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동생은 저기 있어야 해."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기만 했다. 왜냐하면 엄마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 P107

너는 안다, 아니 네가 아는 유일한 것은 그 없이 살 수는 없으리란 것이다. 네가 모르는 것,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너를 사랑했는가이다. 그건 한 번이라도 사랑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너의 어머니는 야위고 헐벗은 코흘리개인 너를 두고 떠나갔으니까. 비에 젖은 짐승처럼 너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 대문 앞에 남겨졌다.
남자를 찾으러 가버린 거라고,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이 한쪽으로 입을 가리고 수군댔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던 말은 곧, 한참 지나지도 않아 너에 대한 말이 되어, 꼭 끼는 옷처럼 너를 옥죄고 역병처럼 너를 전염시켰다. - P110

너는 역시 모른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그녀 자신으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건지를. 네가 물려받은 것, 축복처럼 보이기도 저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들로부터 구하려고 했는지를. - P110

그는 너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그는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를 청하더니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성스럽고도 섬세한 손길로 너의 상처 입고 더러운 발을 씻겨주었다. 너는 네가 왜 그때 그런 결심을 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는데, 아마도 살면서 누군가가 너에게 — 바로 너에게, 폭력이 낳은 아기이자 잔인함의 딸이며, 상처 입은 여자들의 밤이 키운 공주인 너에게 — 처음 해준 다정한 행동 때문이었겠지만, 너는 그 순간 그에게 네 인생을 바치겠다고,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뭐든, 그의 손에 묻은 진흙이 되는 일이든, 그의 것이 되는 일이든, 그의 노예가 되는 일이든. - P114

그의 앞에 있었던 건 너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너는 특별한 여자였다.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여자.
그리고 분별력이 별로 없는 개조차 자신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사람을 충직하게 따르기 마련인데, 너라고 그가 가는 길이 다름 아닌 지옥이라 해도 그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가 사람들에게 한 약속들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불가능한 일까지도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너는 사랑에 감사하는 개처럼 그의 발치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사랑에 미쳐 넋을 잃고 그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마치 그의 입에서 포도송이가, 꿀이, 재스민꽃이, 새들이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 P115

그가 너를 보았다, 그가 분명 너를 보았다고 확신한 너는 네 마지막 숨을 다해 — 너는 죽어가고 있었다 —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천장에 종유석처럼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모랫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경배의 말을 외치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는 그의 열광적인 신도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 P121

포도주. 해방된 두 여인. 마르타는 마리아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릴 봐, 우릴 봐봐, 우리가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즐기고 있다니, 오늘 우린 여전히 상중이니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집은 검은 천들로 뒤덮여 있어야 했고. 그런데 지금 우리 둘만 남겨졌잖아, 동생아, 그 뿐이니, 집안에 남자 하나 없이 우리 둘만 남겨졌다고, 원래는 어미 잃고 남겨진 강아지들처럼 벌벌 떨고 있어야 했는데. - P124

그런 아빠 때문에 모두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이전과는 다른 가족으로 변해버렸다. 어쩌면 그런 성스러운 단어조차 쓰면 안 되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니.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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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곳에서는 햄스터 두 마리가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 그가 불을 켜자 현기증 나는 빛이 비친다. 알전구 불빛에 벽마다 사진이 붙어 있는 게 보인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확대된 사진들. 하나씩 하나씩, 열성을 기울여 제 새끼를 먹어치우는, 거대하게 확대된 햄스터들. 외계인처 럼 생긴 얼굴을 가진 조막만 하고 불그스레한 살덩이들 — 자기 자식들 — 에 박혀 있는 설치류의 작고 귀여운 이빨. 내가 항상 보고 싶었던 사진들이 지금 내 눈 앞에 있고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자기가 낳은 존재들을 먹는 존재. 제 어린 자식들을 먹고 사는 엄마. 실수를 바로잡는 자연의 모습.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미소 짓는다. 그도 미소 짓는다. - P85

그들은 이제 오지 않는다. 수영장은 낙엽과 곤충 사체들로 덮여 있고 나는 그 가운데에 떠서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있다. 가끔 나한테는 햇빛조차 비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거지 같은 마을의 강렬한 태양, 모든 사람들에게 구릿빛 피부와 행복한 얼굴을 선사하는 그 태양이 나만 비껴간다. 나는 희끄무레하기만 하고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자리 없이 벗어나 있다. - P93

벽에다 공을 던지고 있다 보면 나는 뭐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공을 치고 받았고, 그럴 때 나는 외삼촌의 왜건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상상을 한다. 라이카가 짖는 소리, 마리아 테레사의 째지는 웃음소리, 훌리오가 바닥에 축구공을 튀기는 소리를 상상하고 엄마가 자기 오빠를 보고 오빠가 와서 너무 기뻐,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는 정말로 기뻐 보인다. 몇 달 동안이나 다른 것, 그러니까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만 빠져 있던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진짜 기쁜 표정. 엄마는 사랑 노래를 흥얼거리며 레모네이드를 만들러 부엌으로 가고, 목이 긴 유리컵에 생크림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두 덩이를 얹고 그 위에 웨이퍼 스틱을 꽂아 내온다. 외삼촌 먼저야. 외삼촌, 외삼촌, 외삼촌 거야. 가만둬, 손대지 말라니까, 하면서 내 손을 탁 친다. - P93

사촌들이 그립다. 나는 그들이 이곳에 있을 때의 그 소년이 되고 싶다.
울음이 터졌다.
이번 여름은, 그리고 아마도 분명 앞으로 올 내 인생의 모든 여름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미 똥통에 처박혀버리고 만 거야.
갑자기 이 집이 무서워졌다. 지금은 없는 이 집의 모든 남자들. 할아버지, 아빠, 외삼촌, 훌리오. 나도 여기 있기 싫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다른 무엇이 될 순 없는 걸까?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 과거로 갈 수는 있나? — 그래도 여기 있고 싶지는 않다. - P98

나는 엄마를 위해 샐러드를 조금 싸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아래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는데 아직 샤워한 물기가 벗은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의 몸은 내 몸과 같이 생크림처럼 희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약한 빛이 엄마의 몸을 비추고 있었는데, 마치 익사체 같았다. 누군가 막 수영장에서 건져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살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에.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눕혀놓은 것처럼, 다리가 벌어진 자세로.
엄마는 죽었고 그러면 나는 떠날 수 있다. 그렇지. 뭐든 작은 배낭에 쑤셔 넣고 마리아 테레사와 훌리오를 찾아 떠날 것이다. 엄마는 죽었다.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나는 블라인드를 치지 않았다. - P98

"믿음을 가지세요, 여사님. 이 그리스도상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더니 돈을 달라고, 동전이라도 몇 개 달라고 했다. 왜 아주머니는 그리스도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기적을 보여주는 그리스도라면 동전이 가득할 텐데. 버스비가 없어서 가끔은 먼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랑은 달리. - P105

교회 안으로 들어갔더니 […] 또 사진과 쪽지와 지폐와 그림들도 잔뜩 매달려 있었다. 쪽지 중 하나에는 "도와주세요 주님, 저 이제 아옵 쌀바께 안 댔는데 암이래요"라고 쓰여 있었다.
"엄마?"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 중 어떤 게 내 동생인지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아요?"
"아주 똑똑하시거든." - P106

그곳을 떠나기 전 엄마는 로스안데스 케첩 병을 꺼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채웠다.
"좋은 물이야." 엄마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물, 성수야."
내게도 한 모금 마시라고 주었는데, 성스러운 맛이 나기는커녕 그냥 케첩 맛에 녹물 맛이 조금 나서 나는 그냥 케첩 물 아닌가, 월말이 되어 케첩이 거의 다 떨어졌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케첩을 맨밥 위에 뿌려 먹던 그 맛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게 기적일 수는 없었다. 기적이라면 밀크캐러멜 맛이 나거나 더블버거 맛이 나야 했다. 가난의 맛이 아니라.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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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랑이야, 라고 그가 설명했고 나는 네, 라고 말했다. 남자들에게는 항상 네, 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열두 살, 그는 열세 살이었다. 둘 중 누구든 사랑이 뭔지 알았겠는가. - P76

가끔은 아빠도 우리랑 함께 저녁을 먹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식당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변했다.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 속에서 미친 사람들처럼 음식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고 엄마는 밥을 태우고 수프를 흘리고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리곤 해서, 우리 집이 아니라 꼭 정신병원에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날 밤 나는 햄스터 이야기를 했고 다른 사건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오빠들은 역겹다고, 밥 먹을 때 그런 더러운 얘기 하지 말라고 내 팔을 주먹으로 때렸다. 엄마는 부엌에 있었다. 너겟 더 먹을래, 퓌레도 더 먹겠니, 하기에 오빠들은 네, 라고 대답했고 나도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눈물과 함께 음식을 삼켜야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아도 밥은 먹어야 했고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도 밥은 먹어야 했으며 멍이 들어도, 혹이 나도, 아니 죽더라도 밥은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 P77

바네사와 비올레타의 아빠 이름은 토마스였고 사람들은 토마스 씨라고 불렀는데, 좀 무서웠다. […] 그가 집에 오면 우리는 거의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춰야 했고 집 안의 공기에는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그런 것처럼 찌릿하고 메케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그럴 때 우리의 놀이는 병적으로 변했다. […] 그럴 때 나는 천천히 일어나 유령처럼 조용히 계단을 내려간 뒤 숨이 턱 막힌 채 문을 연다. 공기가 더 나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내 것인 공기가 있는 우리 집에 가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우리는 결국 자신을 감싸는 공기로 숨을 쉰다. 자신의 허파가 이유도 모르면서 열렬히 원하는 그 공기. 가엾어라, 멍청한 허파여. 내 육신의 살덩어리. 내 공기의 공기. 내 부모의 딸. - P78

내 쌍둥이 친구의 엄마는 걔들 아빠와는 달리 키가 작았고, 그게 다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히 기억 나는 다른 특징이 없다. 그냥 원피스를 입고 걸어다니는 얼룩 같았다. 이름이 마르가리타였던가 로사였던가, 그런 우아한 느낌이 살짝 있는, 꽃 이름 같은 이름. - P79

내가 자기 집에 와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는 건 나도 안다. 내가 복도를 걷고 있으면 조금 열린 문틈으로 내 모습을 쫓는 검은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가끔 그의 방 옆을 지날 때 나는 내 아랫배에서 어떤 야수 같은 열기가 느껴져 어지러웠는데 그 느낌은 분명 내가 아플 때 느끼는 어지러움과는 달랐다. 햄스터가 계속해서 새끼를 낳고 또 제 새끼를 먹어치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흥분했다. 그 일, 그러니까 설치류가 벌이는 그 카니발리즘은 밤에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쌍둥이들에 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지만, 나도 아빠의 카메라를 가지고 올 생각이 없었고 그 애들도 자기 아빠의 카메라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손을 불태워버릴 거야. 그래서 그 장면을 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해소되지 않았다. - P79

내가 카펫 위에 앉아서 그의 여동생들과 놀고 있었던 것은 그를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그의 헛기침 소리라도 듣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아침에 등교할 때면 종종 동시에 집을 나설 때가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심장이 타악기 마트라카처럼 요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내 상태를 다 알아채고 말 거라 생각했으나 사실 그 시간에는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시간에도. 나의 오빠들이 밤에 그 악마같이 생긴 인형을 가지고 나를 놀래키려고 할 때 나를 쳐다보는 것도 포함한다면, 그래, 그때만큼은 누군가 나를 보고 있기는 했다. - P80

그의 아빠가 가족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나의 아빠는 내가 이전처럼 자주 그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안 좋게 보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머리 없는 집이니까. 꼭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가장이 없는 집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는데 나는 머리 없는 집이라는 말만 생각이 난 다. 머리가 없는 닭처럼, 미쳐 날뛰는. 그 집에 못 가게 된 것이 상처로 남진 않았다. - P82

아마 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같은데, 어느 날부터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졸업했고, 다시는 아무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죽을 것 같았으나,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그의 이름의 마지막 음절을 발음 하게 되면 나는 아스팔트 위에서 녹아 없어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오빠들 역시 졸업했고, 그렇게 꼬마였던 사람들은 이제 그냥 사람이 되었다. 상처는 그대로였지만. - P83

나도 역시 졸업했고 대학에 진학했고 또 학업을 마쳤고 나는 계속해서 남자들에게는 네, 라고 말했고 이 집 저 집에서 벽에 던져져 깨진 값싼 유리컵처럼 나도 그렇게 깨지곤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장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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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나의 엄마가 디아나에게 다가온다. 손을 번쩍 들고 다가온다, 디아나를 때리려고. 나는 사랑 때문에 절망적으로 소리친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그랬어요, 레코드판을 튼 건 저예요. 그러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대로 멈춰 선다. 공중에 손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 횃불만 없는 자유의 여신상 같다. 그녀는 자신이 나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자각했고 선생님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 —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집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 보는 눈이 없을 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일 — 을 하고 있는 걸 내가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없이 방을 나간다. - P57

나는 디아나 부모님 침실 문을 연다. 방 안은 마치 농도 짙은 액체, 무슨 방부액 같은 것이 담긴 수족관 같았다. 공기 중에는 실밥 같은 먼지가 떠다니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큼하면서 달큰한 썩은 내, 최루가스, 천 개쯤 되는 담배꽁초, 오줌, 레몬, 표백제, 생고기, 우유, 과산화수소수, 피 냄새. 빈방에서 날 수 있는 냄새도 아니고 부모님 침실에서 보통 나는 냄새는 더더욱 아니다. - P61

그것은 머리가 달린 괴물이다. 잔뜩 성이 난 누런 이빨. 그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붙어 있다. 썩은 고기에서 나는 악취가 풍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마구 내뱉고 짐승 소리를 내고 으르렁거리고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내 얼굴에 침을 흘린다. 손으로 내 목을 한 대 치더니 목을 조르는데 그 붉게 충혈된 눈을 보니 나를 죽일 것 같고 나를 증오하는 것 같고, 그러니 나는 죽을 것이다. 나는 죽을 거야.
신이시여.
제발, 나는 속으로 말한다, 제발. - P63

고향에 돌아가는 일이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포옹을 하고 눈물을 훔치고 나면 진정한 재회의 순간, 우리는 사실상 이미 달라진 사람들인데 예전처럼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상대방을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니면 아무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순간. 아이고 예뻐라, 진짜 맛있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가식의 말들이 오간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없는 곳에서 우리를 찾고, 우리는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찾는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 P67

나는 이웃집, 그 이상한 오빠의 집 문을 두드린다. 왜냐하면, 우리 집과 불과 열 발짝 떨어진 곳으로 오면서 나는 혼잣말로 쌍둥이 자매들 소식이 궁금하다고 되뇌었지만, 사실 그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해외로 이민 간 가족의 잊힌 아들. 그 남자. 내 어린 시절의 그 소년.
[…]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그가 누구인지 내가 안다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서 우리는 결코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느낀다. 나는 떠난 적이 없고 그는 남겨진 적이 없다. - P68

그 둘이 방에 없을 때 — 예를 들자면 화장실을 동시에 가거나 동시에 목이 마르거나 하니까 — 나는 복도에 나가 있곤 했는데 그런 어느 오후에 누군가 복도에 있는 방문 하나를 열고 나왔고 그렇게 나는 둘째 오빠, 그 이상한 오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뭐 하나 좀 보여줄까, 하고 내게 물었고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뭔가 보는 것을 좋아했고 남자들에게는 항상 네, 라고 말했으니까.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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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이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번은 폭설이 그친 무렵, 눈 덮인 논가 국도를 달리다가 가슴이 심하게 뛰고 숨쉬기가 어려워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워둔 적도 있었다. 마음의 보호대 같은 것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덜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가 사라진 것 같았다. - P12

지우는 개새끼라는 말은 개의 새끼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개는 가짜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의 ‘가짜‘ 자식을 뜻하는 멸칭이라고 했다. 지우는 거기까지 설명하더니 나쁜 말이네, 라고 말하고는 앞으로는 그 단어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더니 개새끼, 미친놈, 씨발놈 어느 것 하나 쓸 만한 말이 없다면서, 인간은 왜 이렇게 치졸하냐고, 왜 꼭 약한 사람을 짓밟는 식으로밖에 욕을 못 만드느냐고 했다. - P13

개새끼. 어원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로 그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의 바짓자락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P13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그때의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서처럼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깝고 끈끈해서 속까지 다 보여주고 서로에게 치대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했다. 나에게 결혼은 그런 것이었지만, 더이상 그런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추우면 창문을 닫고 목이 마르면 물을 따라 마시는 내가 보였다. 여전히 어려운 밤을 보내면서도, 예전처럼 몸을 쥐어짜며 울지는 않는 내가 보였다. 두 시간, 세 시간을 이어 잘 수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지만 ‘나아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 P14

"니 젊음이 아까워. 남자도 다시 만나야지."
엄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몇 번이고 후후 불어 마셨다.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엄마."
"너, 사람들이 이혼녀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아? 다들 뒤에서 뭐라 해."
나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엄마. 사람들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네. 무언가를 심으려고 하나봐. 여름이랑 가을에는 바깥 풍경이 볼만하겠다.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P16

‘그래도 김서방은 참 착해‘ 엄마는 늘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에 든다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전남편은 그런 의미에서 엄마에게 착한 남자였다. 그가 바람피운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 P17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P18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9

할머니에게 나는 손녀라기보다는 대하기 어려운 삼십대 초반의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역성들어줄 손녀라기보다는 사이 안 좋은 딸의 나이든 자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이의 난감함, 어색함, 어려움이 나쁘지 않았고 그런 감정들의 바닥에 깔린 엷디엷은 우애가 신기했다. - P23

"맛있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는데 진분홍빛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드라이를 했는지 짧은 머리카락에 볼륨이 살아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져서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박대의 살을 발라내어 할머니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반건조된 살은 쫄깃했고 기름에 튀겨지듯 구워진 껍질도 고소했다. 예의를 차려서 조금씩 먹으려고 했는데 입맛이 돌아서 정신없이 먹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좋은 포만감이었을까. 그렇게 먹다보니 할머니와 별로 말도 나누지 못하고 밥 한 공기를 금방 다 먹어 버렸다.
"밥은 같이 먹어야 맛이야."
할머니의 말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어떤 사람과 먹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 다르니까.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는 게 훨씬 더 편한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밥은 맛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먹는 밥은 맛이 있었다. - P27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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