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실 창문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그 날 내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했다. 언니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나는 그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평생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알았다. 내가 오래도록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시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충분했으므로. 더이상 바랄 수 없었으므로. - P265

"통원 치료 받으면 차차 나을 거야." 나는 엄마에게 사고 경위를 대강 설명했다. 엄마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너한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엄마가 힘없이 물었다. 마치 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서 묻는다는 듯이. - P267

"갯강구?"
"네가 무서워하는 이 벌레. 넌 어릴 때도 얘들을 무서워했었어."
"저 징그러운 걸 어떻게 안 무서워해."
"난 좋아해."
엄마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갯강구는 바닷가 돌 틈이나 방파제에 살면서 해변을 청소해."
엄마는 친구를 소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그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갯강구가 정답게 느껴졌어. 속으로 불렀지, 갯강구야, 하고.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을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 P269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 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혜진이네 가족은 늘 웃음이 넘쳤다. 숙모가 초등학생 혜진이를 무릎에 앉히고서 뽀뽀를 해주던 장면을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다. 초대를 받아 혜진이네 집에 갔을 때 삼촌이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준비하는 걸 보고 엄마와 아빠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당황하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 삼촌의 곁에는 늘 혜진이가 매달려 있었다. ‘아빠, 아빠.‘ 마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아빠를 부르면서 자신의 일상을 거리낌없이 나누던 그애의 모습을 기억한다. 혜진이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그저 십 초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움이라는 말을 몰랐을 때부터도. - P273

나는 잔에 샴페인을 따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삼촌, 형수님이에요, 형수가 아니라."
삼촌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아빠가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젓가락과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렇게 부모 개망신을 시켜야지 속이 후련해? 씨발. 이혼이 자랑이야? 니가 뭐 잘난 게 있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
아빠가 술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말리자 아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삼촌은 그런 아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그가 글을 쓰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공감해보기는 했을까. - P275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 P278

"그거 알아? 엄마가 언닐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든 거야."
엄마가 걸음을 멈췄다.
"엄마는 언니에 대해서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언니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잖아. 언니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게 말이 돼?"
엄마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웅크리고 앉아서 울었다. 나는 나의 잔인함에 취해서 그런 엄마를 연민 없이 바라보았다. 금지된 말을 했다는 것에서 자유를 느꼈던 걸까. 복수의 일격을 즐겼던 걸까.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엄마에게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워졌다.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로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는 한참을 울다 얼굴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 P280

어린 내 몸안에는 외로움이 전기처럼 흐르고 있어서 누구라도 나를 건드린다면 덩달아 외로워질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나를 더는 안아주지 않고 만져주지 않고 내 손길을 그저 피하는 것은. 그런 상상을 하면 슬픈 마음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차마 엄마와 살을 맞대지 못한 채 강아지처럼 곁에서 서성거리며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서 깜빡 잠이 들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온기가 섞인 냄새를 맡았다. 엄마가 손가락 하나의 거리에 있는데도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유일하게 나를 만져주는 시간은 내 머리를 땋아줄 때였다. 나는 일찍 일어나서 빗을 들고 엄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엄마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런 일들을 잊지 못한다. - P281

가끔은 엄마가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불편한 일이라면 덮어놓고 없었던 일이라고 믿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장단을 맞췄다. 항상 그런 식으로 모든 일을 덮어두는 것에. - P282

나는 문득문득 그날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어두운 방에서 떠오른 오래된 상처들에 대해서도. 그때 나는 엄마에게 상처를 줄 목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악의적으로 지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했던 그 말들이 순수한 거짓말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희령으로 온 건 분명 얼마간은 이혼 후에 내게 상처를 줬던 엄마에게서 멀어지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언니를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사실은 내가 인정할 수 없어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내 무의식의 일부였다. - P283

엄마는 내가 엄마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엄마를 향한 나의 태도에는 늘 일종의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엄마를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그래야 엄마가 나를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해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내가 갈구하고 울고 애원하고 원망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엄마가 내가 엄마를 은근하게 무시할 때에야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는 것이 나는 좋았을까.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면서도 끝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 사과해야 할지 알 수 없기도 했지만, 내가 사과해도 엄마가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어서였다. - P284

– 새비 아즈마이가 편찮은 것 같다고 내가 얘기하다 않았어요. 그때 어마이 들은 척이라도 했습니까? 새비는 괜찮다, 새비는 괜찮다, 하디 않았어요. 어마이는 왜 항상 기런 식이야요? 왜 내 말을 귀기울여 듣지를 않습니까?
짐을 싸던 중조모가 차가운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 내레 몰랐다고 생각했더래? 우리 새비, 사람들이 자기 걱정하고 동정하는 거 죽는 것만큼 싫어하는 간나야. 기게 새비야. 새비가 지 마음대로, 지 살고 싶은 대로 나머지를 산다는데 내레 뭐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게 새비가 바라는 기라면 내레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 있었다. - P287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중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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