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여. 안 보인다고. 안경을 썼는데도 보이지가 않아. 도무지 보이지 않아. 깨어날 수 없어, 눈구멍을 열 수가 없다고.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어.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깨어나. 이미 무언가 달라진 내 안의 그것, 이미 사라져 버린 그것을 다시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계속해서 그것을 깨워 보려고, 눈을 뜨게 해 보려고. 눈은 바로 거기 있어. 이 병실 안에 눈이 있다고. 여기는 진짜 병실이고. 눈은 몸 안에, 침대 위에, 병실 안에 있다고. 난 눈을 뜨고 싶은데. 내 눈은 더는 그런 것이 아니야. 눈이 아니지. 눈아, 나는 네가 보이는데. 볼 수가 없네. - P83

청중을 보고 싶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보이나요? 안 보여요? 이렇게 와주다니 정말 친절하시네요. 알파벳을 원해. A, B, C, D,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낱말도 보고 싶어. 케적 그리고 석회석, 또, 라이스 푸딩, 매시 포테이토, <왈가닥 루시>, 제임스 조이스 Jane Joyce, 펜타마민pentamamine, 급수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것들을 원하고, 짜증이 날 만큼 시끄러운 새들, 아일랜드의 비, 아일랜드 모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 초록빛이 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테리!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널 만지고 싶어, 겨울이면 거칠어지는 네 살결을 느끼고 싶어, 내 친구들을 보고 싶어, 깨어 나고 싶어. 깨어나고 싶어. 정말이지 깨고 싶어······. (그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 폴, 계속 헤엄쳐 나아가렴. 앞으로 곧장. 그래, 계속 나아가렴. - P85

어머니는 내게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은 주셨지만 평온함 같은 것은 주지 않으셨어. 그래서인가봐, 신비와 익명성, 연기와 진심, 경외와 사랑 사이에서 나는 늘 길을 잃고 말아. - P87

모정 결핍mother hunger은 병이 아니라 부상이라고들 한다. 상처. 가장 중심부에 난 구멍. 어머니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게 젖을 물려줄 어머니의 가슴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담배 연기를 마셨다. 나는 그가 내게 하는 짓을 막아줄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공범이 되었다.
나는 출생과 동시에 실종되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사라진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단어는 내게 숲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여는, 어머니의 암호를 해독하는 빵 조각들. - P93

그리고 물론 술과 마약은 내 몸에서, 고통의 근원에서 나를 멀리멀리 데려가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나 자신에게서도 떨어뜨려 놓았다. 그만둬, 싫어, 너는 누구지, 나는 정말 원하지 않아, 부탁이야 그만해 같은 말 들로부터도. 동의와 선택권들로부터도. 내 몸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물건이 되어버렸다. 다치고 슬픈 것, 두들겨 맞고 후려쳐지고 유린당하고 빼앗기고 강간당한 그런 것. 내 몸뚱어리는 공공재산이 되었다. 그의 사유물이던 것이 이제는 그들의 사유물이 되었다. - P116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믿는다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당신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이 겪어온 일을 제대로 마주하고 진실을 따르겠다는 뜻이겠지요. 전 세계 여성 인구 3분의 1이 성폭행을 당했거나 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면 당신들 중에서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여자를 믿는 일은 당신이 겪었던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에도 손을 내미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일은 때때로 견딜 수 없이 괴로워요. 저 또한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고 저의 가해자, 아버지를 끊어내기까지 수년이 걸렸기에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태껏 전전긍긍하며 쌓아 올린 내 안락한 인생이 순식간에 전복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드러내야 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거짓 속에 사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야 저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P121

수많은 저널리스트가 이미 이 여자들의 인생을 헤집어 놓고 떠났다. 여자들은 침략당하고 빼앗기고 속은 기분이 되었다. 난민 직원들이 나를 캠프에 머물게 해 주고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때로는 내게 관심을 주었다는 사실은 영광이자 특권이었다. 나는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었으며 나 스스로를 치유자이자 문제 해결사로 여겼다. 이 미친 현실과 잔인함 그리고 상실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 절실한 통제 욕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분석적이고 해석적이며 심지어 이 전쟁 통의 잔학함 속에서 예술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 욕구는 나의 무능에서 기인했다.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있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듣지도, 느끼지도, 이 진창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지도 못하는 무능. - P134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더 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 P137

이곳의 페미사이드는 서구가 콩고에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구리, 주석, 금, 아이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콜탄 같은 광물과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말이다.
여자들은 유린당하고 가족과 공동체는 무너진다.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이자 광산 관리자인 민병대를 피해 달아난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얽혀 만든 죽음의 교차로가 이제는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 - P141

나는 판지 병원에서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여자들이 길게 줄지어 선다. 인터뷰를 하러 오는 여자들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멍하고 무감각하며 죽은 사람 같다. 여자들을 만나면서 나 는 그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았다. 바로 잊히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 기울이기만해도 그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 P150

누가 여성들을 강간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가? 어쩌면, 누가 강간하지 않는가가 더 나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범인은 인터라므웨 Interahamwe 후투족 Hutu 민병들, 콩고 군인들, 무장 민간단체, 유엔 평화유지군이다. 무퀘게 의사 그리고 나와 함께 시티 오브 조이 the City of Joy (생존자들의 피난처이자 리더십 혁신 센터)를 설립하고 9년째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판지 병원과 콩고 여성들의 열렬한 후원자인 크리스틴 슐러 데쉬베Christine Schuler Deschryver 가 말한다. "그들 모두가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어요. 마치 국가 대항전처럼요. 여자들에게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든 적이에요. 이것은 경제 전쟁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콜탄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광물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 P157

무퀘게는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 형제인 헤르만에 따르면 그는 피해 여성들을 돌보는 데 자기 삶을 온전히 바치느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그의 에너지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피로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폭력 그리고 잔학 행위를 마주하는 삶에 어쩔 수 없이 드리워지는, 그의 잠을 방해하는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를 강간하는 일은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자기 삶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 동물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들은 교미할 때 대단히 다정합니다. 인간인 남자들은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 P159

나는 고릴라 보호구역에서 파수꾼으로 일하는 한 남자를 인터뷰한다. 적군인 민병대가 공원 내 보호구역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마을 지휘관들에게 가 고릴라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승낙했다. 그러나 내가 왜 여자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지 않는지 묻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P160

"세계 온갖 단체에서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는 말을 잇는다. "그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눈물 흘리지만, 도와주겠다고 다시 오는 사람은 없어요. 카빌라 대통령 조차 여기에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영부인이 오기는 했어요. 그녀도 눈물은 흘렸지만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았고요." 무퀘게는 병원을 떠난 여자들이 최소한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가 아무리 환자들을 꿰매어 붙여 놓는다 해도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또다시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실제로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다시 온 여자들도 있었고요." - P161

나는 이 같은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 그동안 자료, 거리두기, 열정, 호소, 절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다.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시대에 걸맞은 언어가 있기는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부장제에 기반한 우리 제도는 이런 현실을 바꿀 실효성 있는 개입을 하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엔 같은 기구조차 평화유지군 스스로 강간범이 되어 문제를 확대시켰다. - P171

이는 또 나를 사랑으로,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금세기의 실패는 사랑의 실패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무엇이 우리, 그러니까 이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까?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신자유주 의적인 사랑은 아닐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이타적인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사랑. 여성과 인류를 향한 온갖 혐오스러운 범죄에 무감각해진 우리를 일깨워 결코 멈추지 않는 공동의 저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 신비를 추앙하고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사랑. 경쟁보다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 난민들을 향해 벽을 쌓고 최루 가스를 던지고 우리 해변에 떠다니는 그들의 시체를 치우는 대신 그들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사랑. 너무도 강렬히 타올라 우리의 죽은 내면에까지 스미는, 우리의 담을 허물고, 우리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사랑이 필요하다. - P174

감금, 경제적 불안, 질병의 공포, 알코올 남용이라는 록다운의 조건은 학대가 발생하기에 완벽했다. 2021년에 자신의 부인, 여자친구, 아이들을 통제하고 괴롭히고 때리는 일에 열성이며 그럴 권리를 가졌다고 느끼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그 어떤 정부도 록다운을 계획하며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경을 거스르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 P178

미국에서는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20년 11월까지 여성 오백만 명 이상이 직업을 잃었다. 여성들이 하는 일의 상당수는 식당, 상점, 보육, 의료 서비스 현장처럼 대중과 신체 접촉을 요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여성들은 종종 최전방을 지키는, 그러므로 상당히 큰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 역할을 떠맡아 야 했다. 병원 근로자 77퍼센트, 학교 직원 74퍼센트가 여성이다. 게다가 극도로 제한된 보육 선택권으로 여성들은 그러한 일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다. 유자녀 이성애자 아버지라면 같은 문제를 겪지 않는다. 흑인 여성과 라틴계 여성 실업률은 바이러스 확산 이전에도 높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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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불행으로 인한 술꾼‘이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니까 우리 현에서 많이 보이던 그 구제불능의 술꾼 말이다. 내 주변에는 두서넛의 구제불능의 술꾼 말고는 이웃사촌 조차 없었는데, 주정뱅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이 딸꾹질과 한숨 소리로 채워졌다. 혼자 있는 편이 차라리 더 견딜 만했다. - P37

남편 분은 늘 장난을 칩니다, 백작 부인.
실비오가 그녀에게 대답했소.
한번은 장난삼아 제 따귀를 치더니, 여기 이 모자엔 장난삼아 총알 자국을 냈고, 지금도 장난삼아 저를 비껴 쏘았습니다. 이쯤 되니 저도 장난을 치고 싶어집니다만... 이 말을 하면서 그는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려고 했지요... 그녀의 눈앞에서 말입니다! 마샤는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어나요. 마샤, 부끄럽지도 않소!
나는 격분해 소리쳤지요. 이 양반아. 가엾은 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쏠 건가 말 건가?
쏘지 않겠네.
실비오가 대답했소.
나는 만족하오. 당신이 당황하고 겁먹는 모습을 본 걸로 만족해. 당신이 나를 쏘게 만들었으니 이걸로 되었소. 나를 기억할 테지. 당신의 양심에 당신을 맡기겠소. - P48

준비는 끝났다. 삼십 분 후면 마샤는 부모님 집과 자기 방, 고요한 처녀 시절의 삶을 뒤로 남긴 채 떠난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 전체가 조용해졌고 모두 잠이 들었다. - P58

교훈적인 경구는 우리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마땅한 근거를 생각해내지 못할 때 놀라울 정도로 유익한 법이다. - P68

마리야 가브릴로브나는 그에게 각별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생각에 잠기는 평소 모습 대신 생기가 돌았다. 마샤가 그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시인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P72

"댁의 장사는 어떻습니까?" 아드리얀이 물었다.
"허, 그게 참" 슐츠가 대답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고 해두겠습니다. 물론 제가 파는 물건은 선생님의 것과 다르지만 말입니다. 산 사람은 장화 없이도 산다지만 죽은 사람은 관 없이는 살지 못하잖습니까."
"딱 맞는 말이군요." 아드리얀이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산 사람이야 장화 살 돈이 없으면 맨발로 다닐 테니 댁이 화가 날 일은 없지요. 그런데 죽은 거지는 공짜로 관을 가져간다오." - P89

"날 모르겠나, 프로호로프?" 해골이 말했다.
"퇴역 근위 중사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을 기억 못하나? 1799년 자네가 처음으로 관을 판 사람 말일세. 게다가 그때 소나무 관을 참나무 관이라고 속였잖나?" 이렇게 말하면서 망자는 그를 포옹하려고 뼈만 남은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아드리얀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해골을 밀어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의 해골은 휘청거리다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망자들 사이에서 분노와 불평이 일었다. 모두들 동료의 명예를 위해 들고 일어나서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아드리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고함 소리 에 귀가 먹먹해지고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에 처한 가엾은 집주인은 넋을 잃고 퇴역 근위 중사 쿠릴킨의 뼈 무더기 위로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 P99

지금에 와서는 이도 저도 다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계급순‘이라는 모두에게 편리한 법칙 대신, 가령 ‘세상은 지혜순‘과 같은 다른 법칙을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별의별 꼴같잖은 말다툼이 벌어질 게 뻔하지! 게다가 하인들은 어떤 분부터 먼저 음식 접시를 날라야 하겠는가? - P109

나는 초라하지만 말끔히 정돈된 그의 거처를 장식하고 있는 여러 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돌아온 탕자에 관한 그림이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실내모와 실내복을 입은 덕망 있는 노인이 들떠 있는 청년을 배웅하고 있었는데, 청년은 부친이 주는 축복의 말과 돈 꾸러미를 급하게 챙기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에는 젊은이의 방탕한 행동이 생생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거짓 친구들과 수치를 모르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다음 그림에는 돈을 탕진한 청년이 돼지치기가 되어 삼각 모자와 누더기를 걸친 채 돼지 밥을 같이 먹고 있었는데, 얼굴에 깊은 수심과 후회가 가득했다. 종국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똑같은 실내모에 실내복을 입은 선량한 노인이 아들을 마중하러 뛰어간다. 탕아는 무릎을 꿇고 있다. 저 멀리 요리사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있고 장남은 하인에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이유를 묻는다. 그림에 어울리는 독일어 시구가 밑에 적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모조리 다 읽었다. - P110

겉모습만 보고 던진 농담 몇 마디가 그들의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성격의 특징‘ 즉 ‘개성(individualite)‘ 같은 것 말이다. 장 폴(독일 낭만주의 작가로 본명은 프리드리히 리히터)은 이것이 없다면 인간 존재의 위대함 또한 없다고 말했다. 수도의 여인들은 어쩌면 최상의 교육을 받았겠지만, 사교계의 관습이 곧 그들의 개성을 말끔히 다림질하며 마치 모자처럼 그들의 영혼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말로 타인을 재단하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어느 고대의 주석가가 썼듯이 Nota nostra manet(우리의 주석은 유효하다)인 것이다. - P141

리자는 조용히 농노 아가씨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나스챠에게 귓속말로 미스 잭슨에게 전할 말을 일러두고는 뒷문으로 나가 텃밭을 가로질러 들판으로 뛰어갔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환하게 밝았고 황금빛 구름 행렬은 마치 군주의 알현을 대기 중인 신하들처럼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 신선한 아침 공기, 이슬방울, 한 줄기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가 리자의 마음에 어린애다운 명랑한 기운을 가득 불어넣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그녀의 행보는 걷는다기보다 날아가는 듯 보였다. 아버지 영지 경계에 있는 숲 가까이 이르렀을 때, 리자는 소리를 더 죽여가며 걸었다. 그녀는 여기서 알렉세이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는데 왜 그런지는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우리들의 철부지 장난에 수반되기 마련인 두려움이야말로 그 장난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한 것을. - P148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제복을 입은 무롬스키 집안의 하인 둘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 계단을 올랐다. 뒤이어 말을 타고 도착한 그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식사가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이웃 지주를 대접했고, 식사 전에 정원과 사육장을 구경하자면서 정성껏 쓸고 닦아 모래로 덮은 오솔길로 안내했다.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속으로 이다지도 쓸모없는 취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생각 했지만 예의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구두쇠 지주의 불만에도, 허영기 많은 영국광의 열의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숱하게 접한 집주인의 딸이 등장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비록 그의 마음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미 꽉 차 있었지만, 젊은 미녀는 언제나 그의 상상력을 자극할 권리를 가진 법.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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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아네트는 잔을 내려놓고 식탁 표면을 손가락으로 길게 쓸었다. "그리고 가끔은요—미친 생각인 거 나도 알아요—그래도 가끔은 대니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누군가가 그이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나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차원에서 저항하는 거겠죠. 누군가가 그렇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 P315

앙투아네트가 나를 보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대니얼의 선택이라면—다른 가능성 말이에요—대니얼이 침묵을 선택한 거라면, 그럼 괜찮아요. 그이의 침묵이잖아요. 미스터리이고요. 그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다만 그이가 조슈아트리에서는 절대로 불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앙투아네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 P317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 대니얼의 부모님은 샌안토니오에 살았지만—나처럼 대니얼도 그곳에서 자랐다—이제 그들의 집은 휴스턴이었다. 칠 년인가 팔 년 만에 장례식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나를 겨우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대니얼의 아버지가 한 연설이 내게는 이상하게도 감동적이었다. 그는 늘 내게 고집불통의 군인 유형이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장례식에서는 아들의 유년기에 대해 유창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아직 대니얼을 알지 못했던 그 시기에 대해, 그때 대니얼이 얼마나 예민한 아이였는지에 대해. 연설을 마치며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자식을 땅에 묻는 불가해한 과제 앞에서는 인생의 그 어떤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떨렸고 내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 P318

그리고 그 주말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생각했다. 앙투아네트와 대니얼이 얼마나 아름다운 커플이었는지, 샌안토니오에서 두 번 만났을 때만 보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러다 무슨 이유인지 혼자 있는 대니얼이 떠오르며, 정말 그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었다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바깥세상의 누구도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힘들었을지. - P324

마침내 눈을 뜨고 앙투아네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우리는 아주 이상한 이틀을 함께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우리는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쨌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반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 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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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없어." 칼리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뭐든 하긴 해야 해. 그러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야?" - P268

가끔 나는 칼리도 나와 같은 이유로 히메나에게 끌린 건지, 아니면 그녀에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더 내밀하고 더 개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히메나 얘기를 꺼내거나, 그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칼리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방어적이다시피 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이 가까워지고 있고, 우정이 쌓여가고 있고, 그 우정이 나와는, 혹은 히메나와 나의 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칼리와 내가 같은 사람과 독특한 우정을 맺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평행하면서도 별개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 P268

그날 밤에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 칼리를 보며 우리가 처음 여기로 이사했을 무렵 거의 밤마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삼층의 나이 많은 부부가 생각났다. 그때는 우리 둘 다 삼십 대 초반으로 이 건물의 젊은 부부에 속했지만, 이제 칠 년이 지났으니 바로 우리가 그런 인간 화석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당시에는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 뒤에도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도 번듯한 집 하나 없이 제자리에 정체되어 있으리라고는, 아이도 낳지 않고 안정적인 직업도 없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 P270

"뭐, 이름은 에벌린이야." 칼리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알아? 걔는 이제 그 망할 놈의 인턴이 아니란 말이지."
가끔 나는 칼리가 이러는 모습을 보면 슬퍼졌다. 따지고 보면 사실 진짜 문제는 그 여자가 아님을 나는 알기 때문이었다. 칼리를 정말로 괴롭히는 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고, 그것을 그 여자에 대한 온갖 미움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 P273

"내가 이미 한 번 해고된 적이 있어서 그래." 칼리는 나중에 소파에 함께 앉아 있을 때 말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아니까, 내게 무슨 얼룩이 묻은 것만 같아. 회사가 날 다시 채용하긴 했지만, 작년에 봉급도 아주 조금 올려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건 빌어먹을 얼룩이라고." - P273

그날 밤에 칼리는 딱히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 쯤인가 밖에서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칼리가 측면 발코니에 혼자 나가 달빛에 몸이 은색으로 물든 채 앉아 있었 다. 칼리는 헤드폰을 끼고 제 몸을 팔로 감싼 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모으고 앞으로 웅크린 뒷모습이 얼핏 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P276

칼리는 그날 오후에 남부 지역의 소규모 미술관에서 열리는 자선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나는 칼리가 돌아오기 전에 둘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아파트를 청소해놓기로 약속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오로지 히메나가 떠나고 여기에 있지 않게 된다는 생각,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나는 복도에 선 채 내 두 손을 내려다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 P280

〈아랴야〉의 다른 특징. 다큐멘터리이지만 다큐멘터리 같지 않다. 허구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생겨나는 것과 비슷한 시적인 느낌, 분위기가 있다. 지역의 소금 광부들이 연기하는 등장인물이 있고, 실험적인 형식과 구조를 사용한다. 베나세라프는 이 영화를 완성한 뒤 베네수엘라의 여러 영화 및 문화 기관에서 수장을 맡았으나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베나세라프가 이후에 그 걸작을 촬영했던 섬으로 다시 돌아간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히메나는 그렇다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다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 살면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라진 후였어요. 남은 건 유령 도시뿐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요." 히메나가 말했다. "그냥 영화 속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요."
" 왜?"
"왜냐면," 그녀는 말했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은 모른다고요.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찾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잖아." 나는 말했다.
"알아요." 히메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영화 끝부분에서는, 그러니까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요." - P281

나중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인생에 불쑥 끼어든 막간극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다. ‘히메나가 아래층에서 살던 그 엉망진창 시절‘ 혹은 ‘그 아무개가 늘 옆에 있었던 이상한 날들‘과 같은. 하지만 한동안 우리는 히메나가 그리웠다. 대학 신입생이 처음 몇 주 동안 부모를 그리워하듯이 히메나를 그리워했다. 히메나가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우리 둘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느꼈던 위안을 그리워했다. - P285

나는 칼리와 함께 발코니에 앉아서 히메나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말하는 오디오 파일을 재생했다. 히메나는 아직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실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그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소리가 왜곡되고 지직거렸지만 여전히 분명한 히메나였다. 난 타인이 내 예술작품과 교감하기를 희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말했다. 난 무언가를 만들 때마다 나를 둘러싼 가까운 공동체를 생각해요······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을 지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지어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조용히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P286

"있잖아." 얼마 후 나는 칼리와 손가락을 엮은 채 먼 곳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끔 난 우리가 어디로 갔었나 의문이 들어, 칼리."
"무슨 뜻이야?"
" 모르겠어."
"우린 아무데도 안 갔어." 칼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
나는 칼리를 보았다. "하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내가 말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칼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그래." - P287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 고 생각해?"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칼리는 빙긋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어떻게 우리 둘 다 히메나에게 그리도 이끌렸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사실도. - P288

히메나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정말로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에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낸 그 길고 나른한 날들에서. 어쩌면 딴생각을 하게 해줄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거실에 타인의 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도 오래 칼리와 함께 지냈기에 가끔 잊고는 했다. 독신일 때는 그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가, 타인의 몸이, 얘기를 나눌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 P288

"그럼 당신은 여태 여기서 지냈어요?" 답이 자명한 질문이겠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물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집에서 나갔는지 아닌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네." 앙투아네트는 말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 있는다고 더 슬프진 않아요. 그럴 것 같았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대니얼과 더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직도 그이 옷을 입고 잘 때도 있어요." - P300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나는 성격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편이었지만 타냐는 훨씬 더 내향적이고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이었다. 타냐의 성정은 주위에 벽을 쌓고 담요를 누에고치처럼 둘둘 감은 채 소파 위에 누워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니얼의 실종 이전에도 우리 사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문제가 더 악화될까봐 걱정스러웠다. - P304

내 나이 사람들은 그 시절을, 1990년대 초반의 오스틴을 향수에 젖어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마치 1920년대의 파리나 1960년대의 버클리를 얘기할 때처럼. 하지만 때로는 정말로 그런 곳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우리는 우리가 매우 특별한 곳에서, 이 지역 역사의 매우 특별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고 그 시기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시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오스틴은 우리 유년기의 오스틴, 혹은 대학과 대학원 시절의 오스틴과도 닮은 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갈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말하던 ‘4월의 마지막 나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읽었다는 어떤 시의 구절인데 시인의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 P310

"대니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뇌가 끝없는 생각의 고리에 걸려버린 것 같은데, 그걸 끊어낼 수가 없어."
"책을 좀 읽어보면 어때?" 내가 물었다. "텔레비전을 보는 건?"
"텔레비전에 죽음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아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하지. 그러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사방이 온통 죽음이야. 잊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을 일깨우지 않는 방송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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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두어 달만 머물면서 두 친구가 식당을 궤도에 올릴 때까지 도울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두어 달이 두어 해가 되고, 두어 해는 이십 년이 되고 말았다. 그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생각에 빠져버리면 이따금 무서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 P95

그때 리베카는 아직 버티고 있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에도 가끔 그녀의 눈 속에 얼핏 스치는 그 시절의 다른 자아는 라인벡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희미해지기 시작해 소도시를 하나씩 지날 때마 다 점점 더 흐릿하게 멀어지곤 했다. - P111

내 침대 밑에 있는 앨범에는 대학 시절부터 뉴욕 생활 초기 몇 해 동안 우리 셋을 찍은 오래된 사진들이 가득하다. […] 이삼 년 전이었나, 마지막으로 앨범을 봤을 때 우리가 너무 달라 보여서, 그때는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진을 넘겨볼수록 점점 슬퍼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고, 그래서 앨범을 치워야 했다. 그뒤로는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앨범에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맥두걸 스트리트에 있던 내 아파트에서 셋이 함께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진이다. […]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5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지—오스틴 이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지—두 주가 지났고, 때로는 이 시간의 기억 역시 지워질지 궁금해진다. 라인벡에서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날들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 P126

잠자리에 들기 전에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새로운 음성메시지 두 통이 와 있다—하나는 리베카에게서,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에게서. 지금 확인할 수도 있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워버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예전에 뉴욕에서 우리 모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춘이던 그때, 나는 늦은 저녁에 대개는 다른 친구들과 저녁 내내 술을 마신 뒤 둘의 아파트에 들르곤 했다. 86번가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들의 아파트 건물 가장자리가 보이면, 두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늘 어떤 긴장된 설렘을 느꼈다가, 아파트 이층의 불 켜진 창문이 마침내 보이면서 그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오던 그 편안함. 그 때는 그저 소박한 일상 같았지만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건물 아래쪽 입구로 걸어올라가 초인종을 울리면 몇 초 뒤 둘중 하나의 얼굴이 창문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고 웃으며 올라 오라고 손짓할 때의 그 기대감을, 그런 다음에는 인터컴으로 방금 와인을 땄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바깥은 너무 춥지 않냐고 말하던 둘 중 하나의, 대개는 리베카의, 그 목소리를. - P127

흐릿한 조명으로 밝힌 방안에는 스파이더맨 포스터, 이언이 어린이집에서 그린 아름다운 그림,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힌 삼촌과 이모, 고모, 조부모가 보낸 엽서 등이 가득했다. 이 아이는 좋은 삶을, 내 유년기보다 훨씬 수월한 삶을 살아왔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두 부모가 있었다. 친구도 많았다. 너른 뒷마당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도 아이에겐 어쩐지 슬픔이, 불행이, 불만족이 있었다.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 P153

어쩌면 이언은 이런 불행을 내게만 내보였는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자기가 이렇다고 알려주기 위해. 아니면 그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저 자기가 뽑은 패에,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에게 실망한 건지도. 아이가 가장 원한 건 그저 다른 삶이었는지도. - P154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 이언은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순간, 혹은 그전 오 분이나 십 분 동안, 자신이 튜브나 다른 구명 장비 하나 없이 에어매트 위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육아 블로그를 드나들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나. 육아 지침과 육아 조언 칼럼을 집착적으로 읽는 나. 그 순간 나는 미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식음료 테이블 앞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부모로서 단 하나의 주요한 책임, 내 아이를 살린다는 책임을 잊어버렸나? 그때를 돌아보려 했지만—바로 그 순간에 내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봤지만—솔직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물 위의 햇빛, 순간적인 번뜩임, 밝은 섬광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P158

가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삶의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뒤척일 때면 내 바로 밑에 있는 그 상자를 생각했다.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그 기묘하게 개인적인 장신구와 증표들, 시기나 분노 때문에, 혹은 두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정표를 생각했다. 그 상자를 떠올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 P168

"부모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 어쩐다. 다들 얘기하잖아요." 린지가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흔히 떠올리는 변화와는 다를 뿐이죠.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다거나 하진 않아요. 무언가를 해결해주진 않죠. 그저 달라질 뿐이랄까요?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과 다르게." - P181

"어쨌거나," 린지가 물잔을 들며 마침내 말했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 연구 결과가 진실이라 해도 —진실이라는 말이 아니에요—만약 그렇다 해도 중요하진 않아요. 일단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아이가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행복이라는 논제는 뭐랄까, 좀 무관하죠." - P183

그날 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몇 곡 들은 뒤 리아가 다시 〈Thirteen〉을 틀어달라고 했다.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 내가 물었다.
"우리에 관한 거야."
"우리?"
"아빠가 날 학교로 데리러 올 때, 우리가 함께 수영장에 갈 때, 그런 얘기."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했을 법한 방식으로 리아의 오류를 바로잡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노래가 리아에게 그런 의미라면 그 의미가 맞았다. 내가 뭐라고 그걸 망가뜨리나? - P215

"난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뭘?"
"이거." 알렉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라는 걸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나는 아내를 밀어내고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아내가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정통으로 찌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의 어떤 측면에 나는 또한 이끌린다는 사실을. - P226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 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 P230

다른 모든 면에서 히메나는 무척 확신이 강하고 침착한 사람 같았지만,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는 갑자기 모호해지고 작아지고 수줍어졌다. - P249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 P267

히메나는 젊었고,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그 눈길에 연애 감정은 없었겠지만—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진 않았다—같은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 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 땅 위를 걷는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보았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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