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이름과 성이라……. 이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인가. 그런 식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고 개별적인 특성과도 너무 동떨어져서 해당 인물을 떠올리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세대별로 유행하는 이름이 따로 있어서 갑자기 모든 사람이마우고자타나 파트리크, 그리고……… 맙소사, 정말 듣기 싫은 이름이지만, 야니나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지칭할 때 이름과 성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볼 때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표현이나 느낌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미를 상실한 단어를 아무렇게나 내뱉기보다는 이것이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 P34
나는 우리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타인을 바라본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어울린다고 판단되는 이름을 상대에게 부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다양한 이름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우리와 교류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 P34
우리는 겨울에 용감하게 맞서는 중이다. 이걸 폴란드어로는 ‘이마를 들이민다(stawiać czoło)‘라고 표현한다. ‘정면으로 부딪치다‘라는 의미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표현인가? 실제로 우리는 뭔가와 정면으로맞설 때 ‘이마‘가 아니라 ‘아래턱‘을 앞으로 내밀며 호전적인 태세를 갖춘다. 동네 어귀를 서성대는 거친 사내들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말로 자극하면, 그들은 턱을 내밀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괴짜와 나 또한 그렇게 겨울을 자극하는 중이다. 하지만 겨울은 우리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별난 늙은이들, 한심한 히피족이라며 세상이 우리를 무시하듯이. - P37
우리의 머리 위에 펼쳐진 시골 하늘은 칙칙한 화면처럼 어둡고 낮다. 거기서 구름은 끊임없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우리의 집들은 그래서 존재한다. 우리를 하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지 않으면 작은 유리 공처럼 투명한 우리의 몸속 깊은 곳까지 아니, 우리의 영혼까지 파고들 것이다. 만약 영혼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다. - P39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많은 남자들이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을 경험한다. 사회적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감소되고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증상이다. 이러한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점차 말이 없어지고, 수많은 생각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은 듯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한 도구와 기계류에 관심이 집중되고, 2차 세계 대전이나 정치인 또는 악당과 같은 유명 인사의 이력에 흥미를 느낀다. 반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테스토스테론 자폐증은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이해를 방해한다. 나는 괴찌가 이러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 P41
이따금 자신의 정신적 선호도 따위는 무시한 채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떤 인간이 그동안 저지른 행위의 총합을 근거로, 그 인간의 삶은 타인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누구나 내 말이 맞다는 걸인정하리라고 확신한다. - P42
우리 나이쯤 되면 사람들이 항상 우리를 참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적응해야 한다. 과거에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회피하고 기계적으로 "네, 네."를 반복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계를 들여다본다든가 코를 문지르는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이러한 퍼포먼스가 결국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말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꺼져, 할망구야." 젊고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나와 비슷한주장을 해도 똑같은 취급을 받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풍만한 몸매에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이라면 어땠을까? - P45
사람이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 P50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넓은 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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