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를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방금 전에 부서장님이 말을 건낸 것 같은 경우다.
점심먹고 들어와 업무 전까지 알라딘 서점에 들어와 책 구경도 하고 다른 사람이 적은 페이퍼도 읽고 있었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그걸 본 부서장님이 나에게 "오, 역시 달라" 라고 하시는 거다.
책읽는 취미에 대해 사회는 곧잘 관대하고 높은 평가를 해주는데,
그 덕분에 그 말을 듣는 나는 괜히 뿌듯하다가 민망하다가 한다.
사실 나의 책읽기는 재미를 위한 취미생활, 그 이상이 아니다.
말하자면 주말에 영화를 보는 거나 맛집을 찾아가 밥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책읽는 취미는 유달리 사람을 달라보이게(?) 하고 높게 쳐준다.
만약 부서장님이 지나갈 때에 영화 사이트에서 티켓 예매를 하고 있었다거나,
새로 등록된 웹툰을 보고 있었다면 그 '역시 다르네'라는 멘트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독서는 참으로 훌륭한 취미야.
독서를 취미로 들이기 시작한 건 입사하고 1~2년 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고, 내가 늘 똑같은게 지겹고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취미는 들이기 어려워 책을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던 거 같다.
처음에는 책의 권수를 정해놓고 읽었다.1년에 50권을 읽겠어! 라고 마음먹었고, 읽은 책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12월 말에는 남은 권수를 채우겠다고 책을 몰아쳐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결국 정한 숫자를 채웠을 때의 그 기분이 상당히 상쾌했다. (하지만 다음 해부터는 1년에 몇권읽기 같은 목표는 잡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돈을 벌기 시작했으므로 원하는 책을 빌리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됐고,
옷 쇼핑하듯 책들을 슥슥 골라서 여러권 사서 읽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소설(특히 동시대의 한국소설)과 에세이고,
전공인 경제학이나 사회서적은 맞지 않구나 알게 되었다.
나와 맞지 않는 책은 다 읽지 못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안 읽어서 혼날 일도 없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좋아하는 소설과 에세이만 읽기로 했다..라기 보다는 그런 책만 손에 잡혔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책을 편식하면서부터 정말 책읽기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전까지는 일말의 위화감 - 읽어야 될 것 같은 책들을 읽어야지, 좋아하는 책만 읽으면 어떡해 - 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책이 나의 취향과 상관없더라도 읽어야할 책이기 때문에 읽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전공과 관련된 책 또는 역사, 여성 같은 나에게 다소 어려운 사회학 책,
회사 들어와서는 자기계발서 및 기타 경제 관련된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들 하여 피망먹는 짱구마냥 책을 읽었다.
편식에 관한 말하고 나니, 빨간책방의 흑임자, 김중혁 씨가 쓴 글이 생각난다.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서라운드로 중혁님의 어눌하고 매력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식당에서 나의 동지들이 핍박받는 걸 자주 본다. 어머니들이 협박한다. "너 왜 편식을 해. 당근을 왜 남겨. 얼른 다 먹어. 네가 시킨 거니까 끝까지 다 먹어야지" 도와주고 싶다. 동지들을 돕고 싶다. 하지만 지나가는 마흔한 살 동네 아저씨로서 "얘야. 당근 같은거 남겨도 상관없어. 먹기 싫으면 먹지마라." 라고 얘기하긴 좀 그렇다. 그랬다간 이런 소리 듣겠지 "누구신데 남의 애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거예요?" 저로 말할 거 같으면 국내 편식주의자연맹의 회장이자. 아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겠죠. (생략) 시작했으면 끈기를 가지고 이뤄내라. 아 좋은 말이다. 그래야지. 선택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시작했으면 이뤄야지. (생략) 살다보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배우고 싶다가도, 막상 시작해보니 아, 이게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구나.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흥미가 떨어졌는데 계속 배우는 건 시간낭비다.(p305-306)
아이들에게는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 많이 실패하고, 더 자주 포기하고,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더 많이 시도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이 산이 아닌가 봐요, 싶으면 얼른 내려와서 또 다른 산을 찾아갈 수 잇는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게 무너지, 정말 재미있는게 뭔지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당근 같은 건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다. (생략)
요즘 미나리와 고등어를 먹으면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아 이렇게 맛있는 걸 그땐 왜 안 먹었을까. 이제라도 그 맛을 깨달았으니 마음껏 즐기며 많이 편식해야지. 어린 시절의 편식과 요즘의 편식을 합해보면 제법 균형이 맞는 식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p307-308)
그래, 이런 점에서 나의 책 편식도 정당하다.
편식한 덕분에 자칫 놓칠 뻔했던, 책읽기라는 훌륭한 취미생활도 가질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누가 아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토록 못 읽겠던 인문학, 사회학 서적들이 좋아질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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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추웠다. 다리가 두꺼워서 기모스타킹을 신었다가는 도심 속 코끼리로 보일까봐,
꽤 두껍고 따숩다는 100데이아 타이즈를 신었는데 추웠다. 가만 있다가도 으아 추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난 추운게 참 싫고, 눈을 좋아하지 않고, 눈이나 얼음 위에서 하는 스키나 보드도 할 줄 몰라서
겨울은 대체 왜 있는 거야? 라며 자주 투덜댄다.
그나마 발견한 겨울의 효용 중 한가지는, 발라드나 재즈를 듣기 좋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귤 먹는 거구.
난 주로 담백한 노래 (예를들어 가을방학 같은)를 듣는데, 겨울이 오면 약간은 끈적하고
목소리나 음악의 높낮이가 다양한, 혹은 밀도 높은 음악을 듣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발 동동 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노래가 들렸다.
왠지 모르지만 핸드폰 가게는 노상 거리에 대고 노래를 틀어대는데(핸드폰이 아니라 스피커를 팔겠다는 걸까?)
노래 중 어느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한번은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가수가 누군지도 제목이 뭔지도 짐작이 안 가서.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하고 가사를 외웠다. 그 자리에서 검색하고 싶었지만 손이 시려워서ㅠ
근데 고작 10분 버스 타고 가는 동안 가사를 다 까먹었다.ㅠㅠㅠㅠ
기억나는 건, '알잖아', '사랑해' 라는 두 단어 뿐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인터넷의 힘은 위대하니까!
그리고 결국 찾아냈다. 으하하.
그 노래는 나윤권의 <기대> 였다.
알잖아~~~ 할 때의 그 바이브레이션에 따라 내 마음도 울렁울렁한다.
그리고 검색질 중에 '사랑해' 와 '알잖아' 라는 가사를 가진 다른 노래도 알게 되었는데,
이 노래가 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