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전쟁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삶을 사랑했어. 아마 전쟁을 겪으면서 전보다 더 삶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많이 본 어머니는 그만큼 더 삶에 밀착하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버지는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들 쪽에 속하게 된 거라고. 죽음에 엄습당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살갗을 갖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살갗은 살아있는 것을 두르고 있지만, 아버지의 경우 살갗은 살아있는 것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어.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아버지가 늘 움찔하며 손을 치웠던 것이 기억나.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후퇴만 거듭하고 있었어. 그게 아버지의 지병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을 치웠어." - P127

아버지와 나는 복도의 십자가상 아래 앉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옷장에서 꺼낸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다. 우리는 옷가지와 상자, 서류철, 책, 꽃병, 낡은 그릇들 사이에 앉아 있다.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다. 할머니가 사진을 묶었던 고무 밴드는 이제 바싹 말라버려 사진들을 빼내려고 하면 툭 끊어진다. 종이상자들은 무게 때문에 찌그러졌다. 조그만 상자들은 열쇠가 없고 외투에는 좀이 슬었고 트렁크에서는 냄새가 난다.
[…]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 P128

나는 내 할머니였던 할머 니가 처음에는 남자가, 그 다음에는 동물로, 그 다음에는 기존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너무 적었다."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금양모피를 찾으러 가는 중이야." - P141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말도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너에게서 모든 게 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멋져." 그가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허튼소리 말아요." 내가 말한다. "난 알아." 그가 말한다. "그건 정상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삶 안으로 사라질 거야." "삶 안으로 사라진다고요?" 내가 묻는다. "그래." 그가 말한다. "나는 나가버릴 거야. 삶 안으로 말이야. 그리고 사라질 거야." "아름답군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끔찍한 거야. 하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말한다."너는 너무 어려." - P141

내가 엄마와 점점 닮아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한다고 한다. 마치 엄마가 내 몸을 입은 것처럼. 내 살갗을 걸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 기침하고 엄마처럼 웃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나는 꼭 엄마처럼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엄마는 다시 사지를 쭉 뻗고 있을 만한 널찍한 살갗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이지 나도 모른다. - P144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나에게 솨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눈처럼 하얀 그 소리,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소리가. 솨 하는 그 소리에 내 두 귀가 아주 밝아진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고요가 들어서는 그 한순간을 채우기에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 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그 무엇은 발설되건 발설되지 않건 돌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성가신 돌처럼 밀쳐버린다. - P65

참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겪을 동안에는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접어버리며, 사랑은 순수하게 동지적인 지원을 배제하지 않고, 또 열정이란 위급한 상황에서는 현명하고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감퇴시키기보다 오히려 고양시킨다는 것을. 희망에 탐닉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것에 탐닉하는 것과 단 한 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희망에 대한 탐닉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희망의 실현에서 지원을 얻지 못하면 희망을 품은 자를 지극히 가파른 경사면으로 몰고 가며, 그렇기에 언젠가 그가 균형을 잃으면 떨어져 부서지게 만들거나 무엇이든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한다. - P66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면, 언제든 다시 잃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면, 남는 것은 여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적은 것을 가졌고 이 너무 적은 것이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는 것보다도 많다면 그런 것을 뭐라 형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67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의 움직이는 발끝과 침묵을 의식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 모임에서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에, 이를테면 침묵의 공존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의 침묵은 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한 것임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에 의지에 반하여 침묵은 우리 두 사람을 묶어준다. 마치 대립된 두 파가 싸움을 벌이려고 들어선 말 없는 땅 한 조각이 그 두 파를 이어주고 후일 전쟁터라 불리면서 나머지 땅들과는 영원히 구분되는 것처럼. - P71

나는 사진 속의 바다에 갔을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한다. 해변을 걷는 동안 아버지는 바다를 가리키고 흥분한 듯 두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여기는 수백만 년 전에 땅이 갈라진 곳이야. 그 때 단괴들이 생겨났고, 이 단괴들이 서로 분리 되어 유동했어." 아버지는 소리치듯 말했다. "이른바 바다라는 것은 그 단괴들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물에 불과해."
그 때 처음으로 나는 이른바 바다 앞에 서 보았고 그 광대한 넓이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들이 그 막대한 물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즈음 들어 할머니는 가끔 분을 너무 두텁게 바른다. 또 어떤 때는 바지 지퍼 올리는 것을 잊는다. 블라우스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손톱 끝이 지저분할 때도 있다. 얼굴의 솜털을 뽑는 것도 잊어버린다. 이제 할머니는 여자 같지 않다. 늙은 여자 같지도 않다. 할머니는 그저 늙은 어떤 것, 사람이 아닌 늙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보인다. 나는 늙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변신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P51

이제 할머니는 그동안 쓸 만큼 쓴 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걸 먹어야 하니?" 할머니가 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물론 드셔야죠." 내가 할머니 접시에 고기를 담으려 하자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관둬라." 할머니는 샐러드 잎만 하나씩 찍어 이 사이로 쑤셔넣는다. 그러고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되작거리다 아이스크림을 휘젓고는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루룩 마신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늘 똑같잖아. 위로 넣고 아래로 내보내고. 꼭 먹어야 하니?" "그럼요." 가끔 할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접시를 밀어서 대신 먹으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에게 너무 양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알게 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먹는 것이 여전히 사람의 음식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 P51

이제 나는 밤에 할머니 옆에서 자는 것에 익숙하다. 할머니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밤중에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 할머니는 평생을 지내온 집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가끔 할머니는 잠결에 말을 하거나 뭔가를 외친다. 그러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가치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그 구절의 뒷조각은 할머니의 꿈속에 머물러 있다. 내 안의 무엇인가 그 나머지 구절을 말하는 것에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내 꿈을 꾼다. 내 꿈속에서 나는 안다. 할머니는 그 시를 끝맺지 못할 동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내가 응답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말한다. "하나의 단어가 빽빽한 단어들의 수풀을 헤치고 길을 찾아가는 걸 보면 참 재미있어." - P53

하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이 여행이 일종의 귀양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전 처음 엄마들로부터 떨어져 우리끼리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귀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섬에 귀양 간 사람의 생활이 그 섬에 국한되어버리듯, 우리가 서로에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는 나에게로 국한되고 나는 그에게로 국한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 P61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뱀처럼 출렁이고 기다란 팔은 활기 있게 움직이지만, 야영장에 도착한 다음부터 그의 눈빛은 돌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시선은 나를 막고 서는 방패 같다. 마치 실향의 고통에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만 맞설 수 있는 사람처럼. 그에 반해 나는 난파를 당해 어느 섬에 휩쓸려간 사람 같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섬의 샘물은 말라버리고, 후일 사람들은 얼굴에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말라붙은 내 시체를 발견한다. 나는 내 여행 동료를 본다. 그는 약속을 지켜 국경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은 그저 우리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임을 안다. 빌린 돈을 갚는 마음으로 혹은 붕괴 직전의 집을 헐어 버리는 마음으로. 국경 역에서 마침내 그를 따라잡고 나서야 나는 분명히 깨닫는다. 우리의 계획에서 남은 것은 앙상한 골격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기로 했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것을. 그 골격을 채웠던 살은 먼 곳에 떨어져 있고,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나에게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답하지 않았고 내 눈에서 점점 멀어져 마침내 사라졌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61

이 휴가 동안 밤마다 나는 원칙상 내 오빠라 할 수 있는 그와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 아주 얇은 천의 텐트만이 우리를 비와 흙에서 분리한다. 그런 텐트에 그와 함께 누워 있는 밤이면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와 등 밑의 가지와 돌을 세고 때로는 내 몸무게를 견디고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도 느낀다. 밤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말을 할까 망설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기절해 버린 몸뚱이처럼 침묵이 버티고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에서 알게 된다. 그, 평소 오빠 같던 그는 우리 사이에 기절해 있는, 아니 아예 죽어버린 듯한 이 차가운 몸뚱이 뒤에 숨었고 내가, 평소 누이 같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인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그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내 관심은 언제부턴가 영혼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 나는 혹시라도 내 말이 그 몸을 나에게서 떼어놓을까봐 말을 하지 못한다.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대학에서였지." 그녀가 말한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당시에 벌써 우리를 가르쳤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그이 한테서 배우지 않았다면 내 안에 뭐가 남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이는 늘 배운 것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어. 누군가 나에게서 그 모든 걸 꺼내버린다면 나는 빈 껍데기처럼 오그라들고 말 거야."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나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다. 옆방의 어두운 물 속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외줄 타듯 가느다란 빛줄기 위로 조심스레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 P12

"그이에게 애인이 있을 것 같아?" 그의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갖다준 찻잔에 입술을 갖다댄다. 아가씨가 지닌 아름다움은 피부와 머리카락, 눈 색깔이 모두 밝다는 거야. 아가씨는 이 집 안에서 빛을 내는 구심점이야. 모든 게 끝나버렸지. 그 때 아가씨가 왔어. 밝은 구심점이 나타난 거야." 그녀는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 접시에 놓는다. 그런 다음 허리를 굽혀 자신의 혀를 내 입 속에 밀어넣는다. 그녀는 나에게서 다시 입을 떼고 말한다. "안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구나.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눈이 멀 정도로 밝아." "그 사실을 아저씨에게도 말할 건가요?" 내가 묻는다. "물론 안 하지." 그녀가 대답한다. "비밀은 지켜야 하니까." - P13

공항에서 물고기들에게 가는 도중 그녀는 버스 창 밖을 내다보며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곳의 아름다운 풍경,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풍경에 감탄한 그녀는 친구의 공감을 얻으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잠깐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 평원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바위들만 이빨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었다. 돌에 덮인 그 풍경은 지평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있었다. 검은 암석들은 분명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 P22

이 섬에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기엔 너무 춥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섬에는 바람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늘 칼날 세운 바람이 불어댄다. 예전부터 그녀는 사람이 죽으면 바람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곳에 사는 동안 그녀는 늘 혼자는 아니다. 그녀가 산책할 때면 죽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 P24

폴란드 여자는 열쇠를 꽂기 위해 입김으로 한참 동안 열쇠 구멍을 녹인다. 열쇠를 돌린 그녀는 손잡이를 틀고서 문을 민다. 문이 열리자 등 뒤에서 불어온 눈발이 집 안으로 들이친다. 문지방에 서 있는 그녀는 집 안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일층에 있는 방들 문이 나지막이 열렸다 닫히는 것뿐이다. 문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몰고 온 바람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움직임, 생명이 피해가는 그 무엇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구분을 소홀히 할 때 생기는 움직임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턱뼈는 낚싯줄에 걸려 그런 식으로 열리고 닫히다가 종내는 떨어져 나간다. 냇물에 빠진 책은 그런 식으로 물결에 쓸려 펄럭거린다. 이 섬에서 수천 개씩 줄에 꿰여 있는 생선 머리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물고기 머리들이 달그락거리며 텅 빈 듯한 소리를 낸다.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은 오후 시간, 나는 내 방에서 우리 가족의 느리고 꾸준한 종말의 과정을 반추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구름이, 정확히 우리집만한 크기와 모양의 구름이 우리에게 드리운 것 같았고, 우리 미래를 엮어낼 복잡한 요소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질 것 같았다. […] 삶은 계속되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 - P240

나는 누나에게 팔을 둘렀고, 내게 온몸을 맡긴 누나의 무게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누나가 내게 안긴 것은 아주 오래된, 몇 년 만의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오자, 누나가 내 가슴께로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 P245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P249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그런 것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어머니와 벤틀리 부인은 그저 어느 늦가을 오후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도 확신은 할 수 없다. 나는 그때껏 어머니의 성생활에서 대해 과도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분명 없었다. 어머니와 다른 여자들의 관계를 놓고 의혹을 품어본 적도 분명 없었다. 그날 이전에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헌신적인 아내였고 다정한 어머니였다. 그건 내가 알았다. - P257

결국 나는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수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일일 수도 있었다. 누구나 약해지는 때가 있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혼란에 빠지는 때가 있는 법이야. - P260

나는 섬 집에 혼자 앉아 있을 아버지 생각을 했고, 어머니는 간혹 손을 뻗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걱정 마. 네게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아." - P264

나는 지금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만 해도 해가 환하고 산들바람이 불고 가을인데도 때아니게 따뜻하더니, 늦은 오후, 초대한 손님들—벤틀리 씨 부부와 올리앤더 씨 부부—이 우리집에 도착한 즈음에는, 살랑살랑 불던 산들바람이 차가워졌고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잿빛으로 변했다. 켈리 누나와 남자친구인 채드 윈터스는 뒤뜰에 있는 테니스 장비 보관실 뒤에서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돌려 피우던 마리화나의 타들어가던 빛을, 옅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밝은 오렌지색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던 그 빛을 기억한다. - P266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잔디밭 너머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개 위니는 서늘하고 어두운 그늘에 누워, 어머니가 던져준 뼈다귀들 가운데 하나를 씹으며,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는 아무도 위니에게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녀석은 한창때의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녀석은 어디를 가든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개, 거실에 있는 아버지의자 옆에 앉아 있던 개, 매일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던 개였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위니 녀석 역시 변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녀석은 더이상 아버지와 있을 때처럼 활기차 보이지 않았다. - P270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 P2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