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아네트는 잔을 내려놓고 식탁 표면을 손가락으로 길게 쓸었다. "그리고 가끔은요—미친 생각인 거 나도 알아요—그래도 가끔은 대니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누군가가 그이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나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차원에서 저항하는 거겠죠. 누군가가 그렇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 P315

앙투아네트가 나를 보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대니얼의 선택이라면—다른 가능성 말이에요—대니얼이 침묵을 선택한 거라면, 그럼 괜찮아요. 그이의 침묵이잖아요. 미스터리이고요. 그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다만 그이가 조슈아트리에서는 절대로 불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앙투아네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 P317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 대니얼의 부모님은 샌안토니오에 살았지만—나처럼 대니얼도 그곳에서 자랐다—이제 그들의 집은 휴스턴이었다. 칠 년인가 팔 년 만에 장례식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나를 겨우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대니얼의 아버지가 한 연설이 내게는 이상하게도 감동적이었다. 그는 늘 내게 고집불통의 군인 유형이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장례식에서는 아들의 유년기에 대해 유창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아직 대니얼을 알지 못했던 그 시기에 대해, 그때 대니얼이 얼마나 예민한 아이였는지에 대해. 연설을 마치며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자식을 땅에 묻는 불가해한 과제 앞에서는 인생의 그 어떤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떨렸고 내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 P318

그리고 그 주말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생각했다. 앙투아네트와 대니얼이 얼마나 아름다운 커플이었는지, 샌안토니오에서 두 번 만났을 때만 보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러다 무슨 이유인지 혼자 있는 대니얼이 떠오르며, 정말 그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었다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바깥세상의 누구도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힘들었을지. - P324

마침내 눈을 뜨고 앙투아네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짓지는 않았지만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우리는 아주 이상한 이틀을 함께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우리는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쨌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반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 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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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없어." 칼리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뭐든 하긴 해야 해. 그러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야?" - P268

가끔 나는 칼리도 나와 같은 이유로 히메나에게 끌린 건지, 아니면 그녀에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더 내밀하고 더 개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히메나 얘기를 꺼내거나, 그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칼리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방어적이다시피 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이 가까워지고 있고, 우정이 쌓여가고 있고, 그 우정이 나와는, 혹은 히메나와 나의 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칼리와 내가 같은 사람과 독특한 우정을 맺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평행하면서도 별개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 P268

그날 밤에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 칼리를 보며 우리가 처음 여기로 이사했을 무렵 거의 밤마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삼층의 나이 많은 부부가 생각났다. 그때는 우리 둘 다 삼십 대 초반으로 이 건물의 젊은 부부에 속했지만, 이제 칠 년이 지났으니 바로 우리가 그런 인간 화석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당시에는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 뒤에도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도 번듯한 집 하나 없이 제자리에 정체되어 있으리라고는, 아이도 낳지 않고 안정적인 직업도 없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 P270

"뭐, 이름은 에벌린이야." 칼리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알아? 걔는 이제 그 망할 놈의 인턴이 아니란 말이지."
가끔 나는 칼리가 이러는 모습을 보면 슬퍼졌다. 따지고 보면 사실 진짜 문제는 그 여자가 아님을 나는 알기 때문이었다. 칼리를 정말로 괴롭히는 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고, 그것을 그 여자에 대한 온갖 미움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 P273

"내가 이미 한 번 해고된 적이 있어서 그래." 칼리는 나중에 소파에 함께 앉아 있을 때 말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아니까, 내게 무슨 얼룩이 묻은 것만 같아. 회사가 날 다시 채용하긴 했지만, 작년에 봉급도 아주 조금 올려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건 빌어먹을 얼룩이라고." - P273

그날 밤에 칼리는 딱히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 쯤인가 밖에서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칼리가 측면 발코니에 혼자 나가 달빛에 몸이 은색으로 물든 채 앉아 있었 다. 칼리는 헤드폰을 끼고 제 몸을 팔로 감싼 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모으고 앞으로 웅크린 뒷모습이 얼핏 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P276

칼리는 그날 오후에 남부 지역의 소규모 미술관에서 열리는 자선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나는 칼리가 돌아오기 전에 둘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아파트를 청소해놓기로 약속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오로지 히메나가 떠나고 여기에 있지 않게 된다는 생각,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나는 복도에 선 채 내 두 손을 내려다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 P280

〈아랴야〉의 다른 특징. 다큐멘터리이지만 다큐멘터리 같지 않다. 허구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생겨나는 것과 비슷한 시적인 느낌, 분위기가 있다. 지역의 소금 광부들이 연기하는 등장인물이 있고, 실험적인 형식과 구조를 사용한다. 베나세라프는 이 영화를 완성한 뒤 베네수엘라의 여러 영화 및 문화 기관에서 수장을 맡았으나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베나세라프가 이후에 그 걸작을 촬영했던 섬으로 다시 돌아간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히메나는 그렇다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다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 살면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라진 후였어요. 남은 건 유령 도시뿐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요." 히메나가 말했다. "그냥 영화 속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요."
" 왜?"
"왜냐면," 그녀는 말했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은 모른다고요.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찾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잖아." 나는 말했다.
"알아요." 히메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영화 끝부분에서는, 그러니까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요." - P281

나중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인생에 불쑥 끼어든 막간극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다. ‘히메나가 아래층에서 살던 그 엉망진창 시절‘ 혹은 ‘그 아무개가 늘 옆에 있었던 이상한 날들‘과 같은. 하지만 한동안 우리는 히메나가 그리웠다. 대학 신입생이 처음 몇 주 동안 부모를 그리워하듯이 히메나를 그리워했다. 히메나가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우리 둘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느꼈던 위안을 그리워했다. - P285

나는 칼리와 함께 발코니에 앉아서 히메나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말하는 오디오 파일을 재생했다. 히메나는 아직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실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그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소리가 왜곡되고 지직거렸지만 여전히 분명한 히메나였다. 난 타인이 내 예술작품과 교감하기를 희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말했다. 난 무언가를 만들 때마다 나를 둘러싼 가까운 공동체를 생각해요······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을 지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지어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조용히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P286

"있잖아." 얼마 후 나는 칼리와 손가락을 엮은 채 먼 곳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끔 난 우리가 어디로 갔었나 의문이 들어, 칼리."
"무슨 뜻이야?"
" 모르겠어."
"우린 아무데도 안 갔어." 칼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
나는 칼리를 보았다. "하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내가 말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칼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그래." - P287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 고 생각해?"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칼리는 빙긋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어떻게 우리 둘 다 히메나에게 그리도 이끌렸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사실도. - P288

히메나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정말로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에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낸 그 길고 나른한 날들에서. 어쩌면 딴생각을 하게 해줄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거실에 타인의 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도 오래 칼리와 함께 지냈기에 가끔 잊고는 했다. 독신일 때는 그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가, 타인의 몸이, 얘기를 나눌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 P288

"그럼 당신은 여태 여기서 지냈어요?" 답이 자명한 질문이겠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물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집에서 나갔는지 아닌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네." 앙투아네트는 말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 있는다고 더 슬프진 않아요. 그럴 것 같았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대니얼과 더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직도 그이 옷을 입고 잘 때도 있어요." - P300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나는 성격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편이었지만 타냐는 훨씬 더 내향적이고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이었다. 타냐의 성정은 주위에 벽을 쌓고 담요를 누에고치처럼 둘둘 감은 채 소파 위에 누워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니얼의 실종 이전에도 우리 사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문제가 더 악화될까봐 걱정스러웠다. - P304

내 나이 사람들은 그 시절을, 1990년대 초반의 오스틴을 향수에 젖어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마치 1920년대의 파리나 1960년대의 버클리를 얘기할 때처럼. 하지만 때로는 정말로 그런 곳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우리는 우리가 매우 특별한 곳에서, 이 지역 역사의 매우 특별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고 그 시기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시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오스틴은 우리 유년기의 오스틴, 혹은 대학과 대학원 시절의 오스틴과도 닮은 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갈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말하던 ‘4월의 마지막 나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읽었다는 어떤 시의 구절인데 시인의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 P310

"대니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뇌가 끝없는 생각의 고리에 걸려버린 것 같은데, 그걸 끊어낼 수가 없어."
"책을 좀 읽어보면 어때?" 내가 물었다. "텔레비전을 보는 건?"
"텔레비전에 죽음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아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하지. 그러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사방이 온통 죽음이야. 잊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을 일깨우지 않는 방송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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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두어 달만 머물면서 두 친구가 식당을 궤도에 올릴 때까지 도울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두어 달이 두어 해가 되고, 두어 해는 이십 년이 되고 말았다. 그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생각에 빠져버리면 이따금 무서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 P95

그때 리베카는 아직 버티고 있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에도 가끔 그녀의 눈 속에 얼핏 스치는 그 시절의 다른 자아는 라인벡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희미해지기 시작해 소도시를 하나씩 지날 때마 다 점점 더 흐릿하게 멀어지곤 했다. - P111

내 침대 밑에 있는 앨범에는 대학 시절부터 뉴욕 생활 초기 몇 해 동안 우리 셋을 찍은 오래된 사진들이 가득하다. […] 이삼 년 전이었나, 마지막으로 앨범을 봤을 때 우리가 너무 달라 보여서, 그때는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진을 넘겨볼수록 점점 슬퍼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고, 그래서 앨범을 치워야 했다. 그뒤로는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앨범에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맥두걸 스트리트에 있던 내 아파트에서 셋이 함께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진이다. […]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5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지—오스틴 이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지—두 주가 지났고, 때로는 이 시간의 기억 역시 지워질지 궁금해진다. 라인벡에서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날들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 P126

잠자리에 들기 전에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새로운 음성메시지 두 통이 와 있다—하나는 리베카에게서,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에게서. 지금 확인할 수도 있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워버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예전에 뉴욕에서 우리 모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춘이던 그때, 나는 늦은 저녁에 대개는 다른 친구들과 저녁 내내 술을 마신 뒤 둘의 아파트에 들르곤 했다. 86번가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들의 아파트 건물 가장자리가 보이면, 두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늘 어떤 긴장된 설렘을 느꼈다가, 아파트 이층의 불 켜진 창문이 마침내 보이면서 그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오던 그 편안함. 그 때는 그저 소박한 일상 같았지만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건물 아래쪽 입구로 걸어올라가 초인종을 울리면 몇 초 뒤 둘중 하나의 얼굴이 창문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고 웃으며 올라 오라고 손짓할 때의 그 기대감을, 그런 다음에는 인터컴으로 방금 와인을 땄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바깥은 너무 춥지 않냐고 말하던 둘 중 하나의, 대개는 리베카의, 그 목소리를. - P127

흐릿한 조명으로 밝힌 방안에는 스파이더맨 포스터, 이언이 어린이집에서 그린 아름다운 그림,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힌 삼촌과 이모, 고모, 조부모가 보낸 엽서 등이 가득했다. 이 아이는 좋은 삶을, 내 유년기보다 훨씬 수월한 삶을 살아왔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두 부모가 있었다. 친구도 많았다. 너른 뒷마당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도 아이에겐 어쩐지 슬픔이, 불행이, 불만족이 있었다.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 P153

어쩌면 이언은 이런 불행을 내게만 내보였는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자기가 이렇다고 알려주기 위해. 아니면 그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저 자기가 뽑은 패에,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에게 실망한 건지도. 아이가 가장 원한 건 그저 다른 삶이었는지도. - P154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 이언은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순간, 혹은 그전 오 분이나 십 분 동안, 자신이 튜브나 다른 구명 장비 하나 없이 에어매트 위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육아 블로그를 드나들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나. 육아 지침과 육아 조언 칼럼을 집착적으로 읽는 나. 그 순간 나는 미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식음료 테이블 앞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부모로서 단 하나의 주요한 책임, 내 아이를 살린다는 책임을 잊어버렸나? 그때를 돌아보려 했지만—바로 그 순간에 내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봤지만—솔직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물 위의 햇빛, 순간적인 번뜩임, 밝은 섬광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P158

가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삶의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뒤척일 때면 내 바로 밑에 있는 그 상자를 생각했다.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그 기묘하게 개인적인 장신구와 증표들, 시기나 분노 때문에, 혹은 두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정표를 생각했다. 그 상자를 떠올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 P168

"부모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 어쩐다. 다들 얘기하잖아요." 린지가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흔히 떠올리는 변화와는 다를 뿐이죠.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다거나 하진 않아요. 무언가를 해결해주진 않죠. 그저 달라질 뿐이랄까요?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과 다르게." - P181

"어쨌거나," 린지가 물잔을 들며 마침내 말했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 연구 결과가 진실이라 해도 —진실이라는 말이 아니에요—만약 그렇다 해도 중요하진 않아요. 일단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아이가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행복이라는 논제는 뭐랄까, 좀 무관하죠." - P183

그날 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몇 곡 들은 뒤 리아가 다시 〈Thirteen〉을 틀어달라고 했다.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 내가 물었다.
"우리에 관한 거야."
"우리?"
"아빠가 날 학교로 데리러 올 때, 우리가 함께 수영장에 갈 때, 그런 얘기."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했을 법한 방식으로 리아의 오류를 바로잡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노래가 리아에게 그런 의미라면 그 의미가 맞았다. 내가 뭐라고 그걸 망가뜨리나? - P215

"난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뭘?"
"이거." 알렉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라는 걸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나는 아내를 밀어내고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아내가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정통으로 찌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의 어떤 측면에 나는 또한 이끌린다는 사실을. - P226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 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 P230

다른 모든 면에서 히메나는 무척 확신이 강하고 침착한 사람 같았지만,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는 갑자기 모호해지고 작아지고 수줍어졌다. - P249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 P267

히메나는 젊었고,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그 눈길에 연애 감정은 없었겠지만—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진 않았다—같은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 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 땅 위를 걷는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보았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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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뭔가 놓치고 있다거나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보통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가끔 클레어몬트에 사는 부모님이 전화를 걸어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정했느냐고. 혹은 내면의 진취성을 북돋아줄 수 있는 책을 보냈는데 잘 받았느냐고 물어도 쉬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 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도 자신이 가는 길의 일부라고, 마야는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 P52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P58

이런 점진적인 멀어짐은 그해 여름 내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그것을 물리적으로 감지했다. 이제 방안에는 다른 기운이,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마야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뒤쪽 배경 어딘가에서,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그날 밤 침대에 함께 누워 있을 때 마야가 내게 말했다. "내 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라도 해봤냐는 거야."
"해봤지." 나는 말했다.
"했다고? 정말?"
"당연하지." 나는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 P58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자주 편지를 쓰던 시기도, 몇 달간, 때로는 일 년 넘게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낸 시기도 있었다. 그 세월 내내 마야는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거나 그림을 그만둔 이유를 말한 적이 없고 나도 묻지 않았다. 마야에게 그 시절은 단지 인생의 다른 부분인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나와 함께한 인생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현재의 인생과 다른 거라고. - P64

요즘은 예전처럼 마야를 자주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다가도 생각이 날 때는 라이어널의 스튜디오에서 그 수채화들을 발견한 날이 떠오르며, 그날 밤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 누드화 속 인물이 정말로 마야였을까 궁금해진다.
그게 정말 마야였다면, 라이어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직장에서 일찍 돌아온 마야가 그의 스튜디오에 들러 작은 목제 이젤 뒤에 앉은 라이어널 앞에서 옷을 벗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카페에서 일하던 그 오후에 그들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수채화 속 여자가 정말로 마야였다면, 아마도 라이어널이 주지 못했을 그 무엇을 그녀는 그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 P64

"아까 강연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 그거 있잖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와 맺는 관계를 기준으로 판단된다는 말, 그리고 진정한 자아와 조응하 는 행동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말. 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자기 몸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 P87

"그러니까, 내 몸이 더는 내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되느냐고." 내털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머리를 스스로 빗을 수 없게 되면?"
"당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나는 말했다.
"난 지금 굉장히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야, 데이비드."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잖아."
"듣고 있어." 나는 대답하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두려운 거야. 이해해. 나도 두려우니까."
"그런데 요점은 바로 그거야." 내털리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나는 전혀 두렵지 않거든." - P88

그 모든 이후의 일들보다 더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무대 위의 내털리를 보면서 위대함이란,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이란 이런 것임을 깨닫던 순간이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던 활을 바라보던 기억, 공연중 이따금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사라지는 듯하던 내털리, 오르내리는 박자에 맞춰 호흡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 내밀하고 황홀한 느낌에 취해 나는 내털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공연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객석의 청중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모두가 계속 선 채로 몇 분 내내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 P90

나는 최근에 내털리가 겪는 증상—어지럼증과 균형감각 이상—을 생각했다. 두 가지 다 파킨슨병과 연관된 증상이라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고 의사도 ‘염려스럽다‘고 인정했다. 주초에 의사는 검사—혈액 검사 몇 가지와 MRI—를 더 해보자며 내털리를 불렀고 이제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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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이렇게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심야의 윤리적 딜레마, 그것도 우리 중 하나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니—나는 그들에게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정당화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두 인간과 그들 각각의 가족에게 일어난 아주 슬픈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 - P14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 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늘 있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 P21

최근에는 이런 일이 의례처럼 되어버렸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히 채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P24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P26

니코틴 중독의 구덩이로 다시 빠져 버릴까봐 항상 두렵긴 하지만, 그때 내가 한 생각은 그게 아니었고 울기 시작한 이유도 그게 아니었어. 왜 울기 시작했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왜냐면, 당신도 알겠지만, 난 울지 않는 사람이잖아. 아마 오륙 년, 혹은 더 오랫동안 한 번도 운 적이 없을 거야. 그래서 눈물을 불러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 어쩌면 요즘 우리 생활의 압도적인 피로가, 그간의 정신없던 하루하루가 마침내 내 뒷덜미를 잡아서일까, 아니면 오루호가 독한 술이어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추위와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서 깊이 잠든 당신 모습, 그것이 주는 어떤 상실의 감각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오랜만에—그제야 깨달았지만, 사 년 만이었어—담배에 불을 붙여놓고는 연기를 들이마시기도 전에, 담배 연기를 폐 속으로 빨아들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이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그 담배에서는—지금껏 흘러온 시간만으로도 쿰쿰해지고 마르고 쪼그라든 그 담배에서는—내가 기억하는 맛이 전혀 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 P27

누가 알겠어? 더 이상한 일들도 벌어지잖아, 안 그래?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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