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집을 부수도원장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캐드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쇼네드가 웨일스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창고도 있고 마구간도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곳을 쓰십시오. 저는 죄인 곁에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며, 그곳 열쇠도 내어드겠습니다. 죄인을 감시할 사람은 부수도원장님께서 제 하인들 중 적당한 이로 직접 택하시지요. 죄인이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제 식구들이 마련하도록 조치하겠지만, 저 자신은 그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과연 그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지 미심쩍어하는 분들이 계실 테니까요."
현명한 여자군. 캐드펠은 쇼네드의 말을 통역하면서 생각했다. 거듭되는 재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도, 그녀는 사실상 한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교묘하게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더하여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배려할 줄 아는 너그러움은 또 어떠한가. - P156

"그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하지. 무엇보다도 그런 짓을 할 만한 성격이 못 되니까. 화가 날 때 주먹질을 하고 덤벼들기는 해도,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유형은 아니야. 두 번째로, 만일 그런 짓을 하려고 계획했다면 한층 교묘하게 처리했을 거네. 자네도 화살이 박힌 각도를 보았겠지? 내가 알기로 엥겔라드의 키는 부친보다 손가락 셋을 합친 길이 정도는 더 크네. 어떻게 자기보다 키가 작은 사람의 늑골 밑으로 화살이 파고들도록 활을 쏠 수 있겠나?
설령 관목숲 속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거나 엎드려 있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화살이 박히기는 어려워. 그래, 그 혐의를 믿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지. 엥겔라드가 이 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궁수라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든 활을 쏠 수 있을 텐데 그처럼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위치를 택할 이유가 없지. 이 모든 게 상황을 정확히 볼 줄 몰라 벌어진 일일세.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머지않아 막다른 벽에 부딪치고 말겠지.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자네 연인이 남몰래 살인을 저지르기 에는 너무도 정직한 사람이라는 점일세. 그런 사람은 설령 자기가 증오하는 자라 해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살해하지 않아. 더욱이 그 젊은이는 자네 부친을 증오하지도 않았지. 나한테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네." - P160

"자, 나는 쇼네드의 말을 전했네." 캐드필은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그녀에게 가면 그녀가 직접 자네 마음을 돌리겠지. 그리고 자네가 와주기를 바라는 또 한 사람이 있네. 그 사람은 내게 말을 전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 젠장." 페레디르는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푹 꺾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 나를 용서하게나. 이 일이 쇼네드만이 아니라 자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걸 잘 아네. 쇼네드가 그런 말을 하더군. 부친께서 자네를 무척 가장 아끼셨다고······."
젊은이는 갑자기 울먹이며 휙 돌아서더니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가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캐드펠은 생각에 잠겨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탐색해나가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부분을 만진 것처럼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 P166

"성스러운 수사님들을 살인자로 지목하다니 그건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베네드는 기겁했다.
"왕이든 수도원장이든 인간은 결국 인간이오.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지." - P169

그러면 리샤르트가 총애하고 아꼈다는 그 젊은이, 어릴 때부터 아들처럼 부담 없이 그 집에 드나든 젊은이는 어떤가? 캐드펠 수사는 생각에 잠긴 채 녹음이 짙게 깔린 어둠 속을 걸어 휴 신부의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엥겔라드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려보건대 천품이 살인을 저지를 사람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그는, 아마도 사랑 때문에 엥겔라드에게 탈출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쇼네드의 감사와 호의를,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만이 아닌, 보다 어두운 다른 까닭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숲속에서 말없이 멀어져갈 때 캐드펠은 얼핏 악마에 시달리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설마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리샤르트의 죽음으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리샤르트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딸의 남편으로 맺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고 끈기 있게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페레디르는 캐드펠의 마음에 여전히 기이하고 꺼림칙한 느낌을 남겼다. - P172

"부수도원장님, 아아, 모두가 제 탓입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른 탓입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고해를 하고 싶습니다. 전 제 마음을 털어놓고 처벌을 받겠다는 각오로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이 계속되는 슬픔이 바로 저의 타락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캐드펠 수사는 생각했다.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땅바닥을 뒹굴며 풀잎을 물어뜯지는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 아닌가!
"말해보시오." 부수도원장은 자못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형제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사소한 것으로 왜곡시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지나친 처벌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 없소. 늘 형제 스스로가 가장 가혹한 심판관이었으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가장 가혹한 심판관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판단을 회피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 P175

카이가 미소 띤 얼굴로 뜰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지 음습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카이의 웃음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동료분을 구하러 오셨습니까?" 카이가 물었다. "그분이 과연 고마워하실지는 모르겠네요. 편안하게 누워 싸움닭처럼 음식을 잘 먹고 있거든요. 게다가 집행관이 온다는 소식도 아직 못 들었고요. 쇼네드 아가씨는 여태 그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수사님도 아시겠지만 휴 신부님 역시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부수도원장님만 조용하시면 하루 이틀 정도 더 이곳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마을 어귀에 말 탄 사람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아이들이 바로 달려와 알려줄 겁니다. 존 수사님은 좋은 사람들 손에 맡겨진 셈이에요."
카이는 엥겔라드와 함께 일하는 사이로 이 마을에 사는 누구보다도 엥겔라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니, 존 수사와 이 감시자는 틀림없이 호의로써 서로를 대하고 있을 터였다. 카이의 임무는 존 수사의 도주를 막는 것이라기보다 그가 외부세계로부터 위협 받는 일이 없도록 지키는 일에 가까운 듯했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카이는 자신이 가진 열쇠마저 얼마든지 내줄 용의가 있었다. - P185

"당신이야말로 정신을 빠짝 차려야겠구먼." 그렇게 말하면서도 캐드펠 수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이곳 왕자가 투철한 준법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아니면 베네딕토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말이오."
"아,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약 범죄자가 도망친다 해도 그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거든요. 벌을 받을 사람도, 상을 받을 사람도 없지요. 수사님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사방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한 적이 없으십니까?" - P186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하겠네. 하지만 당장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나. 우리가 귀더린의 평화를 깨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아직 변함이 없고, 나 또한 우리를 결함 없는 고결한 존재로 여기지 않거든. 죄인을 가려내기 전까지는 누가 결백한지 알 수 없는 법이지."
"저도 부수도원장님께 했던 말을 취소할 생각 없어요." 쇼네드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분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야. 내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사람을 샀을 수도 있잖아요. 성녀까지도 사려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분은 완고한 분이에요. 그게 동기가 될 수 있죠. 그리고 잊지 마세요. 잉글랜드인들과 마찬가지로 웨일스인들도 자신을 팔 수 있어요. 바라건대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을 거예요." - P196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부수도원장이 관대하게 허락한다면 그것으로 자기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여기는 것일까? 살인의 죄나 그로 인한 위협까지도 그것을 처음 명한 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자신은 아무 죄과도 치르지 않은 채 감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물론 캐드펠은 살인자의 손이 닿으면 피살자가 피를 뿜어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그 말을 믿는다는 사실, 그러한 믿음이 죄인을 압박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죄인이 공포에 질려 범행을 자백할 수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 P505

이즈음 캐드펠은 집행관을 믿어도 좋을 것이며,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나 머지않아 알게 될 사실들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결국 집행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모든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구실로 하루나 이틀쯤 왕실 집행관을 교구 전체로 돌아다니게 만들면 그 역시 캐드펠이 온갖 조사를 통해 얻어낸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되리라. 공적인 심판이란 깊이 있는 탐색을 하기보다 표면에 떠오른 사실들을 수확하고 그에 따라 합당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종종 돌출되는 의구심들은 신속한 질서 회복과 평안 유지를 위해 국가가 치러야 하는 대가인 셈이다. - P209

아네스트는 식사를 가져와 그가 밥을 먹는 동안 곁에 있어주었다. 아네스트 역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었다. 물건을 이용해 존 수사에게 간단한 웨일스 단어들을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마을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들을 무슨 수로 알린단 말인가? 그럼에도 때로는 둘이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존 수사는 잉글랜드어로, 아네스트는 웨일스어로, 미래에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일종의 절제된 애무처럼, 그들은 서로의 어조만으로 친밀감 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독백을 통해 부족하나마 감정을 교환하고 평화를 느꼈다. - P213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아네스트의 얼굴을 더욱 세밀히, 더욱 열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보드랍고 둥근 뺨은 사과처럼 싱싱했고, 볕에 그을린 피부는 섬세하기 그지없었으며, 눈은 흐르는 햇살을 받은 냇물처럼 맑게 반짝였다. - P214

"수사님, 우리가 이 순례와 이 철야 기도에 나서게 된 건 그야 말로 크나큰 영광입니다." 콜룸바누스 수사가 캐드펠의 잰걸음에 어렵지 않게 보조를 맞추며 말했다. "수도원 역사에 우리 이름이 기록될 겁니다. 이후의 모든 형제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거예요."
"그래, 나도 들었네." 캐드펠은 건조하게 말을 받았다. "부수도원장께서 위니프리드 성녀의 생애를 기록하고, 그분 유골의 이장 과정으로 그 내용을 완성하려 하신다지. 하지만 수행원들 이름 하나하나까지 거기 써 넣으실지는 모르겠군." 하긴, 자네 이름 정도라면 모르겠군. 캐드펠은 생각했다. 아마 성스러운 샘물로 가서 치료를 받은 최초의 사람쯤으로 기록되리라. 그리고 제롬 수사 이름도 등장할 것이다. 그의 꿈을 통해 순례단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내 이름은 없겠지. 정말 다행이야!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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