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는 제 마음을 알아주고 조언으로 길을 인도해줄 벗을 찾고 싶다는, 항상 품어왔던 소망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충고를 듣고 기분 나빠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라서 제 힘에만 의존해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고 경험 많은 벗이 저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벗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지도 않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방인이 대답하더군요. "우정은 희망사항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저 역시 한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고결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을 판단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6

그토록 상심한 상태인데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잔별이 총총한 하늘, 바다, 그리고 기적처럼 경이로운 극지의 풍광, 이런 것들은 그의 영혼을 하늘로 둥실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중의 존재를 갖고 있어요. 불행을 겪고 상심에 꺾일지언정 내면으로 물러나면 마치 후광을 두른 천상의 영혼이 된 듯, 그 빛의 반경 속으로 어떤 설움도 우매함도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 P37

누구나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 하인들이 청탁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엘리자베트가 중재에 나섰다. 우리는 불화나 다툼을 전혀 몰랐다. 우리 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바로 그 괴리에서 조화로움을 찾았다. 나는 내 단짝보다 훨씬 차분하고 사색적이었지만 성격은 나긋나긋하지 못했다. 나는 근면했고 훨씬 더 지구력이 있었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있으면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나는 현실 세계와 관련된 사실을 탐구하는 일이 즐거웠다. 반면 그녀는 시인들의 신기루 같은 창조물을 좇느라 분주했다. 내게 세상은 비밀이었고, 나는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세상은 텅 빈 여백이어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채우고자 갈망했다. - P44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낀다. 불행이 내 마음을 더럽히고, 널리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밝은 꿈을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한 우울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바꾸어놓기 전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의 그림을 하나씩 그려나가면서,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한 발 한 발 훗날의 불행으로 나를 이끈 사건들을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된다. 훗날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그 격정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마치 산을 따라 흐르는 냇물처럼 미미하고 거의 잊힌 원천에서 솟아나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냇물은 흘러 가면서 점점 불어 격류가 되었고, 결국 내 모든 희망과 기쁨을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다. - P45

어떻게도 보상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으리라. 영혼에 드리워진 그 어마어마한 공허감, 그리고 표정에 떠오른 절망감을, 어머니가, 날마다 얼굴을 볼 수 있던,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 같았던 어머니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으로 납득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그 눈의 밝은 빛이 영원히 꺼져버렸고, 그토록 친숙한,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숨이 죽어,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 이런 것들이 첫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담한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면 그제야 진짜로 비탄의 쓰디쓴 설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무자비한 손길에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 누구나 느꼈을 슬픔, 그리고 반드시 느껴야만 할 슬픔을 굳이 내가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결국 때가 되면 비탄은 필연이라기보다 일종의 자기만족이 된다. 그리고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입가에 서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온다. - P53

나를 멀리 데려갈 이륜마차에 몸을 던진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우울한 생각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끊임없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려 애쓰는 상냥한 가족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던 내가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 지금 향하는 대학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고 스스로를 알아서 돌봐야 했다. 이제까지의 내 삶은 유별나게 가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얼굴들에 대해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반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동생들과 엘리자베트, 그리고 클레르발을 사랑했다. 그들이 내겐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런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 진척되면서 차츰 기운도 생기고 희망도 샘솟았다. 나는 지식을 열렬히 갈구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종종 청년 시절을 이렇게 한군데 처박혀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입지를 확보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제 내 바람이 현실이 된 마당에 회한을 품는 건 우매한 짓이었다. - P55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고, 그날 저녁 당장 발트만 교수를 찾아갔다. 사석에서 본 그의 몸가짐은 공적인 자리에서보다 더 부드럽고 매력적이었다. 강의를 할 때 보이던 위엄은 사라지고 비길 데 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보잘것없는 내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와 파라셀수스의 이름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크렘페 교수가 드러내던 경멸이 없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지식의 근간을 빚진 셈이지. 그들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을 남겨주었다네. 상당 부분 그들 덕분에 조명된 사실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 연관된 분류 체계로 정렬하는 일이지. 천 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 P59

친구여, 열의는 물론 경외와 희망에 찬 그대의 눈빛을 보니, 내가 알게 된 비밀을 전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 모양이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주의깊게 듣고 나면, 내가 그 주제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시의 나처럼 몸도 사리지 않고 열의에 들뜬 그대를 파멸과 명약관화한 불행으로 이끌 수는 없으니. 나로부터 배우도록 하라.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면 적어도 내 사례를 보아 깨닫도록 하라. 지식의 획득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성이 허락하는 한계 너머 로 위대해지고자 야심을 품는 이보다 고향을 온 세상으로 알고 사는 이가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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