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두려움들을 꺾고, 몇 달 안에 받기로 마음먹은 심판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가끔은 내 생각이 이성의 고삐를 풀어버리고 낙원의 벌판을 헤매며, 내 감정에 공감하고 우울할 때 기분을 돋워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감히 상상해보도록 내버려둘 때도 있었다. 그들의 천사 같은 얼굴들이 숨쉬며 위안의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모두 덧없는 꿈이었다. 내 설움을 달래주고 내 생각을 공유해줄 이브는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아담이 조물주에게 했던 청원이 기억났다. 그러나 내 조물주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저버렸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그를 저주했다. - P175

저주받을, 저주받을 창조자! 어째서 나는 살았던 것인가? 어째서 바로 그 순간, 당신이 그렇게 방탕하게 붙인 존재의 불꽃을 꺼버리지 않았던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절망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와 복수의 감정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고 비명소리와 불행을 탐닉할 수도 있었다.
밤이 내리자 나는 은신처에서 나와 숲속을 헤맸다. 이제는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사라져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으로 괴로움을 분출 했다. 마치 올가미를 부수고 나온 야생동물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수사슴처럼 민첩하게 숲속을 횡행했다. 오! 그날 밤은 얼마나 참담했던가! 차가운 별들이 조롱하듯 빛났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머리 위에서 가지를 흔들어댔다. 가끔 새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쥐죽은듯 고요한 사위를 뚫고 터져나오곤 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악마의 수장처럼 내 안에 지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니,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주위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나서 주저앉아 그 폐허를 만끽하고 싶었다. - P182

나는 남은 시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축사 속에서 멍하니 보냈다. 보호자들은 떠났고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처음으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이 내 가슴을 채웠고, 나도 굳이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격류에 몸을 맡기고 상해와 죽음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친구들, 드 라세의 온화한 목소리, 아가타의 부드러운 눈빛과 아라비아 여인의 섬세한 미모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솟구치는 눈물이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그러나 새삼 저들이 나를 저버리고 푸대접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분노가 다시 돌아 왔다, 격렬한 분노가. 차마 인간을 해칠 수 없어 사나운 분노를 무생물에 풀었다. - P185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그러나 동정심과 보상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뿐이었기에,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로부터 받고자 애썼던, 그러나 끝내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 P187

인간의 얼굴과 마주칠까 두려워 밤에만 여행했다. 사방에서 자연이 쇠락했고, 태양은 열기를 잃었다. 내 주위로 비와 눈이 내렸다. 힘차게 흐르던 강물은 얼어붙었다. 땅 표면은 딱딱하고 차갑고 헐벗어, 도무지 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대지여! 내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에 얼마나 자주 저주를 퍼부었는지 모른다! 본성의 온유한 기질은 사라지고, 내면은 온통 울분과 원한으로 화했다. - P187

이것이 내가 베푼 자애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했는데, 보답으로 살과 뼈가 박살나는, 상처의 참담한 고통에 뒹굴어야 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내게 찾아왔던 친절과 온정의 감정은 사라지고 지옥의 분노와 앙다문 이빨만 남았다. 고통에 격앙된 나는 전 인류에 대한 영원한 증오와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상처의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맥박이 멈추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 P189

내가 견뎌야 하는 고초는 이제 찬란한 태양이나 부드러운 봄의 산들바람도 덜어줄 수 없었다. 기쁨은 모두 내 쓸쓸한 신세에 모욕을 가하는 조롱에 불과했고, 내 팔자에 환희를 만끽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한층 고통스럽게 실감시킬 뿐이었다. - P189

박수를 치며 나는 외쳤다. ‘나 역시 절망 을 창출할 수 있다. 내 숙적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야. 이 죽음이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줄 테고 천여 개의 다른 불행들이 그를 괴롭히고 파멸시킬 것이다.‘ - P191

며칠 동안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계속 찾아갔다. 가끔은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또다른 때는 인간 세상과 번뇌를 영원히 떠나리라는 다짐 때문에 말이다. 마침내 나는 산맥 쪽으로 정처 없이 흘러가서 거대한 산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며 오로지 당신만이 만족 시켜줄 수 있는 불타는 정념으로 괴로워했다. 당신이 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결코 당신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외롭고 불행하다. 사람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기형이고 추악한 존재라면 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반려자는 나와 똑같은 종족이고 같은 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바로 이런 존재를 창조해 내야 한다. - P192

"거절하겠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문을 해도 내 동의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네놈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의 눈에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네놈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창조한다면, 둘이 합심하여 악행을 저질러 세상을 참혹하게 만들 수도 있다. 꺼져라! 나는 이미 대답했다. 고문을 해도 좋지만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P194

인간의 감각은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그렇다고 비굴한 노예의 굴종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복수로 돌려줄 테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 누구보다 나의 창조주인, 그렇기에 내 숙적인 당신에게 영영 꺼지지 않는 증오를 다짐하겠다. 조심하라. 내가 당신의 파멸을 초래할 테고, 이 복수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황폐해지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 - P194

오!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다오! 딱 한 가지 은혜를 베풀어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다오! 나도 내가 다른 존재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다오! - P195

어떤 유대도 사랑도 가질 수 없다면, 내 몫은 오로지 증오와 악뿐이다.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면 내 범죄의 원인은 없어져버리고 나는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사물이 될 것이다. 내가 저지른 악행들은 억지로 견뎌야 했던 지긋지긋한 고독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러니 동등한 존재와 함께 살게 된다면 미덕들도 당연히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내가 지각 있는 존재의 애정을 느낄 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소외되어 있지만 존재와 사건의 사슬과도 이어질 것이다. - P197

며칠을 나른한 권태 속에서 보내며 헤아릴 수 없는 장거리를 횡단한 후,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이틀 동안 클레르발을 기다렸다. 그가 왔다. 아, 우리 두 사람은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던가! 그는 새로운 풍광 하나하나에 생생하게 반응했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며 기뻐했고, 해가 뜰 때는 더욱 행복한 마음으로 새날을 시작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풍경의 색채와 하늘 모습을 내게 가리켜 보였다. "산다는 건 이런 거야." 그가 외쳤다. "지금 나는 존재를 만끽하고 있네! 하지만 내 친구 프랑켄슈타인, 자네는 어째서 의기소침하고 슬픔에 젖어 있나?"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음침한 생각에 빠져 저녁 별이 지는 것도, 라인강에 비치는 황금빛 일출도 보지 못했다. 친구여, 당신은 클레르발의 일기를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내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감정과 기쁨을 담은 눈으로 풍경을 관찰했으니까. 비참한 인간쓰레기인 나는 저주에 쫓겨 즐거움으로 통하는 문을 모조리 닫아버렸다. - P208

나는 이제 한 그루 말라죽은 나무다. 번개가 내 영혼을 이미 유린했다. 나는 살아남아서 남들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스스로도 혐오스러운 망가진 인간성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어차피 이마저도 곧 스러져 없어질 테지만. - P217

시련이란 사람들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마저 그토록 무디게 만드는 법이다. -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사막 같은 산맥과 음침한 빙하들이 내 안식처다. 수많은 날들을 여기서 방황했다. 얼음 동굴도 나는 두렵지 않다. 그러니 여기가 인간들이 불평하지 않는 내 유일한 거주지다. 이 황량한 하늘을 나는 반가이 맞는다. 저 하늘은 당신의 동포들보다 내게 훨씬 더 친절했다. 무수한 인류가 내 존재를 안다면, 당신처럼 무장을 하고 나를 파멸시키려 들 것이다. 그러니 나를 혐오하는 그들을 어찌 내가 증 오하지 않겠는가? 원수들을 봐줄 생각은 없다. 내가 불행하니 그들도 내 불행을 함께 느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신은 내 불행을 보상해주고 악행에서 구해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 죄는 점점 더 커져서, 당신과 당신 가족뿐 아니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 분노 속에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저버리든 불쌍하게 여기든 하라. 그때 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내 말을 들어라. 죄지은 자라 해도, 아무리 잔인한 죄인이라 해도, 인간의 법은 선고를 내리기 전 변론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가. 내 말을 들어라, 프랑켄슈타인. 당신은 내게 살인죄를 씌우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피조물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오, 인간의 영원한 정의를 찬양할지어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말을 들어달라. 그다음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지가 있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파괴하도록 하라." - P133

그들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와 처녀는 따로 떨어져서 흐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불행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심히 흔들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불행하다면, 나처럼 불완전하고 고독한 존재가 비참하다는 게 조금은 덜 이상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 귀한 사람들이 불행한 걸까? 쾌적한 집(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이 있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는데. 싸늘할 때 몸을 따뜻하게 덥혀줄 불도 있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서로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날마다 애정과 친절로 가득한 표정을 서로 나누지 않는가. 그들의 눈물은 무슨 뜻일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 처음에 나는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시간이 처음에 수수께끼처럼 보이던 모습들을 설명해주었다. - P147

점차 나는 훨씬 더 의미심장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또박또박 끊어지는 소리를 사용해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 그들이 하는 말이 듣는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쾌감이나 고통, 미소나 슬픔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것은 진정 신과 같은 과학이었기에 나도 터득하고 싶다는 열망이 타올 랐다. 그러나 시도를 할 때마다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사람들의 발음 빨랐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명백한 연관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단서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을 쏟으며 달이 몇 번 공전할 때까지 축사에 머문 결과, 나는 이야기에 가장 친숙하게 등 장하는 물건들의 이름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 이 각각의 소리에 일치하는 관념들을 배우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이해하거나 적용하지는 못해도, 내가 분간할 줄 아는 단어들은 또 몇 개 더 있었다. ‘좋은, 사랑하는, 불행한 같은 말들이었다. 겨울은 이렇게 보냈다. - P148

처음에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해 몹시 어리둥절했지만, 차츰 나는 그가 말을 할 때와 같은 소리를 아주 많이 낸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말 기호들을 그가 이해하는 거라 추측한 나는, 이 기호들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올랐다. 그러나 기호가 지칭하는 소리들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 과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지만 아직 대화를 알아 들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노력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아무리 오두막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도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기 전까지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되었다. 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생김새의 기형을 사람들이 눈감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와 대조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의 기형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 P150

나는 오두막 사람들의 완벽한 외모에 찬탄했다. 그 우아함,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한 얼굴. 하지만 투명한 물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겁에 질렸었던지! 처음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 물에 비친 상이 진짜로 나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쓰라리게 아픈 좌절과 울분의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이 참혹한 기형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 P151

봄철의 상쾌한 소나기와 온화한 따스함에 땅의 면모가 크게 변했다.이런 변화가 있기 전에는 동굴에 처박혀 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흩어져 나와 다양한 농경기술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들이 더 명랑한 곡조로 노래했고, 나무에 새싹이 트기 시작했다. 행복하고 행복한 땅!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량하고 습하고 건강하지 못했던 그곳이 이제는 신 들의 거주지로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의 매혹적인 풍경에 내 정신이 고양되었다. 과거는 기억에서 지워지고, 현재는 고요했으며, 미래는 희망의 밝은 햇살과 환희의 기대로 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 P153

이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이상한 감정이 밀어닥쳤다. 정말로 인간이란 그토록 강력하고 그토록 덕스럽고 훌륭한 동시에 그토록 사악하고 천박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온갖 사악한 원칙들을 이어받은 후계자에 불과해 보이다가, 또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성한 특질을 한 몸에 체현한 듯했다. 위대하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건 분별력을 갖춘 존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다. 기록에 드러난 무수한 사람들처럼 천박하고 사악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저열한 타락 같았다. 이런 상황에 빠지는 건 심지어 눈 먼 두더지나 무해한 벌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친구를 살해하려 들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건지, 아주 오랫동안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행과 유혈사태의 세세한 내용을 듣고 나니, 경이로운 마음은 사라지고 혐오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 P159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과 감정을 모두 떨쳐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미덕과 선한 감정을 우러러보고, 오두막집 식구들의 다정한 태도와 쾌활한 성격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몰래 홈쳐보는 것 외에는 그들과 교류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아가타의 친절한 말, 매력적인 아라비아 여인의 생기 넘치는 미소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온화한 훈계와 사랑받는 펠릭스의 열띤 대화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비참하고 불행한 괴물! - P160

축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의 실험실에서 가져온 옷의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제 그 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에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를 창조하기 전 넉 달 동안 당신이 기록한 일지였다. 당신은 이 서류에 작업의 진척 상황을 세밀히 기록해놓았다. 당신도 틀림없이 이 일지를 기억하겠지. 바로 여기 있다. 내 저주받은 기원에 대해 참조할 사항이 모조리 여기 적혀 있다. 내 탄생까지 이어지는 혐오스러운 정황들이 모두 세세하게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불쾌하고 역겨운 이 몸에 대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언어는 당신 자신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읽어가면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내가 생명을 얻은 그날을 증오한다!‘ 나는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저주받은 창조자! 어째서 자기마저 역겨워 등을 돌릴 흉악한 괴물을 빚어냈단 말인가? 신은 연민을 갖고 자신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더러운 투영이고, 닮았기 때문에 더욱 끔찍스럽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독하고 미움을 받는다.‘ - P174

그사이 오두막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감정은 잔잔하고 평화로웠으나, 내 감정은 날마다 더욱 격해지기만 했다. 지식이 쌓일수록 내가 얼마나 비참한 추방자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물론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나 달빛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볼 때면, 덧없는 허상이고 변덕스러운 그늘일 뿐인데도,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비탄과 공포가 다시 덮쳐왔다. 어스름이 지고 어두운 밤이 사위를 에워쌌다. 시커먼 산맥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내 기분은 더욱 침울해졌다. 온 사방이 광활하고 흐릿한 악의 소굴 같기만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 예언은 들어맞았다. 한 가지 정황이 틀렸을 뿐이다. 무수한 불행을 상상하고 두려워했지만 알고 보니 실제로 견뎌내야 할 운명은 백배 더 가혹했던 것이다. - P97

그녀의 무죄를 믿었다. 알고 있었다. 그 악마가, 내 동생을 죽인(그 사실은 단 1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놈이 심지어 소름 끼치는 놀이 삼아 이 죄 없는 이를 죽음과 치욕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내가 처한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의 의견이, 그리고 재판관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내 불행한 희생자를 단죄하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움에 법정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피고의 고통도 나보다는 덜했다. 그녀는 결백의 힘으로 견디고 있었지만, 회한의 날카로운 이빨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으며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 P110

나는 감방 한구석으로 물러나 나를 사로잡은 소름 끼치는 고뇌를 감추려 했다. 절망! 누가 감히 절망을 논하는가? 다음날 삶과 죽음의 섬뜩한 경계선을 넘을 불쌍한 희생자도 나만큼 깊고 쓰라린 고뇌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박박 갈면서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 P114

진짜 살인자인 나는 가슴에 살아 있는 불사영생의 벌레를 안고 있었다. 이 벌레는 희망도 위로도 허락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도 흐느꼈고, 또한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결백한 불행이었고, 아름다운 달을 스쳐가는 구름처럼, 한동안 숨길 수 있을지언정 그 빛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고뇌와 절망이 내 심장의 핵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 있었고, 그 무엇도 지옥 불을 끌 수 없었다. - P115

아버지는 성품과 습관이 눈에 띄게 달라진 나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시다가 엄청난 슬픔 앞에 무너지는 나의 어리석음을 분별 있게 타일렀다. "빅토르, 아비도 괴롭다는 생각을 넌 하지 않느냐? 누구도 내가 네 동생을 사랑한 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슬픔을 과하게 드러낸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큰 불행을 느낄 터인데 그걸 막는 것도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느냐? 또한 너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지나친 슬픔은 발전도 즐거움도 가로막고 심지어 일상생활까지 방해해서,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린단 말이다."
이 충고는 선의에서 우러나왔으나 내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여타의 감정에 쓰디쓴 회한이 뒤섞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앞장서서 비탄을 감추고 식구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절망스러운 얼굴로 답하고, 최대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 P120

소나무들은 키가 크거나 풍성하 지는 않았지만 어둡고 진중하여 엄혹한 풍광을 두드러지게 했다. 저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광막한 안개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서 피어나 맞은편 산들을 두터운 화환처럼 휘감고 산봉우리들을 모두 짙은 구름에 숨기고 있는데, 어두운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주위를 에워싼 풍광에 우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 P129

우리는 쉰다. 꿈은 잠의 독을 푸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일어난다. 방황하는 생각 하나에 하루가 오염된다.
우리는 느끼고, 사고하고, 추론한다. 웃거나 흐느낀다.
어리석은 괴로움을 껴안거나, 근심을 쫓아버린다.
똑같다.기쁨이든 슬픔이든, 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로우니.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

* 퍼시 비시 셸리의 「무상에 관하여」의 후반부에서 인용 - P129

나는 후미진 암벽에 머무르며, 이 기적과 같은 압도적인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 아니 광막한 얼음의 강은 산 사이로 굽이치며 흘렀고, 꿈처럼 몽롱한 산봉우리들이 후미진 강가 구석구석을 굽어보며 드높이 떠 있었다. 얼음이 반짝거리는 산꼭대기 들이 구름 위에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슬픔에 가득찼던 내 심장은 이제 환희 비슷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방황하는 정령들이여, 진정 비좁은 잠자리에서 쉬지 않고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면, 내게 이 희미한 행복만은 허락해주시오. 아니면 차라리 삶이라는 기쁨에서 나를 데려가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 P130

"악마!" 나는 외쳤다. "감히 내게 다가오겠다는 말이냐? 이 팔이 그 흉측한 머리에 가할 맹렬한 복수의 일격이 두렵지도 않으냐? 어서 꺼져, 이 더러운 벌레! 아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 발길에 짓밟혀 먼지가 되어버려! 아, 네 비참한 목숨을 끝내버리고 네놈이 그토록 사악하게 살해해버린 희생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악마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흉물을 저주하지. 그러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물보다 비참한 나를 얼마나 증오하겠는가! 하지만 당신, 내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내치다니.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내 조건에 동의한다면 나도 인간들과 당신을 평화롭게 내버려두겠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살아남은 당신 친구들의 피로 배부를 때까지 죽음의 밥통을 채울 것이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성공으로 흥분한 가운데 태풍처럼 나를 몰아친 그 다채로운 감정들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야말로 이상적인 목표였다. 내가 최초로 돌파해 어두운 세상에 폭포수처럼 빛이 흘러들게 만들었기에. 새로운 종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 헤아릴 수도 없는 행복하고 탁월한 본성들이 내 덕에 탄생하리라. 나만큼 자식의 감사를 받아 마땅한 아버지는 이 세상에 다시없으리라.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던 나는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지금은 불가능해도) 시간이 지나면 겉보기에는 죽음으로 부패된 육신에도 새 생명을 줄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 P66

완벽한 인간은 언제나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고, 정념이나 찰나의 욕망에 휘둘려 마음의 평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지식의 추구가 이 법칙의 예외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매진하고 있는 공부가 사랑하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어떤 연금술로도 합성할 수 없는 소박한 즐거움을 아끼는 취향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그 공부는 분명 불법적이며 인간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이 항상 준수되었다면, 그리하여 어느 한 사람도 가족의 애정이 주는 평온을 깨뜨리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는 노예국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나라를 삼키겠다는 야욕을 갖지 않았을 것이요, 아메리카는 좀더 서서히 발견되어 멕시코와 페루 제국은 파멸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 P68

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우연들도 사람의 감정만큼 변덕스럽지는 않다. 나는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겠다는 열망으로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 휴식도 건강도 다 포기했다.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으로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하지만 다 끝나고 난 지금, 아름다웠던 꿈은 사라지고 숨막히는 공포와 혐오만이 내 심장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 P72

아! 산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미라가 다시 살아나 움직인다 해도 그 괴물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완의 상태에서 괴물을 찬찬히 뜯어본 적은 있다. 그때도 흉물이었다. 하지만 그 근육과 관절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단테도 상상 못했을 괴물이 되어버렸다. - P73

마치 고독한 길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걷는 사람처럼, 한 번 뒤돌아보고는 다시 걷고, 영영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악마가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음을 알기에.

콜리지의 시 「늙은 수부의 노래」 중에서. - P74

함께 걸어가는 길에 클레르발은 내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애썼다. 흔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진심이 배어나는 동정심으로 달래주었다."불쌍한 윌리엄!" 그가 말했다. "그 어여쁜 아이가. 이제는 천사가 된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겠구나. 친구들은 슬퍼하고 흐느껴 울겠지만 그애는 이제 평온하게 쉬고 있어. 암살자의 손길도 느끼지 못할 테고, 그 보드 라운 몸을 뗏장이 덮고 있으니 아픔도 모를 테지. 우리는 이제 더이상 그애를 불쌍하게 여겨서는 안 돼.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장 괴로운 법이야. 시간밖에는 아무 위로가 없으니까. 죽음은 악이 아니라든가,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영원한 부재 앞에서도 절망을 극복한다는 식의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지. 카토마저도 동생의 시신 앞에서는 흐느꼈으니까." - P95

여정은 몹시 우울했다. 처음에는 슬픔에 빠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어서 빨리 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고향이 가까워지자 발길을 늦추게 되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물밀듯 밀어닥치는 착잡한 감정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익숙했으나 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모든 게 얼마나 변했을까? 확실한 건 급작스럽고 황막한 변화 한 가지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천 가지 작은 상황들이 서서히 또다른 변화들을 일으켰으리라. 훨씬 조용히 진 행된 변화들이겠지만 결정적 의미가 덜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뭐라 형용할 수도 없는 수천 가지 이름 없는 죄악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 P95

길은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다가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좁아졌다. 쥐라의 검은 산등성이와 몽블랑의 빛나는 정상이 전보다 더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아이처럼 흐느꼈다. "다정한 산들아! 내 아름다운 호수야! 방랑자를 어찌 이렇게 반가이 맞아주는 거냐? 봉우리는 선명하고, 하늘과 호수는 파랗고 잔잔하구나. 이는 평화의 전조일까, 내 불행을 조롱하기 위한 걸까?"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시간 내내, 일을 끝낸 제본업자가 말없이 처음에 온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리다는 단 한 번 몸짓도 단 한 번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한참, 이제 분명히 알고 있듯 곧 남편이 될 사람의 크고 근면한 손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침대가에 그대로 앉아서 밀랍 같은 어머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감긴 눈썹, 불현듯 더 크고 강해 보이는 코, 모호하고 불합리하게 행복하게 웃는 것 같은 입술, 너무나 친숙하던 그 모습이 갑자기 달라 보였고, 이제야 세세한 것 전부를 포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 오래된 것, 날카로운 것, 강한 것이 안에서 서서히 풀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 P44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아가씨는 예쁘지 않다. 그녀의 얼굴은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은 매우 흔한 얼굴이다. 당시 서민층 젊은 여성에겐 일반적으로 입술, 볼, 피부를 꾸미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보건대, 극히 평범하고 무난해 보인다. 감춘 듯 언뜻언뜻 비칠 뿐인 젊음의 광채를 띤 검은 눈, 온화함과 인내심 가득한 가축과 다를 바 없이 슬프고 주눅든 표정, 목뒤로 빗어 시골 여자같이 튀어나온 너른 이마를 도드라지게 한 밤색 머리칼, 풍만한 가슴의 작은 몸뚱이에 솟은, 검정 벨벳 띠를 두른 가는 목, 대단치 않은······ 그런 아가씨가 조베카처럼 번화한 거리, 그것도 페라라에서, 어제 못지않게 오늘도 늘 은밀한 저녁식사 자리로 가기 전이면 특히 활기를 띠고 고무되는 그 시간에 도망치듯 지나가는 모습이 사진기 렌즈는 물론 누군가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였을 리 없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 P69

말과 행동, 상상과 실행에는 어쨌든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
하지만 염탐하고 보고하는 즐거움, 추측하고 추론하는 즐거움, 이제 막 공식화된 비타협적이고 굳건한 의도를 뒤엎고 가없이 불투명한 미래로 미루는 공상의 은밀한 즐거움은 그 날 끝 무렵에 생긴 사건의 실체 앞으로 돌연 중단돼야 할 운명이었다. - P77

식당 안으로 안내되어 그가 들어오자, 혼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가장은 얼굴을 들고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 보았다. 의사는 가장의 바로 앞에 마주 앉더니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 성, 아버지, 직업, 심지어 주소까지······ 그의 자기소개는 꼭 규정에 따른 호적부 신고 같았다. 그 특이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비시키는 것 같은 정중한 태도나 식당 분위기에 갑자기 형성된 긴장감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긴 소개는 어쩌면 지겹고 현학적이며 그 장황한 상세함으로 인해 최소한 기괴해 보였을 수 있다. - P79

엘리아 코르코스! 그가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그전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집안의 네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름이 있었어? 의사 직업의 프록코트, 하얀 실크넥타이,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식탁 가장자리 위까지 살짝 솟아오른 챙이 널따랗고 치켜올라간 검은 모자(이 모든 것이 중고품으로 구입했기 때문인지 어딘지 낡고 가볍게 색이 바랬고), 마치 이상한 것을 다루고 불신하는 것같이 조곤조곤 발음하면서 더러 짧은 문장이나 개별 낱말을 사투리로 섞어 풀어내는 장광설, 정상적인 재료보다 더 연약하고 섬세하며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의 원래 가족이 아무리 평범하고 게다가 현재 독신남으로 혼자 살고 있다고 해도 여실해 드러나 보이는 개인의 재정적 지위, 이 모든 것이—그들이 금세 알아차린 바와 같이—그가 부유한 계층에 속하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 P79

"두 갈랫길이 있다면, 하나는 힘들고 어렵고 불확실한 길, 또하나는 쉽고 평탄하고 아주 편한 길 앞에서 솔직히 말해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 자명하지요!" 마지막으로 콧수염 아래 입술이 이따금 감지할 수 없게 옆으로, 분명히 냉소적으로 씰룩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서게 된 길은 진짜로 평탄한 걸까요? 진짜로 쉽고 아주 편리한 걸까요? 그걸 누가 아나요?" - P84

그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그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가끔씩 페라라가 아직 오스트리아 치하였을 때 광장에서 하얀 제복의 병사들이 총검을 장착하고 대주교 궁전 앞에서 보초를 서던 아득한 시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람들은 그 병사들을 증오와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그 당시, 1860년대 이전에는 그도 무척 젊었고 때로는 사람들과 똑같이 그랬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불쌍한 젊은이들, 대개 보헤미아나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특사 추기경의 포도밭 말뚝처럼 거기에 서 있게 된 그 젊은이들한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무기 앞에서는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 명령이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 P96

훌륭한 거실로 불리던 방, 델라기아라 거리 쪽으로 나 있고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어두침침하고 커다란 방의 찬장에 꽂혀 있는 기도서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그 냄새로 배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우실리아가 더러 그 방에 들어가 어둠속에 몇 시간 동안 앉아 혼자 생각에 잠길 때면(젬마가 죽은 뒤인 1926년 그녀가 집안 가정부 자격으로 들어와 엘리아와 여코포와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심지어 1943년 엘리아와 야코포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난 뒤에도, 훌륭한 거실을 마치 은신처같이 이용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불쌍한 살로모네 코르코스 씨도 그 방 안에 뼈와 살을 갖춘 모습으로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마치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고, 소리 없이 숨을 쉬며, 그녀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