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시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네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우리 영옥이, 내 살 같은 영옥이를 쥐 잡듯이 잡고 화풀이하고 이렇게 다친 아이를 말로 두드려 팰 거면, 이 꼴을 내 눈으로 보게 할 거면, 내를 기냥 삼천에 내버려두지 기랬어요. 내를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 P249
– 당신 돌아가셔도 내 흘릴 눈물은 없습니다. 아바이 산소에도 걸음하지 않을 거고, 내는 아바이를 잊을 겁니다. 기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우리 없는 곳에서 죽으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그런 말은 속으로라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버이를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건 할머니에게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법이었지만, 할머니는 그 순간 그 법을 깨뜨렸다. 증조부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었고, 증조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절망 때문에 증조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 P250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2
그는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중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갈 때 내는 소리처럼, 폭우가 호수 위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바람이 길게 불며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처럼 증조부의 목소리는 중조모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으로 중조모는 살아갔다. - P253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희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결혼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 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는 그저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모든 선택이 그때로서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 P256
새비 아주머니는 땀을 흘려가며 할머니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몇 번이나 할머니를 칭찬했다.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예전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P257
– 새비야. – 응. – 내레 아까워. – 뭐가. –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 ······ – 난 삼천이 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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