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가 만들어내는 기쁨은 자신이 견뎌야 하는 모욕과 비례해 커지게 되어 있어요." 부포가 보뜨까로 술잔을 다시 채우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대는 예수의 이미지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럴 수 없기도 하네요." 냄새나는 주방 한구석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성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고, 그 구석에서 밤이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왔다. "멸시받고 거절당한 속죄양들의 굽은 어깨에는 군중의 격분이 쌓여 있고, 소재가 쌓여 있지만, 그 자신이 웃음의 주제인 거죠.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우린 그런 주제가 되도록 선택받은 거요." - P235

우리를 고용한 사람들은 우릴 영원히 즐겁게 노는 존재라고 생각하죠. 우리의 일은 그들의 기쁨이 되어주니까, 그들은 우리의 일이 우리에게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을 놀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생각과, 우리의 놀이를 일로 여기는 우리의 생각에는 언제나 깊은 간극이 있죠. - P236

우리는 속세의 모욕이라는 끝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저 아래에 계속 머물러야 할 운명이니까.
‘인간의 아들임을, 우리 광대들도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 P237

"우리에게 한가지 특권은 있지. 내쫓기고 무시당하는 우리의 신분을 뭔가 근사하고 귀중하게 만들어줄 아주 중요한 특권말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창조해낼 수 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니까." - P240

나처럼, 우리처럼, 또 젊은 친구, 자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일은 극소수에게만 허용되지. 어떤 크레용으로 칠할까를 놓고 즐겁게 망설이다가 바로 그 선택의 순간에 말이야. 내가 어떤 눈을 가질지, 어떤 입을 가질지는.…….완전히 자유라고. 그러나 일단 그 선택이 이루어지면 난 그에 따라 영원히 ‘부포‘라는 존재가 되는 형벌을 받는 거야. 영원한 부포, 부포 대왕 만세! 어디선가 어떤 아이가 나를 놀랍고 신기하고 괴물 같은 존재, 그리 창조되지 않았다 해도, 애들에게 더러운 세상의 더러운 삶의 방식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로 기억하는 한 영원하겠지! - P241

"그렇지만," 부포가 말을 이었다. "나는 과연 내가 창조해낸 부포인가? 아니면 내가 내 얼굴을 부포의 얼굴로 보이게 만들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 아닌 다른 자아를 창조해낸 걸까? 그리고 이 부포의 얼굴이 없다면 나는 누구지? 자,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내 분장을 다 지워낸 그 아래는 그저 부포가 아닌 거야 텅 빈 부재. 텅 빈 공허라고." - P241

"때로는." 그록이 말했다. 이 얼굴이 어디선가 육체에서 분리된 채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 얼굴을 취할 광대를 기다리면서, 얼굴에 생명을 줄 광대를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알 길 없는 분장실 거울 안에서, 마치 더러운 연못에 있는 물고기처럼 거울의 심연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된 얼굴 말이에요. 이 얼굴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아 자신이 반사된 모습을 초조하게 살피는 사람을 발견하면, 물고기는 말없는 깊은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올 거예요. 식인물고기가 당신의 존재를 통째 삼키고 대신 다른 것을 주고자 기다리고 있는 거죠......"
"하지만 오랜 동료인데다 백전노장인 우리라면." 그릭이 말했다. "분장하는 데 뭐 하러 거울이 필요하겠어요? 아니 필요없어요. 나한테 필요한 거라곤 내 오랜 옛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죠. 우리가 우리 얼굴을 함께 만들 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서로의 샴쌍둥이를 간과 폐장을 나누어쓸 만큼 강력한 유대로 묶인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릭이 없으면 그록은 불완전한 음절, 프로그램에 적힌 오타 아니면 광고판 위의 간판장이가 하는 딸꾹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지요.
내가 없다면 그록도 마찬가지지요. 오, 젊은 친구, 5월 초하루 양반, 그릭과 그록이 만나서 두 개의 무익함을 공유하기전까지, 하나의 얼굴 즉 우리의 얼굴을 위해 각각의 텅 빈 얼굴을 내버리기 전까지 우리의 무능한 존재를 물어버리기 전까지, 무능함의 변증법에 따라 그것이 각부의 총합 이상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과거 우리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어찌 말할수 있겠습니까. 무능함의 변증법이란 바로 이거죠. 무 더하기 무는 무한이다. 단・・・・・・더하기의 속성만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변증법의 방정식을 도출한 까닭에 속을 볼 수 없는 분장 아래서도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러나 부포는 아무것도 도출해내지 못했다.
"허튼소리." 그는 걸쭉한 트림을 쏟아내며 말했다. "미안하오. 그러나 녀석들, 내 오랜 친구들, 무에서 나올 것은 무라오. 그것이 무의 영광이지."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