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두려움들을 꺾고, 몇 달 안에 받기로 마음먹은 심판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가끔은 내 생각이 이성의 고삐를 풀어버리고 낙원의 벌판을 헤매며, 내 감정에 공감하고 우울할 때 기분을 돋워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감히 상상해보도록 내버려둘 때도 있었다. 그들의 천사 같은 얼굴들이 숨쉬며 위안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모두 덧없는 꿈이었다. 내 설움을 달래주고 내 생각을 공유해줄 이브는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아담이 조물주에게 했던 청원이 기억났다. 그러나 내 조물주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저버렸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그를 저주했다. - P175
저주받을, 저주받을 창조자! 어째서 나는 살았던 것인가? 어째서 바로 그 순간, 당신이 그렇게 방탕하게 붙인 존재의 불꽃을 꺼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절망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고 비명소리와 불행을 탐닉할 수도 있었다. 밤이 내리자 나는 은신처에서 나와 숲속을 헤맸다. 이제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사라져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으로 괴로움을 분출 했다. 마치 올가미를 부수고 나온 야생동물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수사슴처럼 민첩하게 숲속을 횡행했다. 오! 그날 밤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차가운 별들이 조롱하듯 빛났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머리 위에서 가지를 흔들어댔다. 가끔 새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쥐죽은듯 고요한 사위를 뚫고 터져나오곤 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악마의 수장처럼 내 안에 지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주위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나서 주저앉아 그 폐허를 만끽하고 싶었다. - P182
나는 남은 시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축사 속에서 멍하니 보냈다. 보호자들은 떠났고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처음으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이 내 가슴을 채웠고, 나도 굳이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격류에 몸을 맡기고 상해와 죽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친구들, 드 라세의 온화한 목소리, 아가타의 부드러운 눈빛과 아라비아 여인의 섬세한 미모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솟구치는 눈물이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그러나 새삼 저들이 나를 저버리고 푸대접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분노가 다시 돌아 왔다, 격렬한 분노가. 차마 인간을 해칠 수 없어 사나운 분노를 무생물에 풀었다. - P185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 P187
인간의 얼굴과 마주칠까 두려워 밤에만 여행했다. 사방에서 자연이 쇠락했고, 태양은 열기를 잃었다. 내 주위로 비와 눈이 내렸다. 힘차게 흐르던 강물은 얼어붙었다. 땅 표면은 딱딱하고 차갑고 헐벗어, 도무지 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대지여! 내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에 얼마나 자주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른다! 본성의 온유한 기질은 사라지고, 내면은 온통 울분과 원한으로 화했다. - P187
이것이 내가 베푼 자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했는데, 보답으로 살과 뼈가 박살나는, 상처의 참담한 고통에 뒹굴어야 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내게 찾아왔던 친절과 온정의 감정은 사라지고 지옥의 분노와 앙다문 이빨만 남았다. 고통에 격앙된 나는 전 인류에 대한 영원한 증오와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상처의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맥박이 멈추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 P189
내가 견뎌야 하는 고초는 이제 찬란한 태양이나 부드러운 봄의 산들바람도 덜어줄 수 없었다. 기쁨은 모두 내 쓸쓸한 신세에 모욕을 가하는 조롱에 불과했고, 내 팔자에 환희를 만끽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한층 고통스럽게 실감시킬 뿐이었다. - P189
박수를 치며 나는 외쳤다. ‘나 역시 절망 을 창출할 수 있다. 내 숙적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야. 이 죽음이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줄 테고 천여 개의 다른 불행들이 그를 괴롭히고 파멸시킬 것이다.‘ - P191
며칠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계속 찾아갔다. 가끔은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또다른 때는 인간 세상과 번뇌를 영원히 떠나리라는 다짐 때문에 말이다. 마침내 나는 산맥 쪽으로 정처 없이 흘러가서 거대한 산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오로지 당신만이 만족 시켜줄 수 있는 불타는 정념으로 괴로워했다. 당신이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결코 당신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 내야 한다. - P192
"거절하겠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문을 해도 내 동의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의 눈에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네놈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창조한다면, 둘이 합심하여 악행을 저질러 세상을 참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꺼져라! 나는 이미 대답했다. 고문을 해도 좋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P194
인간의 감각은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 P194
오!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딱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다오! 나도 내가 다른 존재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다오! - P195
어떤 유대도 사랑도 가질 수 없다면, 내 몫은 오로지 증오와 악뿐이다.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면 내 범죄의 원인은 없어져버리고 나는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사물이 될 것이다. 내가 저지른 악행들은 억지로 견뎌야 했던 지긋지긋한 고독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러니 동등한 존재와 함께 살게 된다면 미덕들도 당연히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내가 지각 있는 존재의 애정을 느낄 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소외되어 있지만 존재와 사건의 사슬과도 이어질 것이다. - P197
며칠을 나른한 권태 속에서 보내며 헤아릴 수 없는 장거리를 횡단한 후,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이틀 동안 클레르발을 기다렸다. 그가 왔다. 아,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던가! 그는 새로운 풍광 하나하나에 생생하게 반응했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기뻐했고, 해가 뜰 때는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새날을 시작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풍경의 색채와 하늘 모습을 내게 가리켜 보였다. "산다는 건 이런 거야." 그가 외쳤다. "지금 나는 존재를 만끽하고 있네! 하지만 내 친구 프랑켄슈타인, 자네는 어째서 의기소침하고 슬픔에 젖어 있나?"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음침한 생각에 빠져 저녁 별이 지는 것도, 라인강에 비치는 황금빛 일출도 보지 못했다. 친구여, 당신은 클레르발의 일기를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내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감정과 기쁨을 담은 눈으로 풍경을 관찰했으니까. 비참한 인간쓰레기인 나는 저주에 쫓겨 즐거움으로 통하는 문을 모조리 닫아버렸다. - P208
나는 이제 한 그루 말라죽은 나무다. 번개가 내 영혼을 이미 유린했다. 나는 살아남아서 남들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스스로도 혐오스러운 망가진 인간성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어차피 이마저도 곧 스러져 없어질 테지만. - P217
시련이란 사람들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마저 그토록 무디게 만드는 법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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