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올라오면 빵빵대는 도로 위의 소음과 유흥가의 음악, 와글대는 사람 소리를 모두 멀찍이 발 아래에다 둘 수 있었다. 겨우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에 섞인 피로, 마음처럼 능숙하지 않아 쉬이 엉겨 붙던 서글픔을 밀쳐 내려고 버둥대던 날들이었다. 소음을 딛고 저녁 신촌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던 감탄 어린 탄식은 점차 고단한 푸념으로 바뀌어갔다. - P107

마포 08번의 모든 정류소는 곧 나의 목적지였다. 그 버스를 타고 많은 생각을 했고 여러 장소에 갔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혼자이기를 자처했다. 그곳에서 조용히 울기도 했고, 어느 날은 노선을 다 돌도록 내리지 않았다. 마포 08번 정류소가 내려다보이던 어느 2층 카페 창가 자리를 그 카페가 사라지기 전까지 무척 좋아했었다. 상심이 큰 날엔 그 2층 창가 아래에 잠깐 서 있다 떠나는 마포 08번을 수십 대나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참 아무렇고 이상한 위로였다.
그렇게 마포 08번은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어디를 가면 좋을지 몰라 혼자 방황하던 나의 동선을 사소한 관성으로 이끌었다. 정처 없이 흩어지는 발걸음을 마포 08번 이 자신의 반경 속으로 동그랗게 끌어당겼다. 이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생각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절반쯤 쓸쓸하지 않았다. - P124

버스로 10분, 걸으면 30분 정도 걸릴 거리를 매일 빙빙 둘러 걷느라 집에 가는 데 한 시간 이상씩 걸렸다. 퇴근 후 약속 없이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게 좋았다. 마음 에 드는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숨통을 틔우고, 턱 없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나의 능력과 쓸모를 의심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밝아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너무 많은 생각에 다시 어두워질지언정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꼭 필요한 일과였다. 응어리진 마음으로 곧장 집에 가기에는 내 방이 너무 성냥갑처럼 작았으니까. 쉴 틈도 없이 곧장 그 작은 방에 가고 싶진 않았다. - P125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방의 짐들을 조금 우려스럽게 만 생각했지 ‘그래도 이 정도면 옮길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짐을 건드려보니 가볍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버는 족족 책과 잡지를 사 보고 있었다. 사 모으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방에 그것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으니까. 내가 책과 잡지를 사 모으는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갈망, 동경, 불안, 불만족 같은 감정의 복합체. 그 감정들은 전부 조바심을 향하고 있었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롭고 힘들고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그때, 무엇이 보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언가 보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뭐가 그리운지도 모르게 그리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서러움이 어딘가 향할 곳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불 속에서 앓는 마음이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대상도 없는 막연한 그리움을 꼭 끌어안은 채 이불 속을 파고들면 살갗과 이불이 맞닿은 그 미세한 틈 사이로 한기가 새어들어왔다. 독감 끝물에 한 엄마와의 통화에선 그냥 지나가던 감기였다고만 말했다. - P50

2006년 11월에 처음 메일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XX년 XX월 마지막 메일링을 받기까지, 한 공간이 건재했다가 사라지는 시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오래도록 형체도 모른 채 내밀하게 간직해왔던 ‘장소‘와 ‘공간‘ 에 대한 관심은 아마 그때 처음 불거져 나온 걸지도 모른다. 섬들이 모여 이룬 군도. 내가 머무는 방이 아주 작고 누추한 본 섬이라면, 집 밖에도 내가 편하게 오갈 수 있는 다른 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살만 한 곳을, 내 것 같은 공간을 찾아내기 위해 어디서든 살아나 보자 싶던 결심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다음 거처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모험심과도 닮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는 건 그 온기에 기댄 감각이 잠깐이지만 진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도시이방인으로서, 때때로 도시여행자로서 사람이 머무는 곳을 떠돌아더니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P59

물론 예쁜 커튼을 걸고 싶은 욕심도 이따금씩 들었다. 나름 감당할 만한 가격에 괜찮은 디자인의 커튼을 골라 위시리스트와 장바구니에 야심차게 담은 것도 여러 번. 하지만 늘 커튼보다 시급하거나, 돈을 지불하기 더 가치 있는 물품들을 떠올리며 결제 앞에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내 커튼이 될 뻔한 물건들은 장바구니에서 자동 삭제되거나 품절되곤 했다. 버릇이라면 버릇, 미련하다면 미련한 짓이었는데 장바구니에서 없어지고 나면 이상하 게 아쉽기보다는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이 매번 들었다. - P79

에어컨도 없는 비좁은 집에서 선풍기 하나로 열대야와 온열 증세를 묵묵히 견디던 스물다섯 살의 여름과 고독. 젊고 가진 거 없는 세입자와 나이 들고 가진 게 많은 임대인의 자격으로, 나는 나 자신과 할머니를 분리해서 비교하고 있었다. 가진 것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고, 무슨 재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월세를 건네러 할머니 앞에만 서면 어쩐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비교였지만 그랬다. 일흔쯤 돼보 이시던 주인집 할머니는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건너 마치 처음부터 ‘주인집 할머니‘였던 것처럼 내 눈앞에 있었으니까.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를 봐도 나이 들어서의 내 모습을 대입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셈을 하는 주인집 할머니의 정정한 모습을 보면서 내 노년의 삶에 있을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을 짐작해보고 있었다. - P85

모든 경험은 경험할 가치가 있다고 애써 맹신했다. 그래야 내가 겪는 고생을 덜 억울해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맹신은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부러 겪지 않아도 될 경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듬성듬성 그물지었던 나의 체념과 염세의 세계가 해체될까 봐, 체념으로 버텨온 내가 그대로 무너질까 봐 너무 두려웠다. 삶이 너무 누추해서 내 것이라 하고 싶지 않았다. - P95

조금 더 집다운 집에 살았다면 삶이 좀 더 살만해졌을까. 덜 아팠을까. 상관관계야 있겠지만 몸이 사는 집만큼 마음이 사는 집이 어떤 상태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녹록지 않은 생활을 버텨냈더니 나는 나에게 좀 더 잘해주고 싶어졌다. 적어도 몸이 사는 집이 누추하다는 이유로 마음 집까지 해치고 싶진 않았다. 마음이 건강하면 누추한 집의 삶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염세와 체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비관을 줄 여나가고, 보잘 것 없는 와중에도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 두려하고, 그런 동시다발적인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동안 곁에는 간간히 사람이 있었다. 내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어둡다고 웅크리 진 말자고 했다. 어둠 속을 혼자 견뎌야 할 때도 문을 열면 거기에 도와줄 누군가 있을 거라고 훈련하듯, 학습하 듯 생각하려 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 고단해서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감당하기 쉬워지고 싶어서 되든 안 되든 애를 써나갔다.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기 중에 배어 있는 불편함을 적절히 무시하거나 견디지 못한다면 원룸텔과 같은 성냥갑 생활은 더 숨 막히게 나를 옥죄일 것이었다. 적응하거나 무뎌지는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부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목례 정도는 했었지만 나중에는 눈과 입과 귀를 다 닫고 살았다.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이 타인에게도 그림자였으면, 무엇보다 타인이 나에게 그림자보다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좁은 방보다 더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게 바로 원룸텔 공동생활 구역이었다. 좁은 내 방이 내겐 가장 편한 곳이었다. - P35

앞으로 얘기하게 될 세 번째 원룸텔에서의 기억인데, 거기는 총무를 따로 두지 않고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었다. 잘 관리된 본인 원룸텔에 꽤 자부심이 있는 분이었고 그 자부심의 근거로 든 것 중의 하나가 ‘우리는 중국인은 받지 않는다‘였다. 왜냐고 물으니 사장님의 경우에는 몇몇 중국인 유학생들을 받으면서 겪은 인상들이 모든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쾌적한 원룸텔을 자랑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고작 그런 이유라니. 하지만 사장님의 노골적인 태도를 무례하다고 느끼는 나 역시 이전 원룸텔에서 괜한 심증 을 품었던 이력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 말을 검증된 정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약간 불편하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그 모순적인 마음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되새겨보니 나 자신의 무지함에 낯이 뜨거워진다. 종특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시대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범주화하고 낮춰보는 일이 숨 쉬듯 이루어진다. 잘못된 줄도 모르게, 잘못되었는지 검증할 틈도 없이 말이다. ‘다들 그러니까‘, ‘공공연한 일이니까‘로 치부되는 것들을 머리 힘 바짝 주고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아직 갈 길이 멀다. - P42

싫은 환경과 적당히 화해하는 데에 요령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는 아니고, 그 당시에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에게서 ‘꿈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있다면 너는 부술 거냐, 타협할 거냐‘라는 맥락의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다면 타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친구는 내 대답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타협이라도 잘 해내고 싶었던 나는 싫으면 싫은 감정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이라도 ‘타협해야지‘라고 말하면 싫은 환경 앞에서 불같이 화내거나 악을 쓰거나 비겁하게 도망치는 대신, 좀 더 세련된 대처 방식을 학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답한 ‘타협‘이란 단어는 화해와 협상의 의미였지만 표면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인상이었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학자들은 일본어가 아시아의 알타이 어족 중 고립된 언어일 것이라 간주한다. 알타이 어족에는 터키어, 몽골어, 시베리아 동부의 구스어가 포함되는데, 한국어도 대개 이 어족의 고립어로 간주된다. 어족 중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쩌면 다른 알타이족 언어보다도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보다 상세하게 공유하는 문법 이라든가 프랑스어가 스페인어로 연결될 때 나타나는 어휘의 유사성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일반 문법 체계와 기본 어휘를 약 15% 정도 공유하는 데 그친다. 만약 일본어와 한국어가 정말로 관계가 깊다고 한다면, 15%뿐인 공유 어휘는 이 두 언어가 5000년도 전에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분리된 것은 2000년도 채 안 되지만 말이다. 아이누어와 일본어의 관계는 더욱 의심스럽다. 아이누어는 일본어와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 P659

역사가들은 내게 유럽의 분열과 중국의 통합, 유럽과 중국의 상대적 힘은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유럽‘ 혹은 ‘중국‘으로 유용하게 묶여지는 정치적 사회의 지리적 경계는 수세기에 걸쳐 변했다. 중국은 15세기까지 적어도 기술에 있어 유럽을 이끌었고, 미래에도 다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 이런 사례를 보면 "왜 중국이 아닌 유럽인가?" 라는 질문은 진지한 설명 없이는 하나의 덧없는 현상으 로 언급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분열은 경쟁을 위한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 외에도 좀 더 복합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경쟁 은 건설적인 만큼 파괴적이라는 사실이다(제1·2차 세계대전을 생각해보라). 분열 자체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념이다. 혁신에 미치는 분열의 영향은 자유와 같은 요소들에 의지한다. 자유로운 사상과 인간은 파편화된 그들이 각각 별개의 것이거나 단지 서로를 복제한 것에 불과하든 간에 그 파편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다. 그 분열이 ‘최적‘ 인지 아닌지는 당시에 적용된 최적의 기준에 따라 변할 것이다.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최적 상태의 정치적 분열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생산성, 정치적 안정성, 인간 행복에는 최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 P688

<총, 균, 쇠>에서 다룬 문제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경제학의 중심 문제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왜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는 부유한데 파라과이나 말리 같은 나라는 가난한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1인 당 국민총생산GNP은 가장 빈곤한 나라들보다 100배나 더 많다. 이는 경제학 교수들이 해결해야 할 고용에 관한 이론 중 자극적인 질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정책적 시사점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빈곤한 나라들은 그들을 가난하게 하는 요소를 바꾸고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조건을 채택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답 하나는 그러한 경제적 불균등이 부분적으로 인간 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환경인데도 매우 다른 제도 때문에 1인당 국민총생산이 차이 나게 된 4쌍 의 나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 서독과 동독, 도미니 카공화국과 아이티, 이스라엘과 아랍 주변국들인데, 비교를 통해 명백한 예를 들 수 있다. 각 쌍에서 먼저 예시한 부유한 나라들을 설명할 때는 자주 거론되는 여러 ‘훌륭한 제도들‘이 있는데, 효과적인 법률 체계 와 계약집행, 사유재산권의 보호, 부패의 부재, 낮은 암살 빈도, 무역과 자본 흐름의 개방성, 투자를 위한 장려 등이다. - P6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대인 지금의 내 모습이 막연히 꿈꾸던 것과는 아주 다르듯, 매번 이사할 때마다 어떤 집을 찾아낼지 역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나는 삶에 익숙해지고 낯설어지기를 반복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매일 보는 풍경, 매일 다니는 동선의 기본값이 설계되었고, 집의 평수에 맞춰 품거나 버릴 물 건을 결정해야 했다. 생활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머무름을 뜻하는 ‘거주‘는 꼬물대는 생활을 내포한 활동 명사일지도 모른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곳.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은 공간. 자취 한 호수에서의 경험들로 나는 달라져갔고, 달라진 나는 내 삶에 변곡선을 삐뚤빼뚤 그려나갔다. 비록 어릴 때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그 변곡선이 꽤 마음에 든다. - P10

그 모든 게 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빌미였다. 빌미로 만든 경험이었지만 낯선 도시에 모인 방방곡곡의 얼굴들은 내게 자극을 줬다. 사람이란 프리즘으로 새로운 세계를 봤고, 그 세계에는 또 새로운 사람이 있 었다. 하고 싶은 게 있든,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든 간에 비슷한 또래들은 상대의 취향을 통해 새로 배우고 감화되어 갔다. 함께 어울리다가 서로에게 반하게 되는 지점에서 다들 자기 세계의 작고 여린 싹을 발견했다. 서로 가 영감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를 함께 통과하고 있었다. - P22

더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해 복도에다 창문 없는 내측방 을 만든 원룸텔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살아볼 때 그 불편 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아침에 햇빛 하나 없는 곳에서 눈을 떠야 하다니 정말 감옥도 아니고 뭐란 말인지. 하지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룸텔은 다 그런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사람이 살 구조가 아니라 건물주의 돈이 되는 구조.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주거 형태는 전적으로 덜 간절한 사람의 편의에 맞게 설계되고 대물림 된다. - P25

방을 나설 때마다 열쇠로 방화문을 잠그고 복도를 나서면 한쪽 끝에 붙어 있는 비상구 표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비상구 표시를 주시하곤 했다. 유사시 이 좁은 방과 복도를 내가 제일 먼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제발 ‘유사시‘와 같은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 P26

보증금 없이 급히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는 원룸텔만 한 선택지가 없다. 복학까지는 4개월 남짓. 이것도 다 인생 경험이겠거니, 나중에 다 피와 살이 되겠거니 여기며 꿋꿋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걸로 외로운 원룸텔 생활 속에 고립되지 않으려 했다. 씩씩할 것, 울지 않을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그럴듯하지 만 인과관계에 명확한 결함이 있는 이 슬로건이 유행하기 전인데도, 이미 어떤 환경적인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캔디처럼 살기를 주문하고 있었다. 재산도 없고 재능도 없으니 ‘열심히‘로 나를 똘똘 뭉쳐 놓지 않으면 쉽게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성장하는 느낌이 들 때면 가끔 자랑스러웠지만, 실은 성장할 것투성이인 서툰 내가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던 스물두 살. 낯선 도시에서 끈 떨어진 연이 되지 않으려고 알바하는 틈틈이 보고 듣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서울 지리가 조금씩 눈에 드는 건 좋았지만 실은 복학 뒤가 막막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지난달보다 이번 달 형편이 나아진 것이었다.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