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음모들 중 일부는 타락했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인디언 권리연맹은 어느 후견인이 인디언 과부의 재산을 거의 모두 챙겨서 달아나버린 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후견인은 나중에 오세이지 카운티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한 그 여성에게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통보했다. 결국 그 여성은 가난에 시달리며 어린 두 자녀를 길러야 했다. "그녀와 어린 두 자녀의 집에는 침대도 의자도 먹을 것도 없었다." 아기가 병들었을 때도 후견인은 그녀의 돈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간청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아기는 세상을 떠났다." 보고서는 이렇게 밝혔다. 오세이지족도 이런 음모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과부가 아기를 잃은 뒤, 후견인이 저지른 사기의 증거가 법정에 제출되었으나 판사는 무시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한, 정의로운 판결을 얻어낼 희망은 없다."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여성의 눈물은 미국을 향한 외침이다." 한 오세이지족은 후견인 제도와 관련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놈들이 우리 돈에 이끌려서 달려드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법과 제도가 모두 그들 편이다. 기사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달라. 그들이 여기서 우리 영혼을 깎아내고 있다고." - P220

헤일은 론을 포허스카의 의사에게 또 데려가 보험가입에 필요한 검진을 받게 한 뒤에야 비로소 두 번째 보험회사의 승인을 얻었다. 의사는 자신이 헤일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빌, 무슨 생각입니까? 이 인디언을 죽일 거예요?"
헤일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맞아." - P225

화이트는 어니스트와 몰리의 결혼(애나가 살해당하기 4년 전)도 처음부터 음모의 일환이었는지, 아니면 헤일이 나중에 조카를 압박해서 아내를 배신하게 만든 것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상조차 힘들 만큼 뻔뻔하고 사악한 음모였다. 어니스트는 몰리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몰리와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내내 그녀의 가족들을 해치는 음모를 꾸며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대의 괴물 같은 얼굴을 가려줄 어두운 동굴이 어디 있을까? 그런 것을 찾지 말라, 음모여.
미소와 상냥함 속에 그것을 숨기라.’ - P230

어니스트 버크하트만이 화이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니스트를 보면, 기가 약한 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화이트와 함께 일하던 검사의 표현은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 모두 공략 대상으로 어니스트 버크하트를 점찍었다." - P262

화이트는 램지가 론의 이름 대신 계속 ‘인디언‘이라고 말하는 점에 주목했다. 마치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듯이 램지는 "오클라호마의 백인들은 인디언을 죽이는 일을 1724년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 P271

화이트는 둘 중 누가 몰리에게 독을 주었는지 증명할 수 없었다. 몰리도 증세가 나아진 뒤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몰리는 피해자 취급을 싫어했지만, 이번만은 무섭고 당황스럽다고 시인했다. 때로는 영어 통역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이제는 영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검찰 측을 돕는 변호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당신 편입니다." 그는 몰리에게 남편인 어니스트가 살인사건들에 대해 아는 것을 자백했으며, 헤일이 그 사건들은 물론 리타의 집 폭파사건까지도 주도한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 P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 귤을 따내는 건지, 노란 전구를 달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쯤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점심 먹게!
식사하십서!

불을 켜면 환하게 나타난다.

여전한 것들이지만

왠지 여전하지 않은
나의 막막하고 포근한, 작고 큰 방이.

그리고 떠날 때는 없던 새로운 것이.

귤은 난로를 부르고

난로는 겨울을 부른다.

꽁꽁 얼어 다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따뜻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계절.

겨울이 눈을 부르고 있다.
어둑한 하늘에
곧 하얀 눈이 내려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만 감으민
멜 떼가 반짝반짝 숨비소리 호이호이

자식들이야 그만허렌 허주만은 그만헤져.
고만 이시민 뭣 헤.
마음이 출렁출렁 허는디.

[…]

이제 여기가 나의 일터다.
여기에선 여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아름씩 조물고 싶지만 한숨에 조금씩
그래도 망사리는 몸을 움직인 만큼 차오른다.
돈도 벌고 벗도 만나는 바당이
나는 좋다.

눈을 감으면 곰새기, 거북이 헤엄치는 바다가 선하다고 했다.
바람에 맞춰 물때에 맞춰 평생을 살아온
순옥 할머니는
작년에 물질을 그만두고
고무옷을 나의 할머니에게 주었다
[…]
순옥 할머니는 해녀 식당 가는 길에 해신당에 들른다.

오늘도
물숨 먹지 안 허게 잘 좀 부탁헴수다.

연철을 차도 바닥에 있는 돌을 잡는 게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파도가 센 날은 물 밑이 캄캄하고
맑은 날은 물 밑이 투명하다는 걸.

이쪽은 하늘 빛
또 이쪽은 초록빛

일렁이는 물결의 그림자
하얗게 빛나는 멜 떼
길쭉하고 파랗거나
니모를 닮은 물고기
파랗게 평평하게만 보이던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것들.
그리고 물 위에 둥실둥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

눈을 감고 있는 여름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구나.
짙어지고 짙어지는
풀 내음을 맡고 있는 거야.
땀을 뻘뻘 흘리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가만히,
그 바람을 맡고 있는 거야.

내가 움직이니까 여름도 움직인다.
초록이 뺨을 때리고
파랑이 출렁인다.

할머니 집엔 에어컨이 없지만
할머니의 북쪽 방엔 하늬바람이 불어온다.
하늬바람이 순하게 불면 물 밑이 고와 우리
할머니 물질하기도 좋고
그냥... 기분도 좋다.

색이 바랜 간판
바래지 않는 상냥함
오픈한지 얼마 안 된 치킨집의
손으로 써 붙인 아귀찜, 김치찌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바다 앞의 할머니 마음처럼 출렁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시대든 검열은 역설적으로 역효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이렇게 썼다. "검열자들은 당대의 권력으로 후세의 기억마저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다. 처벌받은 재능은 오히려 높이 평가되고 가혹하게 처벌한 자는 불명예와 처벌받은 자의 영광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늘날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는 권력이 금지하는 메시지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예술작품이 철거 명령을 받으면 모두가 그것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래퍼가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다운로드가 급증한다. 책이 금서가 되면 사람들이 서둘러 책을 사려 한다. - P446

타키투스가 언급했듯이, 박해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창의성을 가로막는 데 있었다. 타키투스는 그것 을 "달콤한 관성"이라 불렀다. 즉, 수용적 포기 혹은 갈등이나 우려를 피하기 위해 시행 중인 가치를 위반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말한다. 바로 창작자를 포섭하는 위험한 비겁함 말이다. 타키투스는 반역자조차도 침묵하고 복종하는 시대를 목격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단한 인내심을 보여줬다. 만약 우리가 침묵하는 능력만큼이나 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우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기억도 잃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고통스러운 상처를 만지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어느 시대든 우리는 권력의 검열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 P448

사실 고대의 책은 지금의 책보다 환 영받지 못했다. 고대에는 단어가 구분되지 않고 나열됐으며, 대소문자의 구분도 없었고, 구두점이 엉뚱하게 찍혀 있는, 그야말로 복잡한 정글 같았다. 독자는 글을 의심하고, 돌이켜보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빽빽한 내용을 헤쳐나가야 했다. 고대인들은 왜 텍스트를 숨 쉬지 못하게 했을까? 우선 그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와 같은 값비싼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더불어 초기의 책들은 소리 내어 읽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눈으로 보기엔 기호의 연속이지만 귀로는 그 기호들을 풀어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우월성을 자랑스러워하는 귀족들은 교육에 접근성이 낮은 새로운 독자들이 책의 독점적 영역에 진입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 P450

필사본에 삽입된 삽화도 손으로 그려졌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서 기원한 삽화는 장식적 의도보다는 설명적 의도가 짙었다. 텍스트를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텍스트 이해를 보완하는 시각적 보조 장치로 삽화가 태어났다. 과학적인 내용에는 도표가 활용되었고 내용이 문학적이면 서사적 장면이 삽입되었다. 그리스–라틴 전통에서는 저자를 표시하기 위해 작가의 머리나 흉상이 그려졌다. 그 첫 번째 사례는 바로가 쓴 『이미지들』이다. 이 작품은 유실되었으나 플리니우스가 이 작품의 그리스인과 로마인 700명의 삶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기원전 39년경에 출판된 이 야심찬 책은 유명인을 서술하면서 초상화를 삽입했다. 이는 로마인들이 책을 팔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보여준다. - P451

『일리아스』의 첫 구절은 "노래하소서, 여신이여!"이다. 첫 구절을 제목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고대의 방식은 마치 의도치 않게 마법에 이끌려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아름답다. 이탈로 칼비노는 자신의 소설 중 하나에서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다. 바로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라는 작품이다. - P454

존 포드는 영화와 소설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쓰인 『수색자』라는 작품을 고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익명의 스페인 배급사는 새로운 영감을 얻어 「사막의 켄타우로스」라는 기막힌 제목으로 작품을 개봉했다. 레일라 게리에로는 책 제목은 기발한 단어의 연속체가 아니라 "이야기의 심장에서 뗄 수 없게 접합"되어 있기에 적확한 제목을 찾아낼 때면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 P4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은 눈에 안 띄는 소녀 시절을 벗어나면 페티시의 대상으로 활짝 피어난다. 아시아계 여성이 드디어 눈에 띄게 되면 – 드디어 욕망의 대상이 될 때 – 너무 분하게도 자신을 향한 모든 욕망이 변태로 취급됨을 깨닫는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은 포르노다. 거기서 우리의 음험한 욕망은 몇 가지 범주로 냉정하게 구분되는데 백인이 디폴트이고 다른 모든 인종은 성적 일탈로 취급된다. 소름 돋는 틴더 메시지("아시아 여성과의 첫 경험을 원합니다")를 비롯해 백인 친구들의 미묘한 공격적 언사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여성은 자신에게 끌리는 모든 상대가 변태임을 매일같이 상기당한다. - P233

나는 누가 나를 원하는 상태를 불신하게 되었다. 나의 섹슈얼리티는 곧 병리학적 판단 기준이었다.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뭔가 비정상이었다. - P234

차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가톨릭교도이자 한국인으로 자랐으니 억압은 이중으로 작동했다. 공연 영상 속 그는 항상 흰 옷을 입고 있다. 백색은 한국 문화에서 죽음을 뜻하지만, 무속 문화에서는 평화를 뜻한다. 차의 어머니는 차를 임신한 지 8개월째에 가족과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날 앙고라 토끼처럼 커다랗고 하얗고 탐스러운 함박눈이 내렸고, 차의 어머니는 드물게 평화로운 순간을 체험했다. 차는 육체를 육감적으로 현시하기보다는 소거하는 일을 더 흥미롭게 여겼다. 그래서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들에게 매료되었다. 그러나 또 달리 보면, 자신을 혁명에 내맡기는 여성들에게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234

당시 언론이 차의 강간 살인 사건을 보도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플리터먼 – 루이스에게 의견을 묻자 그가 주저 없이 답했다. "그냥 또 다른 아시아 여자로 본 거죠. 만약 그가 어퍼웨스트사이드 출신의 젊은 백인 아티스트였으면 아마 온갖 뉴스에 오르내렸을 거예요."
뉴스 아카이브를 검색해도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짧은 부고 기사 말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때 나도 즉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아시아 여성인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음모론으로 묵살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가설을 대놓고 시험해보기가 주저되었다. 80년대는 뉴욕 범죄율이 높아서 보도되지 않는 살인 사건이 수백 건에 달했다고 쉽게 반박당할 수 있었다. - P235

「순열」에서 버나뎃의 얼굴 사진 – 얼굴 전면, 후면, 눈 감은 모습, 눈 뜬 모습, 간단한 원형 스터드 귀걸이를 낀 귀가 드러나게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 몇 컷 – 이 9분 동안 나오다가 다음 소재로 바뀐다. 차는 거기에다 자기 얼굴 사진을 살짝 끼워 넣었다. 언니의 이미지가 화면에 1초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다시 여동생의 이미지로 바뀐다. 눈을 한 번 깜박하면 예술가의 초상을 놓치게 된다. 나는 비디오를 되감아 화면을 정지한다. 똑같이 긴 머리, 그러나 좀 더 각진 턱선, 고르지 않은 피부, 약간 더 넓은 코. 그의 눈동자는 생생하고, 기민하고, 전혀 겁에 질려 있지 않다. - P239

피츠버그에서는 새로 인종 통합된 수영장에 흑인이 입장하자 백인 수영객 한 무리가 돌팔매질을 하고 그들을 익사시키려고 했다. 인종 분리의 폐지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백인들은 교외 지역으로 피신하여 각자 개인 수영장을 지었다. - P244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나는 심해어처럼 수영장 깊숙이 잠수해 숨을 더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버텼다. 내가 수면으로 올라오자 "나와!" 하고 소리치는 어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헤엄을 치며, 역광을 받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을 찡그리고 쳐다보았다. 이 수영장은 주민만 쓸 수 있다고 그가 엄한 어조로 말했다. 그곳은 이모가 사는 오렌지 카운티의 아파트 단지였다. 나는 그에게 이모와 어린 사촌 동생이 여기 살고 내가 아이를 봐주고 있다고 말했다. 사촌 동생과 내 동생은 수영장의 얕은 쪽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다. 수영장 문을 닫고 나오는데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것들이 이젠 사방에 깔렸네." - P244

영화 및 소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도입 장면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를 차별하면 우리는 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던 너의 최고급 호텔을 사버리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종주의를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백인의 세상이 우리를 포섭하는 방식이 아니던가? 우리가 응징을 하든 은혜를 입든 해서 우리를 파괴한 체제 속에서 저들보다 우월해지면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 P245

폭탄이 터져 파인 땅에 사탕을 심으면 그 사탕 껍질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자라난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은 조국에 대해 이렇게 쓴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들은 묘지처럼 십자가 불빛으로 가득하다." - P246

부채 의식을 지닌 아시아 이민자가 자기들이 이만큼 사는 것을 미국 덕분으로 여긴다면, 그 자녀 세대는 자기들이 먹고사는 것을 고생한 부모 덕분으로 여긴다. 따라서 부채 의식을 지닌 아시아계 미국인은 이상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다. 역사의 무게는 오롯이 내가 짊어지는 부담이고 부모님이 잃은 것을 보상받는 일은 내게 달렸다고 받아들인다. 그러기 위해서 불평은 접어두고 직업전선에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 P247

부채 의식은 감사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로스 게이는 자기 시에서 무화과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속살"을 맛보거나 녹슨 빨간 펌프로 끌어올린 차가운 물을 마시는 순간처럼 삶의 소소한 순간에 감사한다. 그는 심지어 못생긴 발에도 감사한다. 맨발일 때 못생긴 것이 너무 신경 쓰여 "스무 마리의 꼬마 타조처럼 모래 속에 발가락을" 파묻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현재의 밝은 빛 속으로 팔다리를 마음 편하게 쭉 뻗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게 행복이다. - P248

민족적 다양성과 무관하게 미국인이 아니라 적국인처럼 보이던 미국의 아시아인들이 이 전쟁에 의해 결속되었다"라고 역사학자 케런 이시즈카는 적고 있다. 대릴 J. 마에다 교수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 참전 군인은 동료 병사에게 "국"(gook)이라는 멸칭으로 모욕당하고 비인간화의 대상이 되었으며, 적인 베트남 사람에게는 그들 편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다. 멜빈 에스쿠에타의 1977년 희곡 『똥통』(honey bucket: 직역하면 꿀통이지만 실은 똥통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옮긴이)을 보면, 늙은 베트남 여인이 미군 병사 앤디의 검은 머리털을 만진다. 여인이 묻는다. "같은–같은 베트남인?"
"필리핀 사람이요. 음, 필리핀이요." 앤디가 말한다.
"같은–같은 베트남인이네." 그 농부 여인이 자신 있게 되풀이한다. - P253

테레사 학경 차는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에 연속적인 굴절을 초래하는 장치를 저지하라"고 적는다. 서구의 가장 파괴적인 유산은 누가 우리의 적인지 규정하는 권력이며, 이 권력에 의해 우리는 남북한이 그랬듯 동족을 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 삼는다. - P257

내가 한국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곳과 그곳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이다. 한때 운동가들이 쓰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신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58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신이 내 조상의 나라를 둘로 쪼개놓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설픈 중간급 미군 장교 두 명이 1945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놓고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을 자의적으로 그었고, 결과적으로 이 분단은 우리 할머니의 가족을 비롯해 수백만 가족을 갈라놓았다. 그 후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에게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과 네이팜을 자유의 기치 아래 좁은 우리 땅에 투하했다. - P259

한국전쟁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며 화상 피해자를 치료했던 미국 외과 의사 데이비드 랠프 밀러드가 바로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드는 쌍꺼풀 수술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수술법을 한국 성노동자들에게 시술하여 미군 병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 쌍꺼풀 수술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 수술이다. 내 조상의 나라는 당신이 영구적 전쟁과 초국가적 자본주의를 통해 필리핀, 캄보디아, 온두라스, 멕시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엘살바도르,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나라에서 저지른 살상과 자원 착취의 작은 예시에 불과하며, 이것은 주로 미국 국내 주식 투자자들의 배를 불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은혜를 논하지 말란 말이다. - P259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침묵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지해왔으며, 상실의 슬픔이 자칫 단어 몇 개로 축소되지 않도록 늘 여백을 남겼다. 시인 조스 찰스는 "자본 안에서 감지되는 것은 끔찍하다"라고 했다. 나는 내 고통을 소비용으로 쉽게 요약하느니 차라리 여백으로 남겨놓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산문체를 택함으로써, 인종 정체성에 대한 내 감정을 해부하며 그 침묵의 빈자리를 어수선하게 채우는 중이다. 그 감정을 검토할 때면 작가로서 특정 인종 범주에 들어앉아 나를 외부와 차단해버리는 손쉬운 길을 택하고 말았다는 초조함이 어김없이 뒤따른다. - P261

나는 빚진 상태를 통째로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과거에 투쟁한 운동가들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학경 차에게 빚지고 있다. 윤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역사에 책임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나는 세상이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고 여기는 부류의 백인 남자가 되느니 차라리 빚을 지겠다. 또한 나는 우리 부모님께 빚지고 있다. 하지만 내 삶을 비밀로 유지하거나 내 것을 챙기는 사유화의 꿈을 뒤쫓는 방식으로 부모님께 진 빚을 갚지는 못하겠다. 엄마는 내게 감사할 것을 거의 매일 요구했다. 엄마는 내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도록 미국에 온 거라고 거의 매주 말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 P266

아시아계 미국인은 무슬림이나 트랜스젠더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다행히 심한 감시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일종의 연성 파놉티콘 속에 산다. 이것은 아주 미묘해서 우리는 이것을 내면화하여 자기를 감시하며,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조건부 실존을 특징짓는다. 우리가 여기서 4세대째 살았어도 우리의 지위는 여전히 조건부이다. 만족을 모르고 사들이는 물질적 소유물이든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는 마음의 평화로서의 소속감이든 빌롱잉(belonging: 이 문장에서 소유물과 소속감이라는 이중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옮긴이)은 언제나 약속되며, 아슬아슬하게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우리가 유순하게 처신하도록 유도한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의식이 해방되려면 우리는 이 조건부 실존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 P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