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 P99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 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도담은 그들과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누군가에게 쉽게 빠졌고 쉽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도담은 고백해 오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 P100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00

도담은 매순간 분열했다. 낮에 웃고 지내도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슬픔과 우울이 찾아왔다. 취하면 무뎌지고 시간을 마음껏 탕진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좋았다. 점점 의식을 놓아 버릴 기세로 마시며 굴러떨어지는 기분에 의존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 P104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 인물은 존재 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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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솔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메랄드빛 용소를 바라봤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저곳에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가 있다니 두려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위험을 품고 있는 계곡이 어쩐지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 P31

도담은 자신이 해솔을 향해 뛰어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도담은 그렇게 많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수영에 자신 있었고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 P38

어떤 말은 혀를 통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의식을 붙들어 매고 돌이킬 수 없는 힘을 가진다. - P59

"시련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는 밤마다 해솔의 손을 꼭 잡고 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솔은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믿기만 하면 죄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이 조건부 용서라니. 정말이지 속 좁고 쪼잔한 거래 아닌가. - P77

도담은 복도에서 마주 오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뱀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최대한 도담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른들이 쟤는 액운이 꼈으니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까. 나는 저들에게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적어도 내게는 저렇게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행복한 거야, 라고 위안 삼을 만한 불행의 표본이 되었겠지.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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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음모들 중 일부는 타락했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인디언 권리연맹은 어느 후견인이 인디언 과부의 재산을 거의 모두 챙겨서 달아나버린 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후견인은 나중에 오세이지 카운티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한 그 여성에게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통보했다. 결국 그 여성은 가난에 시달리며 어린 두 자녀를 길러야 했다. "그녀와 어린 두 자녀의 집에는 침대도 의자도 먹을 것도 없었다." 아기가 병들었을 때도 후견인은 그녀의 돈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간청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아기는 세상을 떠났다." 보고서는 이렇게 밝혔다. 오세이지족도 이런 음모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과부가 아기를 잃은 뒤, 후견인이 저지른 사기의 증거가 법정에 제출되었으나 판사는 무시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한, 정의로운 판결을 얻어낼 희망은 없다."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여성의 눈물은 미국을 향한 외침이다." 한 오세이지족은 후견인 제도와 관련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놈들이 우리 돈에 이끌려서 달려드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법과 제도가 모두 그들 편이다. 기사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달라. 그들이 여기서 우리 영혼을 깎아내고 있다고." - P220

헤일은 론을 포허스카의 의사에게 또 데려가 보험가입에 필요한 검진을 받게 한 뒤에야 비로소 두 번째 보험회사의 승인을 얻었다. 의사는 자신이 헤일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빌, 무슨 생각입니까? 이 인디언을 죽일 거예요?"
헤일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맞아." - P225

화이트는 어니스트와 몰리의 결혼(애나가 살해당하기 4년 전)도 처음부터 음모의 일환이었는지, 아니면 헤일이 나중에 조카를 압박해서 아내를 배신하게 만든 것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상조차 힘들 만큼 뻔뻔하고 사악한 음모였다. 어니스트는 몰리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몰리와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내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는 음모를 꾸며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대의 괴물 같은 얼굴을 가려줄 어두운 동굴이 어디 있을까? 그런 것을 찾지 말라, 음모여.
미소와 상냥함 속에 그것을 숨기라.’ - P230

어니스트 버크하트만이 화이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니스트를 보면, 기가 약한 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화이트와 함께 일하던 검사의 표현은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 모두 공략 대상으로 어니스트 버크하트를 점찍었다." - P262

화이트는 램지가 론의 이름 대신 계속 ‘인디언‘이라고 말하는 점에 주목했다. 마치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듯이 램지는 "오클라호마의 백인들은 인디언을 죽이는 일을 1724년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 P271

화이트는 둘 중 누가 몰리에게 독을 주었는지 증명할 수 없었다. 몰리도 증세가 나아진 뒤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몰리는 피해자 취급을 싫어했지만, 이번만은 무섭고 당황스럽다고 시인했다. 때로는 영어 통역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이제는 영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검찰 측을 돕는 변호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당신 편입니다." 그는 몰리에게 남편인 어니스트가 살인사건들에 대해 아는 것을 자백했으며, 헤일이 그 사건들은 물론 리타의 집 폭파사건까지도 주도한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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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귤을 따내는 건지, 노란 전구를 달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쯤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점심 먹게!
식사하십서!

불을 켜면 환하게 나타난다.

여전한 것들이지만

왠지 여전하지 않은
나의 막막하고 포근한, 작고 큰 방이.

그리고 떠날 때는 없던 새로운 것이.

귤은 난로를 부르고

난로는 겨울을 부른다.

꽁꽁 얼어 다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따뜻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계절.

겨울이 눈을 부르고 있다.
어둑한 하늘에
곧 하얀 눈이 내려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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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감으민
멜 떼가 반짝반짝 숨비소리 호이호이

자식들이야 그만허렌 허주만은 그만헤져.
고만 이시민 뭣 헤.
마음이 출렁출렁 허는디.

[…]

이제 여기가 나의 일터다.
여기에선 여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아름씩 조물고 싶지만 한숨에 조금씩
그래도 망사리는 몸을 움직인 만큼 차오른다.
돈도 벌고 벗도 만나는 바당이
나는 좋다.

눈을 감으면 곰새기, 거북이 헤엄치는 바다가 선하다고 했다.
바람에 맞춰 물때에 맞춰 평생을 살아온
순옥 할머니는
작년에 물질을 그만두고
고무옷을 나의 할머니에게 주었다
[…]
순옥 할머니는 해녀 식당 가는 길에 해신당에 들른다.

오늘도
물숨 먹지 안 허게 잘 좀 부탁헴수다.

연철을 차도 바닥에 있는 돌을 잡는 게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파도가 센 날은 물 밑이 캄캄하고
맑은 날은 물 밑이 투명하다는 걸.

이쪽은 하늘 빛
또 이쪽은 초록빛

일렁이는 물결의 그림자
하얗게 빛나는 멜 떼
길쭉하고 파랗거나
니모를 닮은 물고기
파랗게 평평하게만 보이던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것들.
그리고 물 위에 둥실둥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

눈을 감고 있는 여름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구나.
짙어지고 짙어지는
풀 내음을 맡고 있는 거야.
땀을 뻘뻘 흘리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가만히,
그 바람을 맡고 있는 거야.

내가 움직이니까 여름도 움직인다.
초록이 뺨을 때리고
파랑이 출렁인다.

할머니 집엔 에어컨이 없지만
할머니의 북쪽 방엔 하늬바람이 불어온다.
하늬바람이 순하게 불면 물 밑이 고와 우리
할머니 물질하기도 좋고
그냥... 기분도 좋다.

색이 바랜 간판
바래지 않는 상냥함
오픈한지 얼마 안 된 치킨집의
손으로 써 붙인 아귀찜, 김치찌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바다 앞의 할머니 마음처럼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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