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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랑 - 김충선과 히데요시
이주호 지음 / 틀을깨는생각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히로는 문득 깨달았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힘이 없어 이렇게 침략 당하고 있지만 이들은 힘이 없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보다 강한 자들이었다. 누구보다 강한 백성들 위에 누구보다 비겁하고 위선적인 정치가들이 있어 이리도 비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것 뿐이었다. 이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을의 모두가 죽어야 멈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히로의 부대가 이긴 것일까. 전쟁도 그랬다. 그렇게 조선의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면 전쟁에서 이긴 것일까." (259쪽)
1592년 임진왜란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그의 진영, 부하들, 연전 연승했던 전투, 그 때 그 날의 순간은 역사 속에서 살아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생생히 그 날들은 되살아 나온다. 그 임진왜란 속에서, 이제는 이 소설을 읽은 후이니 빼 놓고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은 한 사람이 또 있었다. 등장인물 히로, 역사 속에서도 아주 짧게나마 등장하는 사야가, 김충선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이다.
가토 기요마사 군의 선봉장으로 조선을 향해 바다를 건넜던 그가 돌연 항왜로 돌아섰다.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어떻게, 무슨 이유로 그는 일본을 배신했을까. 그리고 조선을 위해 전투를 했다니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회자되기에는 조심스러운 이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작가의 소설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덕분에 일본 쪽 시선으로 임진왜란을 바라 보게도 되었다. 전쟁 발발전의 일본 상황이 눈에 보이듯 전개되어 나간 까닭이다. 일본 열도는 전국 시대의 크고 작은 전투들, 가문을 뺐고 무너뜨리는 혼돈의 중심 그 자체였다. 일본 역사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로서는 그 혼돈 스런 상태의 많은 인물들이 지나갈 때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언젠가 스쳐 보듯 지나간 일본 영화 <란>을 떠올리게도 했다. 그 많은 이름들 중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등장한다.
히로는 이런 시대 속에서 전쟁 용병으로 성장하는 소년이었다. 부모도 모르고, 집도 절도 없는 천애 고아인 히로는 붉은 돌 부대의 조총 부대원이었다. 함께 자란 아츠카 라는 소녀도 히로의 인생에서 빼 놓을 수가 없다. 히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동시에 이 소설 속에서 아름다움과 감동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안목이 남달랐다. 머리 속에서는 늘 질문이 따라다녔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몰두하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소년이었다. 이런 점이 오다와 히데요시같은 거물의 눈길을 끌었고 히로의 조총 연구는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히데요시에게는 히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였고, 무엇이든 가지기를 원했던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림의 떡과 같은 존재가 바로 히로였다.
"시대가 그랬다. 부모자식간에도 숱한 반목과 배신이 벌어졌다. 피범벅이 되어 돌아온 남편, 자식과 아버지의 잘린 머리를 씻기고 머리 빗기는 여인의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시대였다." (127쪽)
그랬다. 뛰어난 재주와 머리를 가졌지만 지독히도 불운했던 히로는 이런 전쟁의 시대에서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리고 살고 싶었다. 조선을 향해 무고한 목숨을 빼앗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랬었기에 항왜가 될 충분한 이유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많았다. 목표물을 조준하고 댓포(조총)에 화약을 당기며 기회를 엿볼때에는 묘한 긴장감으로 글을 읽어내려 가게 했고, 물에 첨벙 뛰어 들며 달아날 적에도 이미지가 자연히 그려지게 하는 문장들 이었다. 긴박했던 그 양만큼 다급해지는 마음은 더욱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지며 닿아왔다.
물론 감동 포인트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독자라면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구절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히로 그 자신만의 고군분투하는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그 삶이 역사 속에서 단 한 줄의 짧은 글로 나타났다손 치더라도 결코 간과해 버리고 말 이름도,이야기도 아닌 것으로, 그를 재발견하는 계기도 되어 줄 것 같다.
김충선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과 히데요시라는 이름과는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이름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