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는 제 마음을 알아주고 조언으로 길을 인도해줄 벗을 찾고 싶다는, 항상 품어왔던 소망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충고를 듣고 기분 나빠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라서 제 힘에만 의존해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고 경험 많은 벗이 저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벗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지도 않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방인이 대답하더군요. "우정은 희망사항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저 역시 한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고결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을 판단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6

그토록 상심한 상태인데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잔별이 총총한 하늘, 바다, 그리고 기적처럼 경이로운 극지의 풍광, 이런 것들은 그의 영혼을 하늘로 둥실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중의 존재를 갖고 있어요. 불행을 겪고 상심에 꺾일지언정 내면으로 물러나면 마치 후광을 두른 천상의 영혼이 된 듯, 그 빛의 반경 속으로 어떤 설움도 우매함도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 P37

누구나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 하인들이 청탁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엘리자베트가 중재에 나섰다. 우리는 불화나 다툼을 전혀 몰랐다. 우리 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바로 그 괴리에서 조화로움을 찾았다. 나는 내 단짝보다 훨씬 차분하고 사색적이었지만 성격은 나긋나긋하지 못했다. 나는 근면했고 훨씬 더 지구력이 있었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있으면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나는 현실 세계와 관련된 사실을 탐구하는 일이 즐거웠다. 반면 그녀는 시인들의 신기루 같은 창조물을 좇느라 분주했다. 내게 세상은 비밀이었고, 나는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세상은 텅 빈 여백이어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채우고자 갈망했다. - P44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낀다. 불행이 내 마음을 더럽히고, 널리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밝은 꿈을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한 우울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바꾸어놓기 전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의 그림을 하나씩 그려나가면서,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한 발 한 발 훗날의 불행으로 나를 이끈 사건들을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된다. 훗날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그 격정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마치 산을 따라 흐르는 냇물처럼 미미하고 거의 잊힌 원천에서 솟아나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냇물은 흘러 가면서 점점 불어 격류가 되었고, 결국 내 모든 희망과 기쁨을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다. - P45

어떻게도 보상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으리라. 영혼에 드리워진 그 어마어마한 공허감, 그리고 표정에 떠오른 절망감을, 어머니가, 날마다 얼굴을 볼 수 있던,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 같았던 어머니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으로 납득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그 눈의 밝은 빛이 영원히 꺼져버렸고, 그토록 친숙한,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숨이 죽어,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 이런 것들이 첫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담한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면 그제야 진짜로 비탄의 쓰디쓴 설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무자비한 손길에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 누구나 느꼈을 슬픔, 그리고 반드시 느껴야만 할 슬픔을 굳이 내가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결국 때가 되면 비탄은 필연이라기보다 일종의 자기만족이 된다. 그리고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입가에 서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온다. - P53

나를 멀리 데려갈 이륜마차에 몸을 던진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우울한 생각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끊임없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려 애쓰는 상냥한 가족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던 내가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 지금 향하는 대학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고 스스로를 알아서 돌봐야 했다. 이제까지의 내 삶은 유별나게 가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얼굴들에 대해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반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동생들과 엘리자베트, 그리고 클레르발을 사랑했다. 그들이 내겐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런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 진척되면서 차츰 기운도 생기고 희망도 샘솟았다. 나는 지식을 열렬히 갈구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종종 청년 시절을 이렇게 한군데 처박혀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입지를 확보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제 내 바람이 현실이 된 마당에 회한을 품는 건 우매한 짓이었다. - P55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고, 그날 저녁 당장 발트만 교수를 찾아갔다. 사석에서 본 그의 몸가짐은 공적인 자리에서보다 더 부드럽고 매력적이었다. 강의를 할 때 보이던 위엄은 사라지고 비길 데 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보잘것없는 내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와 파라셀수스의 이름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크렘페 교수가 드러내던 경멸이 없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지식의 근간을 빚진 셈이지. 그들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을 남겨주었다네. 상당 부분 그들 덕분에 조명된 사실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 연관된 분류 체계로 정렬하는 일이지. 천 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 P59

친구여, 열의는 물론 경외와 희망에 찬 그대의 눈빛을 보니, 내가 알게 된 비밀을 전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 모양이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주의깊게 듣고 나면, 내가 그 주제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시의 나처럼 몸도 사리지 않고 열의에 들뜬 그대를 파멸과 명약관화한 불행으로 이끌 수는 없으니. 나로부터 배우도록 하라.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면 적어도 내 사례를 보아 깨닫도록 하라. 지식의 획득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성이 허락하는 한계 너머 로 위대해지고자 야심을 품는 이보다 고향을 온 세상으로 알고 사는 이가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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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마이를 버리고서 개성으로 향했을 때······ 새비 너를 그 추운 날 난리통에 피난 가라고 떠밀었을 때······ 모두 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기렇게 마음먹으면서두 기래선 안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새비야······ 나는 죽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동무라 하기에는 너무 달랐으니······ 내레 죽으면 어마이도, 새비 너도 볼 수 없을 기야. 우린 다른 세상으로 갈 테니까. 나는 새비 너가 있는 곳에 절대루 갈 수 없을 테니. 그러니 이게 전부야······ 이게 전부야······
증조모가 두 손으로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우리 새비,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은 곳으로 가서 더는 힘들지 말구, 마음 쓰지도 말구, 새비 네가 그리워했던 사람들 모두 만나고 지내라. - P293

나는 남편의 외도와 그와의 이혼이 내 무릎을 한순간 꺾이게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내가 믿었던 만큼, 내가 믿고 싶었던 만큼 그는 내게 정말 의미 있고 비중 있는 존재였을까. 그의 외도를 알기 전의 나는 정말 내 믿음대로 덜 아프고 덜 병들어 있었을까. - P298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 P29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어마이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한 건 없나······
희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 가끔은 희자 너레 새가 되어 꿈에 나온다고 하셨더랬어. 아주 잘생긴 새가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걸 본다구.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 그 새가 나인 줄 어떻게 알아······ 회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너레 새가 되든 두더지가 되든 감나무가 되든 새비 아즈마이는 한눈에 희자로구나, 잘생긴 우리 희자로구나, 알아보시지 않았갔어.
– 그래, 그랬을 거야. - P302

이야기하는 할머니, 소리 내어 웃는 할머니, 화투 치는 할머니, 놉에 가려고 봉고차에 올라타는 할머니, 정자에 앉아서 친구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할머니, 차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가끔 돋보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읽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모습 중에서도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식탁의자에 앉아서 한 손을 컵에 댄 채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때로는 몇 초에서 길게는 일이 분 정도 할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돌아와서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감각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마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프리 다이버처럼 유유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P308

"미선이는 정연이 일을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미선이 잘못이 전혀 아닌데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미선이는 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찔렀다.
"엄마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넌 나랑 달라. 그애의 딸이잖아.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야." - P311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나는 엄마의 사진첩에서 본 결혼식 사진을 떠올렸다. 식 직전까지 울었는지 진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붉은 얼굴과 충혈된 눈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결혼사진이 담긴 앨범에는 신혼여행 사진과 신혼시절의 사진도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즐거워 보였는데, 그것이 엄마의 젊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순간을 미화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가 그 시절을 실제로 그렇게 즐겁게 보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은 엄마가 분명히 그 순간 빛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P315

"언니는······ 어떤 아이였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애를 똥강아지라고 불렀어."
"똥강아지요?"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 P316

작은방 구석에 이불을 개켜놓는 자리가 있었다. 언니는 그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달리면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이웃들에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 나에게는 생생했다. 사람들은 네다섯 살의 기억이 그토록 구체적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그 강한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절박하게 기억했다. - P317

어떤 교사들은 부모가 제대로 보호해줄 수 없는 집의 아이들을 골라 괴롭히곤 했다. 책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 그게 표적이 된 아이의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엄마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면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해변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 마다 증조모는 엄마를 찾아냈다. 어두워지는 해변에서 미선아, 미선아, 부르며 걸어오던 중조모의 모습을 엄마는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반가움을,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무엇보다도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엄마는 기억했다. - P329

나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사십대의 나의 모습이 보여요.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어머니가 오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육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한 적도 많았어요.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2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 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 P335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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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실 창문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그 날 내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했다. 언니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나는 그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평생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알았다. 내가 오래도록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시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충분했으므로. 더이상 바랄 수 없었으므로. - P265

"통원 치료 받으면 차차 나을 거야." 나는 엄마에게 사고 경위를 대강 설명했다. 엄마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너한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엄마가 힘없이 물었다. 마치 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서 묻는다는 듯이. - P267

"갯강구?"
"네가 무서워하는 이 벌레. 넌 어릴 때도 얘들을 무서워했었어."
"저 징그러운 걸 어떻게 안 무서워해."
"난 좋아해."
엄마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갯강구는 바닷가 돌 틈이나 방파제에 살면서 해변을 청소해."
엄마는 친구를 소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그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갯강구가 정답게 느껴졌어. 속으로 불렀지, 갯강구야, 하고.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을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 P269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 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혜진이네 가족은 늘 웃음이 넘쳤다. 숙모가 초등학생 혜진이를 무릎에 앉히고서 뽀뽀를 해주던 장면을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다. 초대를 받아 혜진이네 집에 갔을 때 삼촌이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준비하는 걸 보고 엄마와 아빠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하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 삼촌의 곁에는 늘 혜진이가 매달려 있었다. ‘아빠, 아빠.‘ 마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아빠를 부르면서 자신의 일상을 거리낌없이 나누던 그애의 모습을 기억한다. 혜진이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그저 십 초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움이라는 말을 몰랐을 때부터도. - P273

나는 잔에 샴페인을 따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삼촌, 형수님이에요, 형수가 아니라."
삼촌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아빠가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젓가락과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렇게 부모 개망신을 시켜야지 속이 후련해? 씨발. 이혼이 자랑이야? 니가 뭐 잘난 게 있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
아빠가 술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말리자 아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삼촌은 그런 아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그가 글을 쓰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공감해보기는 했을까. - P275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 P278

"그거 알아? 엄마가 언닐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든 거야."
엄마가 걸음을 멈췄다.
"엄마는 언니에 대해서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언니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잖아. 언니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게 말이 돼?"
엄마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웅크리고 앉아서 울었다. 나는 나의 잔인함에 취해서 그런 엄마를 연민 없이 바라보았다. 금지된 말을 했다는 것에서 자유를 느꼈던 걸까. 복수의 일격을 즐겼던 걸까.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엄마에게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워졌다.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로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는 한참을 울다 얼굴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 P280

어린 내 몸안에는 외로움이 전기처럼 흐르고 있어서 누구라도 나를 건드린다면 덩달아 외로워질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더는 안아주지 않고 만져주지 않고 내 손길을 그저 피하는 것은. 그런 상상을 하면 슬픈 마음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차마 엄마와 살을 맞대지 못한 채 강아지처럼 곁에서 서성거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서 깜빡 잠이 들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온기가 섞인 냄새를 맡았다. 엄마가 손가락 하나의 거리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유일하게 나를 만져주는 시간은 내 머리를 땋아줄 때였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빗을 들고 엄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엄마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런 일들을 잊지 못한다. - P281

가끔은 엄마가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불편한 일이라면 덮어놓고 없었던 일이라고 믿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장단을 맞췄다. 항상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덮어두는 것에. - P282

나는 문득문득 그날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어두운 방에서 떠오른 오래된 상처들에 대해서도. 그때 나는 엄마에게 상처를 줄 목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악의적으로 지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했던 그 말들이 순수한 거짓말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희령으로 온 건 분명 얼마간은 이혼 후에 내게 상처를 줬던 엄마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언니를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사실은 내가 인정할 수 없어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내 무의식의 일부였다. - P283

엄마는 내가 엄마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엄마를 향한 나의 태도에는 늘 일종의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엄마를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그래야 엄마가 나를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해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내가 갈구하고 울고 애원하고 원망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엄마가 내가 엄마를 은근하게 무시할 때에야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는 것이 나는 좋았을까.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면서도 끝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 사과해야 할지 알 수 없기도 했지만, 내가 사과해도 엄마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 P284

– 새비 아즈마이가 편찮은 것 같다고 내가 얘기하다 않았어요. 그때 어마이 들은 척이라도 했습니까? 새비는 괜찮다, 새비는 괜찮다, 하디 않았어요. 어마이는 왜 항상 기런 식이야요? 왜 내 말을 귀기울여 듣지를 않습니까?
짐을 싸던 중조모가 차가운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 내레 몰랐다고 생각했더래? 우리 새비, 사람들이 자기 걱정하고 동정하는 거 죽는 것만큼 싫어하는 간나야. 기게 새비야. 새비가 지 마음대로, 지 살고 싶은 대로 나머지를 산다는데 내레 뭐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게 새비가 바라는 기라면 내레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 있었다. - P287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중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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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시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네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우리 영옥이, 내 살 같은 영옥이를 쥐 잡듯이 잡고 화풀이하고 이렇게 다친 아이를 말로 두드려 팰 거면, 이 꼴을 내 눈으로 보게 할 거면, 내를 기냥 삼천에 내버려두지 기랬어요. 내를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 P249

– 당신 돌아가셔도 내 흘릴 눈물은 없습니다. 아바이 산소에도 걸음하지 않을 거고, 내는 아바이를 잊을 겁니다. 기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우리 없는 곳에서 죽으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그런 말은 속으로라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버이를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건 할머니에게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법이었지만, 할머니는 그 순간 그 법을 깨뜨렸다. 증조부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었고, 증조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절망 때문에 증조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 P250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그는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중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갈 때 내는 소리처럼, 폭우가 호수 위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바람이 길게 불며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처럼 증조부의 목소리는 중조모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으로 중조모는 살아갔다. - P253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희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결혼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 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는 그저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모든 선택이 그때로서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 P256

새비 아주머니는 땀을 흘려가며 할머니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몇 번이나 할머니를 칭찬했다.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예전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P257

– 새비야.
– 응.
– 내레 아까워.
– 뭐가.
–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
– 난 삼천이 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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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수사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경험 중 딱히 이상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무엇도 잊지 않았고,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았다. 또한 전투와 모험을 통해 맛본 기쁨과, 지금 이 정적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도 느끼지 않았다.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 그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소한 악행으로 생활에 풍미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고, 수도원이라는 조용한 배에 오른 지금은 다시 정적을 즐기고 있는 셈이었다.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젊은 수사들은, 오랜 세월 모험을 즐기며 살아 왔다면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테고 그 교제들이 전부 기사도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사람이 이런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서로 속삭였을 것이다. - P13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의 생각이 옳았다. 10년이 넘도록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같은 지방의 장인, 그러니까 절대로 전쟁터로 달아날 염려가 없는 견실한 남자와 결혼해버린 리힐디스를 제외하고도, 그에게는 여자들과의 추억이 많았다. 여러 나라에서 그는 서로에게 아무 해가 없이 오직 즐거움만을 주는 교제를 만끽했다. […] 가벼운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었고, 헤어진 뒤에도 나쁜 감정 같은 건 남지 않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그 추억들이 고적한 은둔 생활과 균형을 이루어 지금의 삶을 보다 만족스럽게 영 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러한 경험으로 얻은 인내심과 통찰력 덕분에, 그에게는 단조로운 은퇴 생활 에 불과한 베네딕토회의 전통적 직무를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폐쇄적이고 소박한 영혼들과도 그럭저럭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세상 온갖 풍상을 겪은 사람으로서는 허브밭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도 적잖이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일마저 없이 무료하게 살아야 한다면 지금처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으리라. - P13

캐드펠 수사는 행렬의 가장 끝자락에 섞여 소리 없이 자신의 구석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빛도 거의 들지 않고, 줄지어 늘어선 석조 기둥으로 반쯤 가려진 맨 뒷줄 자리였다. 캐드펠은 번거로운 양피지 업무를 맡고 있지 않은 터라 수도원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사에서 낭독자나 발언자로 지명될 염려가 거의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는 평의회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그는 어둠에 싸인 자신의 구석 자리에서 똑바로 앉은 자세로 잠자는 법을 터득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스스로에게 경고를 내리는 육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고를 받는 즉시 잠에서 깨어나 시치미를 뚝 떼고 조용히 앉아 있을 줄도 알았다. 그뿐 아니라 졸고 있을 때 던져진 질문에 대해서도 꼭 들어 맞는 답변을 할 수도 있었다. - P21

캐드펠이 느끼기에 콜룸바누스 수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만족할 만큼 일을 하지 못하여 그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쯤은 의식적으로 또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안타깝고 견책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여지 또한 남겨두었다. 이곳에서 만난 형제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한 터였다. 존 수사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수도원 안에서건 밖에서건 존 수사처럼 명랑하고 둔감하며 외향적인 사람은 희귀한 법이었다. - P26

"저도 웨일스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세번강 위의 다리를 건너 사라져가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존 수사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계시 같은 건 영영 못 볼 거예요. 이런 일에는 제롬 형제가 적격이지
요."
"형제여, 갈수록 점점 더 신앙인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구먼." 캐드펠 수사는 점잖게 타일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누구 못지않게 그 소녀의 정결함을 믿고,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을 믿는다고요. 성인들께서 우리를 돕고 축복할 능력을 가지셨다는 거야 당연히 알죠. 그분들이 선의를 가지셨다는 것도 믿고요. 하지만 그 꿈을 꾼 사람이 하필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충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성녀가 아니라 부수도원장의 신성함을 믿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예요. 어쨌든 성녀께서 그런 호의를 베푸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도대체 왜 우리가 그분의 무덤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건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건 교회가 아니라, 납골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잖아요. 수사님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죠?" - P34

존 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 온순한 하얀 양이 고해성사를 하다가도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는가 하면 철야 기도 중에 갑자기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야 다들 알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니 홀리웰에서 갑자기 얼음처럼 차디찬 샘물이 몸에 닿은 순간 화들짝 놀라 정신이 되돌아왔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이곳 연못에다 그 형제를 처박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 형제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믿었을 테니 모두 그 성녀 덕분이라고 생각하겠죠. 그 형제가 어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길 사람인가요! 절대 아니고말고요. 전 콜룸바누스 형제가 그 음모의 일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형제는 영광스럽게 은총을 입증할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죠. 수사님도 콜룸바누스 형제의 밤샘 간호를 명받은 사람이 제롬 수사였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계시를 받는 것은 딱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어요. 그가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라면 말이죠." 그가 여린 녹색 이파리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비비자 아침 대기 속으로 짙은 허브 향기가 퍼졌다. "아마 부수도원장이 웨일스로 갈 때 데려갈 사람들도 더없이 적합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는 씁쓸한 어조로 단언했다.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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