무지 맥락을 이해할수 없다면 그 책임이 독자에게만 있진 않을 듯 싶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주체성, 문화권력, 타자성 등에 대해 주로 논하곤 하는데 그런 저자들도 자신들의 경험, 지식, 세계관으로 인식되는 타자들을 특정 가치관으로 재단, 판단, 환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사고를 비판하고 이를 지양해야하는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 본인도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저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전반적인 내용 자체는 한번 읽어볼만한 내용이긴 하다. 특히 오늘날같이 지식을 축적하기 쉬워짐에 따라 지식의 권력과 학문적 권위가 해체되고 있는 시대에는 한번쯤 생각해볼 내용들이 많다. 사람들간의 관계와 관계에 있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도달해야하고, 이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다름과 무지를 인정함으로 시작되며, 이것이 문자가 인류에게 주는 가치라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은 틀림없이 유익한 내용이다.

디지털 혁명을 지나 제 4차산업혁명기로 진입하는 요즈음 사람들의 문자해독능력은 큰 전환을 맞고 있다. 일찍이 다치바나 다카시는 문자매체는 영상매체로 대체되리라 예상한 바 있는데 그 논거는 효율성이었다. 다카시가 언급한 영상매체는 dvd로 된 다큐멘터리였는데 그거 하나 보는 것이 책 몇권 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DVD를 넘어 실시간 스트리밍의 시대로 진입했고, 그에 따라 다카시도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응답하는 담론의 형성은 기술발전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이 이 책에 기대를 하게 된 연유인데 내용은 다소 기대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새벽에 쓸데없이 비판적인 리뷰를 길게 남기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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