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마이를 버리고서 개성으로 향했을 때······ 새비 너를 그 추운 날 난리통에 피난 가라고 떠밀었을 때······ 모두 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기렇게 마음먹으면서두 기래선 안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새비야······ 나는 죽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동무라 하기에는 너무 달랐으니······ 내레 죽으면 어마이도, 새비 너도 볼 수 없을 기야. 우린 다른 세상으로 갈 테니까. 나는 새비 너가 있는 곳에 절대루 갈 수 없을 테니. 그러니 이게 전부야······ 이게 전부야······ 증조모가 두 손으로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우리 새비,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은 곳으로 가서 더는 힘들지 말구, 마음 쓰지도 말구, 새비 네가 그리워했던 사람들 모두 만나고 지내라. - P293
나는 남편의 외도와 그와의 이혼이 내 무릎을 한순간 꺾이게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내가 믿었던 만큼, 내가 믿고 싶었던 만큼 그는 내게 정말 의미 있고 비중 있는 존재였을까. 그의 외도를 알기 전의 나는 정말 내 믿음대로 덜 아프고 덜 병들어 있었을까. - P298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 P29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어마이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한 건 없나······ 희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 가끔은 희자 너레 새가 되어 꿈에 나온다고 하셨더랬어. 아주 잘생긴 새가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걸 본다구.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 그 새가 나인 줄 어떻게 알아······ 회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너레 새가 되든 두더지가 되든 감나무가 되든 새비 아즈마이는 한눈에 희자로구나, 잘생긴 우리 희자로구나, 알아보시지 않았갔어. – 그래, 그랬을 거야. - P302
이야기하는 할머니, 소리 내어 웃는 할머니, 화투 치는 할머니, 놉에 가려고 봉고차에 올라타는 할머니, 정자에 앉아서 친구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할머니, 차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가끔 돋보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읽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모습 중에서도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식탁의자에 앉아서 한 손을 컵에 댄 채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때로는 몇 초에서 길게는 일이 분 정도 할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돌아와서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감각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마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프리 다이버처럼 유유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P308
"미선이는 정연이 일을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미선이 잘못이 전혀 아닌데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미선이는 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찔렀다. "엄마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넌 나랑 달라. 그애의 딸이잖아.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야." - P311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나는 엄마의 사진첩에서 본 결혼식 사진을 떠올렸다. 식 직전까지 울었는지 진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붉은 얼굴과 충혈된 눈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결혼사진이 담긴 앨범에는 신혼여행 사진과 신혼시절의 사진도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즐거워 보였는데, 그것이 엄마의 젊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순간을 미화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가 그 시절을 실제로 그렇게 즐겁게 보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은 엄마가 분명히 그 순간 빛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P315
"언니는······ 어떤 아이였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애를 똥강아지라고 불렀어." "똥강아지요?"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 P316
작은방 구석에 이불을 개켜놓는 자리가 있었다. 언니는 그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달리면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이웃들에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 나에게는 생생했다. 사람들은 네다섯 살의 기억이 그토록 구체적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그 강한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절박하게 기억했다. - P317
어떤 교사들은 부모가 제대로 보호해줄 수 없는 집의 아이들을 골라 괴롭히곤 했다. 책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 그게 표적이 된 아이의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엄마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면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해변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 마다 증조모는 엄마를 찾아냈다. 어두워지는 해변에서 미선아, 미선아, 부르며 걸어오던 중조모의 모습을 엄마는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반가움을,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무엇보다도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엄마는 기억했다. - P329
나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사십대의 나의 모습이 보여요.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어머니가 오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육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한 적도 많았어요.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2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 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 P335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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