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널 행복하게 해줄 참한 남자를 못 만나니?" 엄마는 말한다. "좀 착하고 단순한 사람. 지식인이니 철학자니 하는 인간 말고" 우리는 링컨센터에서 열린 정오 콘서트를 보고 나서 9번 애비뉴를 걷고 있다. 엄마는 한 손을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쳤다. "왜 맨날 무능한 놈이랑 헤어지면 또 그런 놈을 고르는 거냐고? 말 좀 해봐라. 너 엄마 불행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지? 그게 뭐 하는 짓이냐고?" "제발, 엄마. 그만해." 내 목소리가 더 기어들어갔다. "내가 남자를 ‘고르는‘ 게 아니야. 그냥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냥 여기서 살고 있을 뿐이라니까.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겨. 그 사람에게 끌려. 그래서 끌리는 대로 해. 가끔은 마음속 저 안쪽에서,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도 해. 혹시 이 사람과 진지해질 수도 있을까? 이 남자가 내 애인, 내 남편이 될 가능성도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대체로 떨쳐내. 왜냐면 이게 인생이니까. 엄마. 연애도 하고 사건도 생기고 열정도 생기고, 그렇게 삶이 굴러가는 거야. 그 안에 결혼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 P186
남자와 나는 기자 간담회에서 만났다. 서로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끌렸고 그 뒤로 믿기지 않는 행복이 찾아왔다. 그 한 달 내내 꼭 붙어 지냈다. 콘퍼런스가 끝난 다음 나는 뉴욕으로 돌아오고 그는 하던 작업을 마저 끝내기 위해 중서부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6주 후에 뉴욕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는 으레 내가 집에 도착할 무렵 전화를 하기로 약속했다. 2주가 지났고 전화는 없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취재 중이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2주 동안 농축된 불행이 내 인생을 잠식했다. 그 불행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인식하고 잠들기 직전에 인식하는 실체였다.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새벽이면 깨어나 내가 처한 상황을 상기하고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집 안을 서성댔다.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 P189
우리가 걷는 이 도시는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격정의 드라마에 길바닥 버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유리문이 없는 공중전화기 앞에서 한 남자가 부스 안을 발로 쾅쾅 차며 수화기 건너편 상대에게 소리를 친다. "지금 간다고 했잖아!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왜 가는지 안 가는지 자꾸 물어?" 구석에서는 여고생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폴리에스테르로 된 최신 유행 옷차림을 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옆을 지나는데 한 학생이 다른 두 친구에게 말한다. "그래서 내가 토니한테 그랬지. 질척거리지 좀 마. 나는 그렇게 들러붙는 남자 딱 질색이야." 엄마와 나는 조용조용 조심스레 공중전화기 앞 남자의 말도 엿듣고 골목 학생들 말도 엿듣는다. 엄마는 나를 옆눈으로 살짝 보더니 말한다."너 그 러시아 속담 알아?" 아니, 몰라. 내가 러시아 속담을 안다고는 말 못하겠네. 엄마는 러시아어 한 문장을 읊조리더니 번역한다. "썰매를 타고 싶으면 끌 준비도 해야 한다." 우리는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도착할 무렵 나쁜 감정이 조금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P190
침묵. 예상치 못한 긴 침묵이다. 매릴린은 한숨 쉰다. "넌 여전히 너희 엄마랑 똑같구나." 그가 말한다. "뭐?" 나는 숨을 들이쉰다. "무슨 말이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남자를 골라, 그런 다음 엄청나게 이상화를 해. 그다음엔 그 사람이 더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충격을 받아. 그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니? 자기가 아니라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는 걸? 그다음부턴 네가 무조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그게 어떻게 우리 엄마랑 닮았다는 거야?" "너희 어머닌 결혼 자체를 너무 이상화하셨잖아, 그리고 그 결혼이 끝나버리니까······ 넌 그러지 마라. 공허감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거야." - P193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심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에겐 최소한의 상호관계가 필요하며 그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생경하기만 할 뿐이다.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너는 나한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고 이 상태를 개선해줄 수도 없어.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의무는 이해를 해야지. 내 이 모든 절망과 박탈감을 치료해주기에 너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일 깨닫고 사는 게 네 운명이야." - P195
나에게 상상이라는 세계는 언제나 문제투성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이 극단적일 정도로 깊숙이 다가왔다. 너무 깊고 좁고 강했다. 이 거리의 껄끄러운 현실들, 공기마저 하얗게 느껴지는 약국, 도서관 원목 바닥의 입자들, 식료품점 냉장고의 치즈 조각들을 내 세계의 전부라 여겼다.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 P197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 젊은 청년들 옆에 영문과 여학생들이 있다. 대부분 중서부 출신으로 피터팬 칼라(작고 둥근 플랫 칼라) 옷을 입고 내면에 열정을 품은 채 침묵을 유지하다가 3학년쯤 되면 이 전도유망한 남학생 중 한 명과 약혼을 한다. 그중에는 굉장히 명석한 여자가 많았다. 한 명은 이지적인 시를 썼고, 또 한 명은 헨리 제임스의 정신세계를 분석했고, 또 한 명은 에드먼드 스펜서의 장편서사시 「요정 여왕」을 재해석했다. […]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다른 말로 하면 뉴욕 출신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윈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 P201
나는 시종 불편하고 불안한 길을 가면서 내가 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단정하지 못했다. 나 또한 ‘조신하지 못한‘ 특징들을 끌고 버클리로 왔다. 이 세계의 마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즉에 알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과 내가 불화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의 불안함, 두려움, 방어 본능 때문이었다. 나? 나는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따지고 말대꾸하는 아내를 원하지 않고,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해"라는 말에 내가 아는 경멸을 가득 담기로 했다.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 P204
스테판은 왜 나와 결혼했을까? 나에게서 뭘 원했을까? 똑같은 것, 나와 같은 것을 원했다. 나 또한 그가 상상한 삶의 지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일단 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합격. 또 윤리의식 투철한 유대인 여자다. 더 좋지. 나는 예술이라는 신전을 경외한다. 이제 만점이다. 우리가 함께 산다면 둘 다 안정적으로 우리 운명인 창작에 전념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영혼의 환상에서 탄생한 결혼이라 할 수 있었다. 기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강하게 끌리지도 않았고 서로에게 낭만적인 애착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불행을 살아내야만 서로를 원하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 P207
처음으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내 몸에는 보헤미안의 피가 흐르지 않았고 그에게는 모범 시민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나는 물리적인 환경의 부조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는 완벽하게 정리를 마친 듯한 단정한 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명료한 사고를 섬겼고 그는 신비로운 계시에 끌렸다. 매일 낮이면 짧지 않은 불행의 순간들이 찾아왔고 거기에서 회복되는 데 몇 시간씩 걸렸다. 매일 밤이면 우리의 혼란, 우리의 갈망, 우리의 고집을 침대로 가져갔다. 육체가 휴식을 가져다주는 순간도 있긴 했으나 길어야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성애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아침이 찾아오면 전날 저녁과 똑같은 크기의 외로움만 남았다. - P213
결혼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스테판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끓였네." 나는 충격받았다. 우리 둘 다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피 맛을 따지지도 않았고 맛이 있건 없건 누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 맛없는 커피는 나라는 인간의 결함이 되었다. - P216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매일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원할 수 없게 생겨먹은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점점 자기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양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밀려나 찌그러지면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평범한 생활이야! 왜 모든 게 이렇게까지 힘에 부쳐야 하지? 왜 우리는 늘상 화가 나 있거나 긴장해 있지? 왜 시도 때도 없이 상처받고 이것에도, 저것에도, 고작 저 따위 것에도 이토록 생각이 다른 거지? - P221
그날 흔들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테판이 내 서재로 들어오더니 같이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무릎에 있던 책을 다시 들고 가기 싫다고 했다. 이 장 마저 읽어야 해. 이튿날 밤에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싫어, 오늘 너무 피곤해. 그 이튿날 밤엔 학교에서 열리는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신 혼자 가. 그런 데 갈 기분이 아니네." 그는 문가에 서서 나를 한참 동안 주시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건 다 싫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거나. 어? 뭘 어떻게 해도 네 성에는 안 차잖아. 마음에 안 들잖아. 아니야? 넌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해. 백날 그래.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넌 항상 불만족스럽고, 실망해 있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노력은 요만치도 안 해. 그저 불만만 가득해서는 그 빌어먹을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잖아." - P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