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까지만 사랑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내 안에서 무언가 불투명해졌고 그에게 줄 게 없어졌다. 나에겐 그 불투명한 막이 보였다. 입으로 맛볼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향한 내 감정과 나 사이에, 아니 어떤 남자가 됐건 그와 나 사이에, 확신할 수 없는 일종의 투명 막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그 막으로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도 그 말이 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느껴지게 할 수는 없었다. - P239

그 시절 사람들은 나 같은 여자들을 신여성, 해방된 여성, 별난 여자라고 불렀다(개인적으로는 별난 여자를 선호했고 지금도 그렇다). 낮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면 내가 생각해도 난 신여성에, 해방된 별난 여자가 맞았다. 그러다 밤이 오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면 엄마가 나보다 먼저 구체화시켜놓은 바로 그곳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 일어날 때가 안 됐어. 불행과 난 아직 끝난 게 아냐.‘ - P24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P251

나는 책상에 앉아서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다. 이 행동을 이렇게 묘사하기를 좋아해서 몇 년 동안이나 말해왔다.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야." 엄마가 살려고 기를 쓴 것처럼. 엄마는 아침에 다리를 침대 옆으로 내려놓는 행위만으로도 금메달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냥 책상에 앉아 있을 뿐이면서 기를 쓴다고 말한다. - P256

상상해보라. 나는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서 살고 있고, 내일 아침에 분명 전화가 걸려 온다는 것만 빼곤 확언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 슬퍼하거나 눈물바람으로 지내거나 작은 일에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화가 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재미만 있다. 분명 적응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세상 어느 누가 자기 인생과 진정 화해한단 말인가.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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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도 발끝을 들고 걷는다. 옛집은 지층이어서 내 걸음의 무게나 진동에 제약이 없었다. 대신 넓이와 높이가 몸을 옭아맸다. 제자리뛰기를 하면서, 나는 높이 갈 수 없겠구나. 멀리뛰기를 하면서는, 멀리도 못 가겠구나. 방은 매일 조금씩 좁아졌지만 나는 자유의 품이 줄어도 자유는 자유라고 믿었다. 어떤 믿음은 강한 체념인 줄 모르고. 체념을 몸에 칭칭 감고 터무니없이 믿고 또 믿고. - P21

밝을 때 잠이 들어 사위가 조용하고 깜깜한 시간에 눈을 뜨는 일이 두렵다. 그 상황은 내가 어찌해야 한다고 아직 배우지 못한 감정들을 배태한다. 내내 살기 귀찮고 싫었을 뿐이지 죽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저 상황에서는 간절히, 매번 그랬다. 그렇게 돌연 몸이 감정부화기가 되는 순간. 다행히 부화기를 끄는 법을 일찍 찾았다. 나는 손에 집중했다. 방안이 어둠과 침묵으로 꽉 차고 혼자일 때 손의 행방은 중요했다. 몸이 부엌으로 가도 손이 칼로 가지 않으면, 다리가 창문 위로 올라가도 손이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 괜찮았다. 그게 어려울 때는 손과 손이 서로를 꽉 붙들도록 했다. 깍지를 끼고 손톱이 손등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을 줬다. 그렇게 서로를 꼭 쥔 두 손의 모양이 언제나 교차로에서 움찔움찔하는 심장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 P24

매일 낱말들이 나에게서 탈출한다. 적게는 몇 개가, 많게는 수십 개의 낱말들이. 그중 한둘만이 내게 잡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잡힌 건 단짝. 홑‘단‘에 한글 ‘짝‘이 손잡은 단어. ‘서로 뜻이 맞거나 매우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 또는 그러한 친구‘란 의미의 單짝은 태생부터 다른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이질감, 불일치를 선천적 조건으로 갖고 있다. 單과 짝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툭 치고 멀어질 것 같다. 발음할 때마다 자꾸 ‘혼자이면서 가끔 쌍을 이룬다‘라는 의미로 수정된다. - P25

다시 보니 單짝은 혼자가 문제인 사람과 쌍이 문제인 사람의 단합 같다. 두고 보니 삶의 문제가 대개 혼자이거나 쌍이어서 생긴다는 의미의 철학 개념어 같기도 하다. - P26

예상한 대로 엄마는 내게 병원에 함께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엄마가 보호자 없이 병원에 가는 건 싫다. 내가 싫어서 하는 일이다. 내 집에서 엄마 집까지 실려가며, 실려가는 일은 새삼 처지를 곱씹게 한다고 썼다. 연필을 쥐고 노트를 펼쳐서. 밤을 두려워하 면서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처지, 밤마다 숲을 거닐고 싶다고 남산을 보며 생각하는 나의 처지, 약을 한 움큼 먹고 엄마의 무릎 고름을 짜러가는 나의 처지, 매일 고양이의 꼬리에 매달리는 나의 처지, 눈을 뜨는 순간 머리 위로 하루가 주저앉아 짜부라지는 나의 처지를 이어서 쓰면서 누군가를 꼭꼭 씹어 사랑하고 싶어졌다. - P28

분명한 밤, 의심의 여지없이 까만 밤 꽃병의 물을 간다. 이 꽃의 이름이 뭐였더라. 캔자스 블루. 자잘한 보라색 꽃이 종이로 구깃구깃 접어놓은 것처럼 줄기에 꽂혀 있는데 잠시 손으로 꾹 눌러 생화임을 확인해볼까 망설이다가 마음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망설임이 추락을 부른 줄 알았다. ‘확인‘ 때문이었다. 생화의 반대는 조화이고 조화는 다른 재료를 가지고 인공적으로 만든 꽃을 의미하지만 살아 있는 것, 삶이야말로 가장 인공적인 게 아닌가 스산해서 내가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확인해서 뭘 우위에 두고 싶었던 건지 알 듯 모를 듯하여, 추락이다. 살아 있는 게 왜 모욕인 줄 모르냐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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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유코는 "내가 나에 대해 단언할수록 나는 거짓말이 되었다"고 했고, 엘렌 식수는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면서도 일부는 나에게서 빠져나간다"고 했다. 비슷한 문장 중 주디스 버틀러의 것을 제일 좋아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 안에는 내가 아닌 무언가가 이미 들어와 있다"라는 그의 글을 반복해 읽으면 이미 ‘나‘ 안에 들어와 있는 무언가로 공포영화를 여러 편 찍을 수 있다. 어쨌든 나는 거짓말이고, 어쩌다 남은 것들이고,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의 이웃이므로 나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음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 P12

나는 늘 집에 창문을 잊지 않고 그리는 내담자였다. 첫 상담에서는 동그란 창을 아주 조그맣게 그렸다. 상담사가 그래도 소통의 의 지가 없지 않네요" 해서 창문의 상징성을 눈치챘다. 나라는 존재의 이 끝과 저 끝 사이 어디쯤에 소통의 의지가 있는지 모른다는 게 다음 문제였다. 가령 내 손가락은 너무도 의지가 넘치는 것 같았지만 타인을 만지기도 타인의 손에 잡히기도 싫어했다. 마음이라는 게 크고 작은 비유로 가득차 있는, 세상의 사물들이 처음과는 다른 모양과 위치로 뒤섞인 고물상과 같다는 걸 눈치챈 건 조금 더 후다. 고물상에는 내 손가락도 있었다. - P14

달빛 아래 템즈 강변에서 나를 굽어보던 그의 이마가 푸르게 빛났다. 그렇다고 말 하자 그가 쑥스러워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흑인들이 주로 달 밝은 밤에 청혼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
정말?
농담.
농담이 아니길 바랐다. 그가 언젠가의 달빛에 기대 자신처럼 푸르게 빛나는 이마의 사람에게 청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잠시 오렌지빛 가로등이 꺼지길. 마주선 두 사람이 서로를 반사하며 물망의 색으로 물들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그립다. 그런 순간의 목격자가 되고 싶다. 열망의 대상이 아닌 열망들의 목격자. 그는 내게 "정말 거절할 줄 모르네" 하고 웃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진실로 원하는 걸 도무지 몰랐고 결국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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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오늘은 나 또한 거리 공연가니까. 나는 언제나 그들의 배짱, 재능, 뉴요커들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그 장악력에 감탄하곤 했다. - P225

심장에 무거운 것을 달고 다니면 몇몇 동작에 제한이 생기긴 해도 활동성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뒤뚱거리거나 몸이 한쪽으로 기울게 되겠지만 곧 그 걸음에도 적응이 된다. 편안함이나 홀가분함의 부재는 우리 사이의 일상적인 조건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에 맞춰 살 수가 있었다. 딱하게도 계속 그렇게 살았다. 그 조건을 견뎠을 뿐만 아니라 불편함과 어려움을 강렬한 욕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해석하는 습벽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 P232

우리 대사는 언제나 "일이 안 돼. 생각도 안 나!"였다. 그 말은 우리 사이의 신성한 주문이라도 되는 듯 울려 퍼진다. 기도요 찬양이요 관능과 회복의 길로 향하는 의식의 서문이다. 때로는 그가 화를 터트린다. "일을 못하겠어!" 혹은 내가 그렇게 말한다. 이 문장은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어놓았던 고압실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온다.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하게 부끄럽지 않고 두렵지 않은 고백이었다. 이 약점을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우리는 공통으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좀더 우월한 종류의 무능력으로 끌어올렸고 서로에게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일이라는 미명 아래 괴로워하는 건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도 다가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패가 되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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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널 행복하게 해줄 참한 남자를 못 만나니?"
엄마는 말한다. "좀 착하고 단순한 사람. 지식인이니 철학자니 하는 인간 말고" 우리는 링컨센터에서 열린 정오 콘서트를 보고 나서 9번 애비뉴를 걷고 있다. 엄마는 한 손을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쳤다. "왜 맨날 무능한 놈이랑 헤어지면 또 그런 놈을 고르는 거냐고? 말 좀 해봐라. 너 엄마 불행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지? 그게 뭐 하는 짓이냐고?"
"제발, 엄마. 그만해." 내 목소리가 더 기어들어갔다. "내가 남자를 ‘고르는‘ 게 아니야. 그냥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냥 여기서 살고 있을 뿐이라니까.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겨. 그 사람에게 끌려. 그래서 끌리는 대로 해. 가끔은 마음속 저 안쪽에서,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기도 해. 혹시 이 사람과 진지해질 수도 있을까? 이 남자가 내 애인, 내 남편이 될 가능성도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대체로 떨쳐내. 왜냐면 이게 인생이니까. 엄마. 연애도 하고 사건도 생기고 열정도 생기고, 그렇게 삶이 굴러가는 거야. 그 안에 결혼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 P186

남자와 나는 기자 간담회에서 만났다. 서로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끌렸고 그 뒤로 믿기지 않는 행복이 찾아왔다. 그 한 달 내내 꼭 붙어 지냈다. 콘퍼런스가 끝난 다음 나는 뉴욕으로 돌아오고 그는 하던 작업을 마저 끝내기 위해 중서부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6주 후에 뉴욕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그는 으레 내가 집에 도착할 무렵 전화를 하기로 약속했다. 2주가 지났고 전화는 없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취재 중이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2주 동안 농축된 불행이 내 인생을 잠식했다. 그 불행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인식하고 잠들기 직전에 인식하는 실체였다.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하고 새벽이면 깨어나 내가 처한 상황을 상기하고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집 안을 서성댔다. 이제 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니라 레싱의 소설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집착이라는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는 액자였다. 나는 액자처럼 좁은 이 공간을 음울하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 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격정과 부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 여성이다. - P189

우리가 걷는 이 도시는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격정의 드라마에 길바닥 버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유리문이 없는 공중전화기 앞에서 한 남자가 부스 안을 발로 쾅쾅 차며 수화기 건너편 상대에게 소리를 친다.
"지금 간다고 했잖아!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왜 가는지 안 가는지 자꾸 물어?" 구석에서는 여고생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폴리에스테르로 된 최신 유행 옷차림을 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옆을 지나는데 한 학생이 다른 두 친구에게 말한다. "그래서 내가 토니한테 그랬지. 질척거리지 좀 마. 나는 그렇게 들러붙는 남자 딱 질색이야." 엄마와 나는 조용조용 조심스레 공중전화기 앞 남자의 말도 엿듣고 골목 학생들 말도 엿듣는다. 엄마는 나를 옆눈으로 살짝 보더니 말한다."너 그 러시아 속담 알아?" 아니, 몰라. 내가 러시아 속담을 안다고는 말 못하겠네. 엄마는 러시아어 한 문장을 읊조리더니 번역한다. "썰매를 타고 싶으면 끌 준비도 해야 한다." 우리는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도착할 무렵 나쁜 감정이 조금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P190

침묵. 예상치 못한 긴 침묵이다. 매릴린은 한숨 쉰다. "넌 여전히 너희 엄마랑 똑같구나." 그가 말한다.
"뭐?" 나는 숨을 들이쉰다. "무슨 말이야?"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남자를 골라, 그런 다음 엄청나게 이상화를 해. 그다음엔 그 사람이 더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충격을 받아. 그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니? 자기가 아니라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는 걸? 그다음부턴 네가 무조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그게 어떻게 우리 엄마랑 닮았다는 거야?"
"너희 어머닌 결혼 자체를 너무 이상화하셨잖아, 그리고 그 결혼이 끝나버리니까······ 넌 그러지 마라. 공허감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거야." - P193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심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에겐 최소한의 상호관계가 필요하며 그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생경하기만 할 뿐이다.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너는 나한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고 이 상태를 개선해줄 수도 없어.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의무는 이해를 해야지. 내 이 모든 절망과 박탈감을 치료해주기에 너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일 깨닫고 사는 게 네 운명이야." - P195

나에게 상상이라는 세계는 언제나 문제투성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이 극단적일 정도로 깊숙이 다가왔다. 너무 깊고 좁고 강했다. 이 거리의 껄끄러운 현실들, 공기마저 하얗게 느껴지는 약국, 도서관 원목 바닥의 입자들, 식료품점 냉장고의 치즈 조각들을 내 세계의 전부라 여겼다. 이 모든 현실의 조각을 너무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상상력이라고는 없었다. 이 모든 사물과 외관과 감회에 바보처럼 열중했고 그것이 세계의 전형적인 얼굴이라고 여기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거리였고 이 건물이 세상의 모든 건물이었으며 이 여자 남자들이 세상의 모든 여자 남자 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 P197

버클리대학교 영문학과는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 젊은 청년들 옆에 영문과 여학생들이 있다. 대부분 중서부 출신으로 피터팬 칼라(작고 둥근 플랫 칼라) 옷을 입고 내면에 열정을 품은 채 침묵을 유지하다가 3학년쯤 되면 이 전도유망한 남학생 중 한 명과 약혼을 한다. 그중에는 굉장히 명석한 여자가 많았다. 한 명은 이지적인 시를 썼고, 또 한 명은 헨리 제임스의 정신세계를 분석했고, 또 한 명은 에드먼드 스펜서의 장편서사시 「요정 여왕」을 재해석했다. […]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다른 말로 하면 뉴욕 출신 유대인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윈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 P201

나는 시종 불편하고 불안한 길을 가면서 내가 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단정하지 못했다. 나 또한 ‘조신하지 못한‘ 특징들을 끌고 버클리로 왔다. 이 세계의 마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진즉에 알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과 내가 불화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의 불안함, 두려움, 방어 본능 때문이었다. 나? 나는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따지고 말대꾸하는 아내를 원하지 않고,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 같은 여자를 무서워해"라는 말에 내가 아는 경멸을 가득 담기로 했다. 그런 두려움은 수준 낮고, 교활하고, 비딱하고, 졸렬하고 기생충 같은 것이다. 나 같은 여자를 겁내는 남자는 혀로 채찍을 휘둘러 아랫도리를 마비시켜버려야 한다. - P204

스테판은 왜 나와 결혼했을까? 나에게서 뭘 원했을까? 똑같은 것, 나와 같은 것을 원했다. 나 또한 그가 상상한 삶의 지도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일단 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합격. 또 윤리의식 투철한 유대인 여자다. 더 좋지. 나는 예술이라는 신전을 경외한다. 이제 만점이다. 우리가 함께 산다면 둘 다 안정적으로 우리 운명인 창작에 전념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영혼의 환상에서 탄생한 결혼이라 할 수 있었다. 기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강하게 끌리지도 않았고 서로에게 낭만적인 애착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불행을 살아내야만 서로를 원하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 P207

처음으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내 몸에는 보헤미안의 피가 흐르지 않았고 그에게는 모범 시민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나는 물리적인 환경의 부조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는 완벽하게 정리를 마친 듯한 단정한 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명료한 사고를 섬겼고 그는 신비로운 계시에 끌렸다. 매일 낮이면 짧지 않은 불행의 순간들이 찾아왔고 거기에서 회복되는 데 몇 시간씩 걸렸다. 매일 밤이면 우리의 혼란, 우리의 갈망, 우리의 고집을 침대로 가져갔다. 육체가 휴식을 가져다주는 순간도 있긴 했으나 길어야 시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성애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아침이 찾아오면 전날 저녁과 똑같은 크기의 외로움만 남았다. - P213

결혼하고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스테판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끓였네." 나는 충격받았다. 우리 둘 다 커피 애호가가 아니라 커피 맛을 따지지도 않았고 맛이 있건 없건 누가 커피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식탁 위 맛없는 커피는 나라는 인간의 결함이 되었다. - P216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매일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원할 수 없게 생겨먹은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점점 자기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양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밀려나 찌그러지면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평범한 생활이야! 왜 모든 게 이렇게까지 힘에 부쳐야 하지? 왜 우리는 늘상 화가 나 있거나 긴장해 있지? 왜 시도 때도 없이 상처받고 이것에도, 저것에도, 고작 저 따위 것에도 이토록 생각이 다른 거지? - P221

그날 흔들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테판이 내 서재로 들어오더니 같이 산책을 가자고 했다. 나는 무릎에 있던 책을 다시 들고 가기 싫다고 했다. 이 장 마저 읽어야 해. 이튿날 밤에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싫어, 오늘 너무 피곤해. 그 이튿날 밤엔 학교에서 열리는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신 혼자 가. 그런 데 갈 기분이 아니네." 그는 문가에 서서 나를 한참 동안 주시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건 다 싫지? 아니면 그냥 내가 싫거나. 어? 뭘 어떻게 해도 네 성에는 안 차잖아. 마음에 안 들잖아. 아니야? 넌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해. 백날 그래. 지금만 그런 것도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넌 항상 불만족스럽고, 실망해 있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노력은 요만치도 안 해. 그저 불만만 가득해서는 그 빌어먹을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잖아."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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