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이 꾸준히 조금씩 나타나지 않고 이따금씩 유행병으로 찾아오는 전염병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질병들은 감염된 환자 한 사람으로부터 그 부근의 건강한 사람들에게로 비교적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전파되어서 단기간에 전체 인구가 질병에 노출된다. 둘째, ‘급성병‘이므로 단기간에 죽거나 완치된다. 셋째, 운 좋게 회복되는 사람들에게는 항체가 형성되어 면역성이 생기므로 그때부터 꽤 오랫동안,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그 질병이 재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질병들은 대체로 인간에게만 발생한다. 유행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은 대개 토양이나 다른 동물의 몸속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아기의 급성 유행병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홍역, 풍진, 볼거리, 천연두 등도 이 네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 P308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많은 세균에 대해 분자생물학자들은 이제 각 세균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역시 대중성 전염병을 일으키는 세균들이다. 다만 우리의 각종 가축이나 애완동물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유행병 은 동물의 경우에도 대규모의 조밀한 집단을 필요로 하며 아무 동물이나 무차별로 괴롭히지 않는다. 즉 대중적 전염병들은 대체로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동물들에 국한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나 돼지 같은 사회적 동물을 가축화시켰을 때 이 동물들은 이미 그러한 유행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 세균이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예를 들어 홍역바이러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우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이 지독한 유행병은 소를 비롯하여 많은 야생 반추 포유류를 감염시키지만 인간은 우역에 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도 홍역에 걸리지 않는다. 홍역바이러스와 우역 바이러스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곧 우역 바이러스가 소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긴 후 우리 몸에 맞도록 특성을 변화시켜 홍역바이러스로 진화했다는 뜻이다. 많은 농부가 소의 똥, 오줌, 호흡, 상처, 피 등과 가까이 산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처럼 세균이 옮겨진 것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는 소를 가축화한 이후로 장장 9000년 동안이나 소와 가까이 지내 왔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우역 바이러스가 가까이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도표 11-1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게 낯익은 다른 전염병들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처럼 동물 친구들의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 - P314
19세기의 저술가들은 역사를 말할 때 흔히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천의 핵심적 특징으로 농업, 야금술, 복잡한 기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문자의 발달 등을 들었다. 이 가운데서 문자는 전통적으로 가장 한정된 지역에서만 발달했다. 이슬람이 팽창하고 유럽의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기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적도 이남 아프리카,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한 지역을 제외한 신대륙 전역에 문자가 없었던 것이다. 문자를 사용하는 지역이 이렇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민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미개인‘ 또는 ‘야만인‘ 과 구별해주는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문자를 꼽았다. - P327
초기 문자 체계는 그 모호함 때문에 문자 기능이 몇 가지로 제한되었고 소수의 필경사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들 사회가 어째서 그 같은 모호함을 그냥 내버려두었는지 의문을 품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일반 대중의 문자 사용을 당연시하는 현대와 고대 시각의 괴리를 보여주는 일이다. 초기 문자의 ‘의 도적인‘ 사용 제한은 덜 모호한 문자 체계를 고안하려는 의욕을 적극적으로 막는 작용을 했다. 즉 고대 수메르의 왕이나 사제들은 전문적인 필경사들이 거둬들여야 할 양의 수를 기록하는 데 문자 사용을 바랐을 뿐 일반 대중이 시를 쓰거나 음모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고대 문자의 주된 기능은 ‘타인의 예속화를 돕는 일‘ 이었던 것이다. 비전문가들이 문자를 개인 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즉 문자 체계가 점점 간소해지고 표현력도 늘어난 뒤의 일이었다. - P355
미국에서는 해마다 약 7만 건에 달하는 특허권이 발행된다. 그중에서 상업적인 생산에까지 이르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쓰일 곳을 찾은 위대한 발명품이 하나 있다면 그 뒤에는 그렇지 못한 무수한 발명품 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처음에 어떤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던 발명품들조차도 나중에는 뜻밖의 다른 필요에 더욱 큰 가치가 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고안한 것은 원래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서였지만 증기기관은 곧 방적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게 되었고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익을 거두면서) 기관차와 배를 움직이게 되었다. - P367
중세 이후의 석유 증류법에 대해 말하자면 19세기의 화학자들은 원유의 중간 분류층이 기름 램프의 연료로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학 자들은 휘발성이 가장 높은 분류층(휘발유)을 쓸모없는 폐기물로 간주하여 내버렸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내연기관의 이상적인 연료라는 점이 밝혀졌다. 현대 문명의 추진 연료라고 할 수 있는 휘발유가 처음에는 용도를 갖지 못한 또 하나의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P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