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움직일 때마다 꽈배기 도넛에 입힌 설탕이 떨어지듯 우수수 눈이 떨어졌다. - P11
아무리 고약하고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 해도 왕발이 제대로 된 죽음을 누리지못했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런 죽음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어쩌면 나와 괴짜, 그리고 밖에 있는 사슴들에게도 왕발과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우리는 그저 죽은 몸뚱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가 될 것이다. - P17
내 생각에 죽음은 물질의 절멸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몸에 가장 적합한 해결책이다. 소멸된 시체는 그들이 생성된 블랙홀로 다시 빨려 들어가야 한다. 영혼은 빛의 속도로 빛을 향해 유랑할 것이다. 만약 ‘영혼‘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 P21
나는 조심스럽게 왕발의 발싸개를 풀고 그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경악스러웠다. 발이야말로 우리 몸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부위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성기도, 심장이나 뇌도 아니고, 그리 대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과대평가를 받아 온 장기(臟器)도 아닌, 발 말이다. 발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몸이 보내는 묵직한 신호가 바로 발에서 흘러나온다. 땅을 디딤으로써 우리 몸과 땅을 접촉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모든 비밀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물질의 원소들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로부터 분리된 이질적인 존재라는 비밀. 발은 소켓에 꽂는 우리의 플러그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저 벌거벗은 발은 왕발의 기원이 여느 인간과는 다르다는 증거를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금속을 무한대로 녹이고 질서를 혼돈으로 바꾸는 일종의 이름 없는 형체였다. 그는 아마 악마와 같은 부류였을 것이다. 사악한 존재는 그들의 발을 보면 안다. 대지에 뭔가 다른 모양의 인장을찍어 놓으므로 - P22
죽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일종의 애무와 같았다. 나는 그가 살면서 과연 이런 다정한 손길을 경험한 적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우리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천천히 옷을 입혔다. 그 육신의 무게가 내 가슴에 닿으면서 메스꺼움을 동반한 혐오의 감정이 자동으로 솟구쳤지만, 어느 순간 문득 이 육신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달래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괜찮을 거야.‘ - P23
"자, 주목하세요!"라고 손가락은 말하고 있었다. "주목! 여기 당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감춰졌던 단계의 중요한 시작점이며, 특별히 주목할 만한 그런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 시각, 이곳에 모여 있는 겁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밤, 이 고원의 작은 오두막에 말이죠. 나는 죽은 몸뚱이로, 당신들은 하찮은 늙은 인간으로말이죠.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 바로 지금부터 모든 게 시작됩니다." - P26
괴짜와 나는 차갑고 축축한 방, 어슴푸레한 회색빛 시간이 흐르는 시린 공허 속에 서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빠져나온 뭔가가 세상의 일부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생각. 그러므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흠이 있든 결백하든 간에 결국 남는 건 거대한 허무(虛無)가 아닐까.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며 흩날리는 눈송이가 허무의 공간을 조금씩 채우기 시작했다. 눈송이들은 일말의 서두름도 없이, 마치 깃털처럼 허공에서 자신의 고유한 축을 따라 회전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떠돌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왕발에 대한 원한이나 연민을 간직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남겨진 거라고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죽은 몸뚱이뿐. 지금 그 몸뚱이는 차분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물질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기뻐하고, 물질도 영혼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기쁜 듯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형이상학적인 이혼이 성립되었다. 이제 끝이었다. - P26
분노는 정신을 명료하고 날카롭게 만들고,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다른 감정을 모두 휩쓸어 버리고 몸을 통제한다. 분노는 분명 모든 지혜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분노에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 P30
개는 계속해서 괴짜의 발밑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마치 자신의 작고 수척한 몸이 그려 내는 궤도 밖으로 괴짜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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