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말을 하면 많은 남자가, 심지어는 여자들도 겁을 먹고 화를 낸다. 이 야만적인 사회에서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려면 전복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짓눌리고 억눌린 당신은 탈주하고 전복한다. 우리는 화산 같은 존재다. 우리 여자들이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진실로서, 인간의 진실로서 말하는 순간, 모든 지형도가 뒤바뀔 것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산맥들이 생겨날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 - P11

나는 트랜지션tansition을 시작한 뒤에야 내가 일생 동안 영위해온 독립독행이 대체로 남성 특권에 따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젊은 여성으로서의 삶은 나 자신을 재교육하도록 명령한다.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행위를 나약하거나 한심한 일이 아니라 필연처럼 여기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 P19

공연이 있을 때는 반드시 클렌징 티슈를 챙긴다. 비교적 안전한 장소인 공연장을 떠나기 전에 서둘러 ‘얼굴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마에 붙은 빈디bindi 를 떼어내 바람에 날려 보내는 밤이면 어느 때보다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마치 내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하 나와 상징적 이별을 하는 것 같다. - P21

내가 남자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연료다. 이 연료는 생존 본능으로서 내 몸을 보호하지만, 남용으로 이어져 내 몸을 좀먹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뒤 나는 무수한 급성 통증과 반복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repetitive strain injuries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떤 의사도 이 증상을 설명하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심 어린 눈길로 물을 뿐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디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그럴 때면 이렇게 답하고만 싶어진다. "제겐 사는 게 공포인걸요." - P22

심지어 오늘날 에도 (아무리 친구나 동료일지라도) 다른 남자들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신뢰할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말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허용되는지조차 의문이다). 크루징cuising처럼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경멸일 수도 있다. - P37

프라이드 축제가 한창인 곳에서 나는 퀴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네가 자행한 언어폭력을 목격하고 나를 비호한다. 그러나 프라이드 축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그 자리에 다른 퀴어들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불과 일 분이 채 되지 않는 다툼이었지만, 너는 순식간에 나를 학습된 공포에 빠뜨린다. 이런 두려움의 감정이야말로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처럼 느껴진다. 트랜스들에게는 경계심을 풀고 숨을 돌리는 호사가 허락되지 않는다. 트랜스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트랜스 행진‘으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조차 횡단 보도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타인을 함부로 만지는 변태로 취급당한다. - P56

너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짝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너는 친구로 지내자는 내 제안에도 마침 새로운 친구를 찾고 있었다며 선뜻 태도를 바꿔주었다. 우리의 친밀감이 커져가도 너는 결코 선을 넘는 법이 없다. 너는 내게 은근히 어필하지도,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달라지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지도 않 는다. 너와의 우정은 어른이 된 내 삶에 최초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의견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대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준 남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 P60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공포를 유발한다. ‘사랑에 빠지다fall이‘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낭만적 사랑에는 언제나 일종의 낙하fall가 우선한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통이나 통제 불능에 빠뜨릴 가능성을 수반한다. 지금껏 나는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위험에도 늘 기꺼이 사랑에 뛰어들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거나 느껴왔던 모습과 다를 때에도 마찬 가지였다. 친구들이 내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조차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사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 P67

내가 남자들을 두려워하는 건 한 남자와의 이례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일상에서 매일같이 손상을 경험한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경험들도 존재하고, 앞으로 직면할 경험들도 엄연히 남아 있다.
내가 남자들을 두려워하는 건 이 같은 경험들로 인해 누적된 손상 때문이다.
내가 겪은 일들은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나는 내 이야기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일지 두렵다. 수많은 사람이 이보다 더 잔인한 남자들의 폭력을 견뎌왔다. 나는 또한 이 이야기들이 유발할 가장 보편적인 반응이 연민 일까 두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고 변화를 일으키려면 연민을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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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고원 위로 날아올라 박쥐의 몸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박쥐의 감각을 통해 내려다보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림자처럼 보일까? 전율하는 덩어리처럼 보일까? 아니면 소음의 근원처럼 느껴질까?


사실 박쥐들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나 역시 세상을 다른 구역에서 거꾸로 보고 있었다. 땅거미를 좋아하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의 생활에 적합지 않다는 점도 박쥐와 비슷했다. - P201

학교에서 귀가하던 나는 그날따라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사실 내가 왜 우회로를 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묘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 ‘무언가‘ 중 하나가 아마 ‘두려움‘이 아닐까? - P203

자연 친화적인 드라이브보다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저 높고 튼튼한 유형의 SUV 자동차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커다란 바퀴는 흙길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오솔길을 손상시킨다. 또한 강력한 엔진은 강한 소음을 유발하고 다량의 배기가스를 배출한다. 나는 그 차주들이 분명 멍청한 인간들이며, 큰 차를 소유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자람을 보완하고 싶어한다고 확신했다. - P204

훗날 빠르게 움직이는 행성이 불현듯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통과하면서 여기, 아래쪽에 사는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징후들이 이런 우주적 사건들을 암시해 주었는데도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솔길 위에 놓인 나뭇가지를 밟기도 하고, 냉동실에 맥주를 넣어 놓고는 제때 꺼내는 걸 잊어버린 누군가로 인해 맥주병에 금이 가기도 하며, 야생장미 덤불에서 붉은 열매 두 개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전부 이해한단 말인가?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행성의 배열, 나아가 우주 전체가 깃들어 있다. 온도계, 동전, 알루미늄 숟가락, 그리고 도자기 컵, 열쇠, 휴대폰, 종이 한 장과 펜, 내 회색빛 머리카락 중 하나의 원자에는 생명의 기원이, 그리고 세상에 그 시작을 부여한 우주적 재앙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 P208

숲은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가장 넓고 깊고 따뜻한 은신처였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거기서는 나의 가장 골치 아픈 증세, 그러니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껏 흘러내린 눈물이 내 눈을 씻어 시력을 밝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건조한 눈을 가진 사람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 P214

알고 보니 평범한 그루터기 하나도 피조물들의 왕국이었다.
그 안에 복도와 방, 통로가 만들어지고, 곤충들의 귀한 알들이 보관되었다. 유충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무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에 감동받았다. 그들은 나무라는 거대한 미동(微動)의 생물체가 본질적으로 매우 연약하고, 사람들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한 채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나무에게 맡겼다. - P222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 P223

"이 물질을 나무토막에 문지르면 암컷 딱정벌레들이 알을 낳기 위해 달려듭니다.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바로 이 통나무를 향해 모여드는 거죠.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요. 몇 방울만 뿌리면 돼요."
"사람들은 왜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냄새를 안 풍긴다고 누가 그랬죠?"
"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데요."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봐요, 당신은 결국 인간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계속 믿고 있나 보군요." - P225

대체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생활하며 수십 년을 함께 보내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잠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밀치기도 하고 상대의 얼굴에 숨결을 내뱉기도 하면서 어떻게 한 침대에서 자는 걸까? 물론 내가 그런 경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동안 나는 천주교 신자와 한 침대를 썼다. 하지만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 P225

하지만 일을 마친 뒤, 작약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으려니 온 세상에 고운 금빛 층이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했나요?"
보로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한순간에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혔다. 내 눈앞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넘실거리듯 펼쳐졌다. 기억 속의 모든 것은 실제보다 훨씬 좋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대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멩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 P229

그에게도 증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건강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상태이기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조용히 병을 앓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을지는 알 수 있으니까. - P235

"당신은 종교적인 사람인가요?"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무신론자예요."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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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야말로 진정한 우정이다." - P130

"신은 인간을 행복하고 부유하게 창조했어요. 하지만 교활함이 무고한 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죠."* - P134

어디선가 읽은 바에 따르면, 이른바 ‘포식자’라고 불리는, 성령처럼 나른하게 하늘을 맴돌던 매가 개똥지빠귀 떼를 공격하면 이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방어한다고 한다. 이 새 떼는 도저히 믿기 힘든,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싸울 줄도 알고, 상대에게 복수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방법은 이렇다. 공격을 당하면 재빨리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포식자를 향해 일제히 똥을 싼다.
수십 마리 새의 흰 배설물이 매의 화려한 날갯죽지로 떨어지면서 더럽혀진 깃털이 서로 엉겨 붙고, 부식산(腐植酸)으로 범벅이 된다. 결국 매는 정신을 차리고 새 떼를 향한 추격을 멈춘다. 그러고는 구역질을 하며 풀밭에 내려앉는다. 깃털이 어찌나 심하게 더럽혀졌는지 최악의 역겨움을 체험하게 된다. 매는 온종일 깃털을 닦고, 그다음 날도 깃털을 닦으며 시간을 보낸다. 잠도 자지 않는다.
날개가 그토록 더러워진 상태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계속해서 구역질이 난다. 생쥐 같기도 하고 개구리 같기도 하고 썩은 고기 같기도 한 냄새. 단단히 굳어 버린 배설물은 부리로도 제거되지 않는다. 매는 추위에 떤다. 몸에 들러붙은 깃털을 통해 빗물이 피부로 스며든다. 이제다른 매들도 그를 피한다. 마치 악성 질병에 감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매는 존엄성을 상실하고,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 P144

이 세상은 얼마나 크고, 또 활기에 넘치는지. - P145

먹먹한 슬픔과 비탄. 매번 동물이 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러 한 회한과 애도의 감정은 아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의 애도가 끝나면, 또 다른 애도가 이어지므로 나는 끊임없이 상중이다. 이것이 나의 상태다. - P148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 P148

"고통받는 사람은 신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여기서 뒷모습이란 게 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엉덩이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의 앞모습조차 상상하기 힘든데 뒷모습은 과연 어떨까. 어쩌면 이 말은 고통받는 사람은 일종의 쪽문과도 같은 특별한 창구를 통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축복을 받으며, 고통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진리를 포착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건강한 사람이란 결국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삶의 조화와 균형이 맞춰지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P165

겨울 아침은 강철로 만들어진 듯 금속 같은 맛을 내며, 모서리가 날카롭다. 1월의 수요일 아침 7시,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의 편안함이나 쾌락을 위해서 창조된 건 더더욱 아니다. - P168

인생의 한순간을 잘게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엔 옷장 속의 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군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 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 P180

종종 궁금할 때가 있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각자의 몸이 본능적으로 선망하는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형태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이러한 이상형에 부합되는 특정한 성향들을 발견하곤 한다. 진화의 목적은 순전히 미학적인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적응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화란 철저히 아름다움의 문제이며, 주어진 각자의 모습에서 최대한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다. - P184

타인의 인생 이야기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걸맞게 응답하는 수밖에 없다. - P186

나는 내 체질이 좋은 상태라고 믿는다. 하지만 내 체질에는 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특이한 증세가 있다. 어렸을 때, 어떤 장소에 가면 꼭 어디가 아프곤 했다. 다음 날이나 이삼 일이 지나면 항상 정확히 똑같은 증세, 똑같은 복통이 시작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경은 이런 경우, 산악 지대에서 하는 것과 같은 수련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베이컨 경은 거짓말쟁이다. 어떤 수련도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심지어 가장 작은 세포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수련을 ‘주제넘음‘과 ‘어리석음‘이라 부른다. - P192

종달새 한 마리가 날개를 다치면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를 멈춘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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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은 닿을 수 없지만 어딘가 먼 곳에 존재하는 빛, 하지만 언젠가 죽으면 볼 수 있는 빛에 대해 노래했다. 지금은 유리창이나 찌그러진 거울을 통해서만 보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그 빛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면 그 빛은 우리를 삼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원한 빛은 우리의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빛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그 빛의 조각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 심지어 왕발조차도.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기뻐해야 마땅하다. 노래를 부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지만, 실제로 나는 영원한 빛이 모두에게 제각기 할당된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그 어떤 신도, 그리고 그 어떤 천상의 회계사도 이러한 분배의 업무를 짊어지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나의 존재, 특히 전지전능한 어떤 존재가 홀로 모든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생각에는 어떤 방어적인 메커니즘을 미리 갖추지 않는 한, 그 존재는 고통의 짐으로 인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세상의모든 고통을 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순명료하고 효과적이며 공정한 기계만이. 하지만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작동된다고 가정하면 우리의 기도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 P60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표면이 다른 행성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사실일까? 또한 인간이 원죄를 저지르고 타락한 이후, 모든 빛이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으며, 그렇게 우리 모두가 거대한 공허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것도 사실일까?
그렇다, 사실이다. 그러므로 티브이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매일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쉽게 망각할 테니까. 우리는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이고, 신이 우리를 용서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결국 우리가 저지른 행위는 미세하게 진동하는 광자(光子) 에너지로 바뀌어 마치 영화에서처럼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갈 것이며, 다른 행성들은 세상의 종말까지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 - P66

밤이 되면, 나는 금성을 관찰하면서 아름다운 처녀자리의 이행과정을 상세히 추적해 본다. 나는 이 처녀자리가 ‘이브닝 스타‘ 처럼, 아니면 마술처럼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태양 뒤편으로 저무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영원한 빛의 불꽃, 땅거미가 질 무렵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이 무렵에는 단순한 차이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한 땅거미 속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 P69

고원이 빚어내는 흑백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슬픔이 세상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픔은 모든 것의 본질 가운데에 있으며, 다섯 번째 원소이자 정수였다. - P73

그녀를 잘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녀의 책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잘 알기에 책장을 펼쳐보기가 두려웠다. 만약 그 책 속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묘사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인식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그러니까 펜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그녀와 같은 인물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들은 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눈(目)이며, 자신이 보는 모든 것을 문장으로 바꿔 버리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현실을 끄집어내어 거기서 가장 본질적인 것, 그러니까 말이나 글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들을 삭제해 버린다. - P78

출생에 질서가 있는데 죽음이라고 질서가 없겠는가? - P86

세상의 미세한 조각들은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꿰뚫기 어려운, 복잡한 연결망의 우주에 의해 나머지 다른 조각들과 견고하게 묶여 있다. 그렇게 세상은 작동한다. - P87

나는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쓰인 세상의 모든 시가 내게는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모호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이런 식의 폭로가 좀 더 인간적인 방식, 그러니까 산문으로 기록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104

"어떤 악마가 이 혐오스러운 공허함을, 이 영혼을 오싹하게 만드는 허공을 만들었을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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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이름과 성이라……. 이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인가.
그런 식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고 개별적인 특성과도 너무 동떨어져서 해당 인물을 떠올리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세대별로 유행하는 이름이 따로 있어서 갑자기 모든 사람이마우고자타나 파트리크, 그리고……… 맙소사, 정말 듣기 싫은 이름이지만, 야니나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지칭할 때 이름과 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볼 때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표현이나 느낌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미를 상실한 단어를 아무렇게나 내뱉기보다는 이것이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 P34

나는 우리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타인을 바라본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어울린다고 판단되는 이름을 상대에게 부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다양한 이름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우리와 교류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 P34

우리는 겨울에 용감하게 맞서는 중이다. 이걸 폴란드어로는 ‘이마를 들이민다(stawiać czoło)‘라고 표현한다. ‘정면으로 부딪치다‘라는 의미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표현인가? 실제로 우리는 뭔가와 정면으로맞설 때 ‘이마‘가 아니라 ‘아래턱‘을 앞으로 내밀며 호전적인 태세를 갖춘다. 동네 어귀를 서성대는 거친 사내들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말로 자극하면, 그들은 턱을 내밀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괴짜와 나 또한 그렇게 겨울을 자극하는 중이다. 하지만 겨울은 우리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별난 늙은이들, 한심한 히피족이라며 세상이 우리를 무시하듯이. - P37

우리의 머리 위에 펼쳐진 시골 하늘은 칙칙한 화면처럼 어둡고 낮다. 거기서 구름은 끊임없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우리의 집들은 그래서 존재한다. 우리를 하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지 않으면 작은 유리 공처럼 투명한 우리의 몸속 깊은 곳까지 아니, 우리의 영혼까지 파고들 것이다. 만약 영혼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다. - P39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많은 남자들이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을 경험한다. 사회적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감소되고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증상이다. 이러한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수많은 생각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은 듯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한 도구와 기계류에 관심이 집중되고, 2차 세계 대전이나 정치인 또는 악당과 같은 유명 인사의 이력에 흥미를 느낀다. 반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은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나는 괴찌가 이러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P41

이따금 자신의 정신적 선호도 따위는 무시한 채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떤 인간이 그동안 저지른 행위의 총합을 근거로, 그 인간의 삶은 타인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누구나 내 말이 맞다는 걸인정하리라고 확신한다. - P42

우리 나이쯤 되면 사람들이 항상 우리를 참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적응해야 한다. 과거에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회피하고 기계적으로 "네, 네."를 반복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계를 들여다본다든가 코를 문지르는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이러한 퍼포먼스가 결국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말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꺼져, 할망구야." 젊고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나와 비슷한주장을 해도 똑같은 취급을 받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풍만한 몸매에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이라면 어땠을까? - P45

사람이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 P50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넓은 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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