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오순도순했던 외갓집 풍경도 아버지의 패악이 굳어지면서 점점 뜸하게 연출되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머니도 점차 외갓집 발길을 끊었다. - P133

이모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모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삼십 년이 가깝도록 단 한 번의 결행이나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기차라면, 쇠바퀴를 굴려 굽이굽이 강가도 달리고, 덜컹컹 산자락도 달리는 기차라면, 폭설 후에는 결행도 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피하느라 연착도 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의 다른 부류들한테는 이해받기 힘들겠지만 하여간 이모부가 생각하는 기차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모부의 기차는 굽이굽이 강가를 달리더라도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들이받고라도 다음 역에 늦게 도착 하면 안 되는 기차였다. - P141

이모와는 특별했지만 나는 이종사촌들과는 그리 각별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 철이 들어 서로 교류를 나눌 수 있을 만한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들 둘 다 유학을 떠나버렸다. 유학을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이종사촌들과 공유할 만한 추억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와 달랐던 점은 이종사촌들에 대한 질투심을 감쪽같이 잘 숨기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질질 흘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완벽한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 P142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미소 짓는 주혁의 얼굴에서 이모부의 얼굴을 읽어냈다. 지난 4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내가 보았던 이모부의 의례적인 미소가 거기 있었다. 아니, 불발이나 연착 따윈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 그래서 인생을 심심하게 만드는 이모부의 얼굴이 아들인 주혁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역시 엄연한 이모부의 자식들이었다. 나와 진모가 어머니의 자식이면서 아버지의 삶으로 많은 부분 규정지어진 것처럼. - P14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P152

그 애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었다. 푸르른 일몰의 시간, 사방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그 시간, 그 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 P153

지난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어떻게 견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머니는 이 불행을 해결하는 데 온갖 신명을 다 내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절규를 하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과장법은 이렇게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부풀려놓은 불행에서 이처럼 맵시 있게 빠져 나오는 어머니. 8월에 보는 어머니는 역시 과장법의 대가였다. 나는 진실로 어머니에 대해 감탄했다. - P156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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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몇 밤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적응이 안 돼. 돌아가고 싶어지지. 산새 소리, 풀잎 눕는 소리, 계곡물에 바람 스치는 소리, 두고 온 그런 것들 생각 때문에 오래 마음이 심란해지지. 도시는 나를 불안하게 해. 어디에 있어도 내 자리가 아니어서 불편해." - P117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착하고 착한 김장우. 나는 ‘그날 오후‘에서 하염없이 술을 마신다. 하염없이 마셔도 아버지를 닮은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장우는 계산을 마치고 나서 얼른 나를 부축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었는데, 가슴만 뜨거울 뿐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맥주라는 술 따위에 정신을 앗긴다는 것은 이 안진진에겐 치욕이었다. - P119

그 밤, 어디로 어떻게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대문 앞 외등에 비춰 본 내 손목시계는 아직 열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랑의 인사를 나누었던 젊은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각이어서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대문 옆 담장에 기대어 나는 피식 웃었다. 김장우는, 그 남자는, 왜 자신의 고물차에서 나를 내려놓을 장소가 여기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 P120

이모의 초대를 전하면서 어머니는 애써 심드렁한 척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주리와 주혁이 돌아왔고, 시장이 노는 날이고, 게다 가 이모부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다는 세 가지 조건이 다 맞아떨어졌으니 아니 갈 수가 없다는 식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잘사는 이모가 가난한 어머니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의 내왕은 완전 불가능이다. 이모는 어머니가 변했다 하고, 어머니는 이모가 변했다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다 변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삶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쌍둥이의 숙명이라는 것을. - P124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 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양보? 네가 양보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해?" 아무리 결혼 몇 년 만에 싸움닭처럼 거칠어진 어머니라 해도 차마 뒷말만은 더 이상 잇지 않았다. 너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내게 양보한 대신 알짜만 가득한 행복을 넘겨받은 것이라고.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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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화살표가 어긋날 것을 두려워하는 출연자들이 최선책보다 차선책을 더 많이 선택한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대개의 출연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이성을 선호한다는 것을. 그래서 천하의 매력남이나 매력녀는 의외로 불발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별 볼 일 없이 생긴 출연자라 해도 화살표를 받는 일에 큰 애로는 없다. - P101

나는 두 남자를 놓고 종종 화살표 긋기를 해본다. 먼저 조심스럽게 나영규한테 화살표를 보내본다. 그러다 움찔 놀라 화살표를 북북 지워버린다. 김장우 대신 차선책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김장우를 향해 화살표를 주욱 긋는다. 그렇다면 김장우와 내가 비슷한 수준의 인생들이란 말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나는 스스로가 놓은 덫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 이미 갈등 한 번 없이 직진으로 내게 화살표를 보낸 사람은 나영규였다. 지나간 한 달이 내게 의미심장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했다. 망설임 끝에 희미하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자국만 남기고 있는 쪽은 김장우였다. 김장우라는 사람, 원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 P101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 P102

"이건 큰들별꽃.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고 계곡을 건너다가 기슭에서 이 꽃을 발견했는데······.
김장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푸른 잎사귀 속에 숨어서, 저토록 아련한 큰들별꽃들이, 깜박 깜박 조용히 빛나고 있는 거야. 안진진. 나, 그냥 울어버렸다. 너무 작아서··· 아니, 저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싶으니까 무지 눈물이 나대······." - P103

김장우는 사진을 봉투 안에 정성스럽게 담아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곤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황망하게 돌렸다.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 P104

큰들별꽃 사진은 그날로 내 방 벽의 가장 중심에 걸렸다. 그 좌우로 실꽃풀과 흰젖제비꽃도 걸었다. 한결같이 흰 꽃을 피우고, 한결같이 가냘프고 가냘퍼서 센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듯 존재가 애매한 저 꽃들을 필름에 담기 위해 열흘씩이나 산과 들을 헤매는 사람, 김장우. - P104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 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하긴 그랬다. 사진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이고,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순간순간들의 집합체인 것을, 멈춰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 P106

저 웃음. 그는 모든 말과 말 사이를, 모든 행동과 행동 사이를 언제나 웃음으로 연결 짓는다. 마치 수채화 붓으로 연푸른 선 하나를 짧게 긋듯이 씨익······. - P108

나영규의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것이라면 김장우의 수채화 웃음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다. - P110

김장우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몰랐다. 나영규라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하지만 김장우라면, 아무 때나 씨익, 수채화 붓질하듯이 한 번 웃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저 남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유추하기란 몹시 어렵다. - P111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움찔한다.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이라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는 더욱 착해지고 싶은 것이다. 또, 그런 남자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김장우가 나한테 거는 주문은 이것이다. 착하고 착한 안진진······.
나는 착한 인간이 아니었다. 통나무집에서의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그날 오후‘라는 카페를 찾아 장흥으로 넘어가는 시골길을 택하는 것만 보아도 나의 교활함은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었다. 통나무집에서 김장우가 다시 밥값이 모자라는 난처한 경우를 당할 까봐 내가 먼저 계산을 하는데도 어, 하는 표정을 짓다 말고 휘적 휘적 나가버리는 그에게 잠시 화가 났던 것만 보아도 나는 착하지 않았다. - P115

비비추 무더기의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대면서 김장우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그늘에 서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처음이었다. 깊은 산 숲 속에서도 제 흥에 겨워 저렇게 혼잣말을 하며 사진을 찍을까. 숨어있는 야생화들을 찾아 온종일 걷다가 어느 순간 큰들별꽃 같은 작고 소박한 꽃을 만나면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 아무도 없이 너 홀로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느냐고 꽃을 쓰다듬으며 울 수도 있겠지······.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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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피곤했다. 앞으로 영화에 저녁식사까지 적어도 네 시간 이상을 이 남자와 더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아무데서나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 남자와 같이 지낼 앞으로의 네 시간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 있다면 그만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영규라면 절대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영화를 보아야 하는 사람이고, 마음에 정해둔 음식점에서 정해진 메뉴대로 식사를 해야 할 사람이며, 역시 마음에 계획한 도로를 달려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를 끝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 P76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분한 남의 집이 묵어가기에는 훨씬 편한 법이다. - P77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데······. - P79

나는 생각했다. 누구나 똑같이 살 필요는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인정하지만, 그렇지만 하필 아버지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고. 저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어가면서까지 남하고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일일랑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 P92

아버지는 부드러운가 하면 금방 사나웠고, 따뜻한가 하면 당장 차가웠으며, 웃고 있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폭포수같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어도,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정신병자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때의 아버지가 진짜 안진진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열 살의 안진진은 마음속으로만 다짐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아버지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포개서 두 사람의 손가락 길이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날, 그때 꼭 물어보리라고. - P92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 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 P94

모든 되풀이되는 일에는 내성이 생기는 법이었다. 나와 진모는, 모욕감을 느낀 어머니조차도 아버지 없는 생활에 하등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차라리 더욱 씩씩해지고 점차 이모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다를 까닭이 없었다. 아버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한 번씩 집에 들어오다가, 나와 진모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아예 일 년에 한 번 정도,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이 년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렀다. 그러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며칠 묵어 간 아버지는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슬픈 일몰에조차 꿈쩍하지 않을 내성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 P95

어머니와 진모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낯선 길에서 슬픈 일몰을 맞더라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진 아버지였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돌아올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그 명백한 증거가 내 손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마침내 서로의 손바닥을 포개고 비밀을 맞춰볼 적당한 시기에 이른 것이었다. - P96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 달은 모자란 시간 때문에 한없이 짧다. 또한,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 달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만큼 한없이 넉넉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 한 달 동안 사랑을 완성할 수도 있고 또한 사랑을 완전히 부숴버릴 수도 있다. - P99

내가 누군가에게 정색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그것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내겐 사랑에 꼭 필요 한 맹목이란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막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이 하나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탐색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의 대가일 것이므로.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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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생생 해진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베개를 밀어붙이고, 어머니는 지금부터 한판 붙어도 끄떡없다는 투다. 이 놀라운 재주, 그것은 마치 태엽이 다 풀려 늘어져 있던 장난감 강아지에게 있는 대로 태엽 밥을 먹인 후의 돌변보다 더 돌연한 것이어서 언제나 나를 기막히게 만든다. 지칠 대로 지쳐서 지푸라기처럼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대할 때는 짜증이, 태엽이 감긴 후의 생생한 어머니를 대할 때는 적의가 치솟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대응법 또한 그 못지않게 변환이 신속한 것이긴 하지만. - P61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 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 P64

생각했던 것보다, 상상했던 것보다, 두 남자를 놓고 저울질하는 이런 게임은 훨씬 어려워······. - P70

사실을 말하면 나라고 해서 화창한 5월의 어느 휴일에 초록의 향연이 아주 근사한 야외를 자동차로 달리는 일이 좋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남자와 함께하는 시간들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사랑이란 그다지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김장우가 없었다면 내가 나영규와 더불어 사랑으로까지 가버리는 일은 아주 쉬운 듯이 여겨졌다. 그에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없는 한은. - P74

"진진씨 배가 고플 즈음, 아주 자연스럽게 이 통나무집을 지나기 위해서 드라이브코스 짜느라 머리 좀 썼어요. 나는 이런 계획 짜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요. 시간이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장악한다는 느낌도 괜찮고요." - P74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하고 있는 남자, 현재를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어 먼 훗날의 회상 목록까지 계산하고자 하는 그의 도도한 힘이 나에게는 조금 성가셨다. 하지만 나는, 추억이란 계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들어진다는 등,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에 그렇게 머리를 쓰고 살자면 피곤하겠다는 등의 분위기 깨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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