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할 수도 있었지만, 명숙 할머니가 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몇 번 더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명숙 할머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마당 쪽을 바라보고는 이제 그만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이 명숙 할머니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도무지 그 순간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 P205
희자는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멀고 커다란 세계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결국 희자는 나를 잊겠지. 편지가 점점 뜸해지면서 할머니는 희자를 조금씩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희자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나는 너무 오래 개성과 대구를 그리워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 삶은 개성에도, 대구에도 있지 않아. 내 삶은 희령에 있어. 나는 희령에서 살아가야 해.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희자와 새비 아주머니, 명숙 할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희자의 삶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처럼, 할머니 또한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P213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할머니는 그때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증조모의 눈에 보였던 남선의 단점들을 할머니 또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그저 노처녀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자신을 속였다. 남선 정도라면 남편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의 경고를 무시했다. 증조부의 목소리로 할머니는 생각했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는데.‘ - P218
할머니는 증조부에게서 작은 선물 하나도 받은 기억이 없었다. 피난 갈 때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얇은 외투를 입고 떨어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증조부의 그런 행동이 너무 익숙해서 서운하지조차 않았다. 할머니와 남선의 관계는 그런 익숙함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배려하는 남자, 아내와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지 않는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상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 했다. 그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 P219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스무 살 이후의 할머니를 만난 이들은 할머니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비웃거나 차갑게 평가했으니까. 그 냉소적인 가면 뒤에 상처받고 싶지 않고, 더는 울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 P221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마이가. - P223
할마이, 할마이, 부르며 곁에서 아무 이야기나 종알거려도 그걸 다 들어주고 가끔씩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명숙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면 가까이 다가와서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도,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영옥이 왔냐, 묻던 얼굴도. 명숙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해도 할머니는 그녀가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새비 아주머니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가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단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구 집을 떠날 때로 돌아가서 명숙 할머니를 껴안고 싶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 P224
– 기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기야? 그를 찾아가면서 할머니는 적어도 그가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줄 알았다.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를 속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그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 P228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 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 P235
"너랑 이야기하다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침묵을 깨고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뭐가요?" "그냥. 가깝진 않더라도 우리가 종종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 그런 생각이 드니까 지나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고, 또 이 순간도 지나갈 걸 아니까 아깝고." 개와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이 삼십대인 나의 시간과 칠십 대인 할머니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 P243
"의사가 그러는 거예요. 이런 사고를 당하고 이 정도 다친 건 흔한 일이 아니라면서 저보고 운이 좋다고요. 부정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잡고 싶을 만큼 아까운 시간도 없었어요. 그런 건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찬바람에 몸이 떨려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나이 때 나도 그랬어.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시간을 다 퍼다가 갖다버리고 싶었어······"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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