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절대 얼굴을 붉히질 않는군.
나는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그만큼 힘주어 나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더는 얼굴을 붉히지 않아, 그게 문제야. 맨날 미안하다고 말은 하지만 얼굴은 붉히지 않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건가?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 P32

나를 침대에 눕히고 횃불을 들어 내 목에 남은 벌건 자국과 팔과 가슴에 자주색으로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비춰보았다. 멍이 아니라 얼룩이라도 되는 듯이 그걸 문질렀다.
"색이 완벽하네. 이것 좀 봐." 그가 말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신처럼 귀한 캔버스는 없어." - P33

"나 임신했어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 나는 둥그렇게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배를 살짝 내밀었다. 어쨌든 그는 여자들이 임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이상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내 배를 본 그의 얼굴이 하얘졌다. 거의 나만큼 하얘졌다.
"의사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
"의사한테는 안 보여줬어요. 당신한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어서. 여보, 나 정말 기뻐요. 우리한테 둘째가 생기는 거잖아요. 앞으로 셋째도 낳고 또—" 하지만 이미 문이 닫혔다. - P37

문을 열자 작업실 한복판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 여자아이가 보였다. 돌이야. 나는 살짝 떨렸기 때문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이고, 깨어날 리 없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옅은 진주빛이었고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은 감았고 돌로 만든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파포스보다 어려 보였다. 동글동글 귀여운 리본에서 금색으로 칠한 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몸에 딱지도 앉지 않았고 손톱에 모래가 끼지도 않았다. 이 아이는 염소를 따라다니지도 말을 안 듣지도 않을 것이다. 두 뺨 위로 홍조가 보일 것만 같았다. - P42

비단을 담요처럼 두르고 있기에 벗겼다. 손목에 꽃 팔찌를 끼고 있기에 떼어냈다. 아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딸아, 미안."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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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방에서 나갔고 남편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이의 태도에 이를 갈았다.
"당신은 나보다 저 아이를 더 좋아하지?"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요. 나는 골똘히 생각하느라 손질을 하지 않아 떡이 진 그의 긴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애가 지금 있는 여선생은 감당을 못 할 정도로 똑똑해서 그래요. 그래서 심심해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가 없으니까요.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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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시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그는 내 골반과 배를 세게 주무르며 돌이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움찔도 하지 않았고 그랬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분명해, 따뜻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오, 여신이시여,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하여주소서."
그는 잠시 후에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대고 눌렀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내 생명, 내 사랑이여.
살아나라."
나는 바로 이 순간, 이슬을 머금은 새끼 사슴처럼 눈을 떠 마치 태양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고 경외와 감사가 담긴 탄성을 조그맣게 터뜨려야 한다. 그러면 그가 나를 따먹는다. - P18

"정말 미안해요, 여보. 그애를 위해 내 실수를 만회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나를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그 아이를 생각해서 굽실거리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것 같으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아예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하얗고 매끈한 것을 좋아한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댔다. - P22

"그러게, 도망치지 말았어야지.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요, 목숨을 걸고 맹세해요. 당신이 떠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날마다 당신이 다시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요. 당신은 내 남편이자 아버지이니까요."
"어머니이기도 하고."
"맞아요, 어머니이기도 하죠. 그리고 오라버니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고. 이 모든 거예요."
"이게 다 파포스가 보고 싶어서 하는 소리지?"
"당연히 보고 싶죠. 보고 싶지 않으면 내가 뭐가 되겠어요? 피도 눈물도 없고 파렴치한 어미가 되지 않겠어요? 당신과 여신님은 나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숨이 가빴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바닥이 딱딱해 무릎이 아팠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23

그가 나를 바라보며 자기 솜씨에 감탄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기가 이런 작품을 만들던 장면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조각상, 제목은 애원하는 여인. 이걸 팔면 아라비아의 왕처럼 살 수 있으리라. - P24

그가 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뭐지?"
나는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은색 실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우리 아이가 남긴 흔적이잖아요. 살이 튼 자국이요."
그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생긴 거야?"
"아이가 태어났을 때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다.
"보기 싫구먼."
"미안해요, 여보. 여자들은 다 이래요."
"당신이 돌이라면 깎아서 없애버릴 텐데."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서 떠났다. - P25

사실 남편은 내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남편 잘못은 아니다. 그에게 나는 자신의 손길로 빚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에 불과할 테니까. 그랬으니, 내가 살아 숨쉬기를 바랐을 때, 그는 따먹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해지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어떻게 내가 인간인 동시에 여전히 석상일 수 있을까. 태어난 지 11년밖에 안 된 나도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데. - P25

파포스가 여덟 살이던 해에 그가 가정교사를 내보냈다.
"그자가 당신을 쳐다보잖아."
나는 그날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파포스와 글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릴 수밖에요."
내가 마을에서 가장 빼어난 미인이었으니 다들 나를 쳐다봤다. 자랑 삼아 하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나야 한 게 없으니 자랑할 일도 없다.
남편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나는 해명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가정 교사는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고, 파포스는 석관을 빼앗겼으며, 낮에도 남편은 대리석을 앞에 두고 뚱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일을 하지 않았다. - P28

밤이 되면 전보다 더 거칠게 나를 다루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당신도 다른 여자들처럼 그럴 거야?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여보. 그럴 리가요.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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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침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항상 목숨을 건 위태로운 줄타기 신세에 처하게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망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이므로. - P309

‘여기서 탈출하지 못할 거야. 방법이 없어. 토머스 하디가 쓴 「비운의 주드」라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 있잖아? "누군가가 와서 그 소년의 두려움을 달래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아무도 남의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 옳은 말씀이야. 너를 구해 줄 배는 오지 않을 거야. 너 하나 살리겠다고 구명정을 타고 올 사람은 없단 말이야.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하느라 할리우드 영화 촬영장에 가 있거든. 서부극에 나오는 정의의 수호자는 아침 식사 시리얼 광고 찍느라 바쁘고, 슈퍼맨은 영화 찍느라 바쁘단 말이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폴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겠지. 이제는 너도 정답을 알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 P340

기분이 안 좋다. 30분 동안 잠을 자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다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마약 같은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다. 내가 써 놓은 글을 오늘 오후에 읽어 보았다······. 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상상력이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모조리 채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난 척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마법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같은 현실 속 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더 있다간 미쳐 버릴 것이다.

—존 파울즈, 「콜렉터」— - P383

‘폴, 작가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특히나 아픈 기억들을. 작가 한 명을 홀딱 벗겨 놓고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그 작가는 작은 상처들 각각에 얽힌 사연을 들려줄 거다. 커다란 상처들을 통해 장편 소설을 얻는 거야, 망각은 소설 쓰는 데 아무 쓸모도 없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은 재능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만, 단 한 가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모든 상처에 얽힌 사연을 철저하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야.‘
‘예술은 연속된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 P395

그때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날이 폴 셸던을 위한 추억의 명곡 신청일로 지정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브루드」에서 미쳤지만 말솜씨 하나는 기가 막힌 과학자를 연기한 영화배우 올리버 리드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리드는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 원형질 연구소(폴은 상큼하게 웃기는 이름이라고 느꼈다)와 인연을 맺은 환자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힘들어도 참아 내야 해! 힘들어도 꿋꿋이 참아 내는 거야!"
가끔은······ 그것도 괜찮은 충고일 것이다.
‘나는 한 번은 꿋꿋이 참아 냈어.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해.‘
한 번 참고 보니 그 충고는 정말이지 개소리였다. - P397

‘미저리 Misery‘ 는 보통 명사로서 고통을, 일반적으로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런 단어가 적당한 소설에 인용되면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성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확실히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 대단원을 맞을 참이었다. 미저리는 폴의 인생에서 마지막 4개월(어쩌면 5개월)을 관통하여 흘러왔다. 그렇다, 수많은 미저리가 있었고, 미저리의 날이 밝았다가 미저리의 날이 저물어 갔다. 확실히 너무나도 단순한 인생이었고, 확실히······.
‘오, 아니야, 폴. 미저리에 관해서라면 단순한 것은 하나도 없어. 네가 미저리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만 빼면. 아마도 넌······ 넌 결국 세헤라자데가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야. 안 그래?‘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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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정말 좋은 사람은 잘 까먹는 사람이다. 다 잊어버려야 한다. - P221

나는 그때 이후 돈을 벌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동시에 손에서 책을 놓은 날이 없었다. 살며 부딪히는 모든 일이 내게 스승이었다. 성공하고 실패하며 복기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이었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사회생활을 위해 졸업장을 따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나는 독학형 인간이다. 누가 자신의 지식을 강요하면 일단 재수가 없다. 배우는 건 나의 선택이고 검증도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 P225

「죽은 시인의 사회」를 생각한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모두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는 엔딩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키팅 선생의 수업 시간이 더 좋았다. 특히 에반스 프리차드의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 의 서문을 찢는 장면이다. 어떻게 시에 공식이 있으며 누가 시를 재단하는가? 나도 그런 이유로 시집을 위시한 책의 서문이나 해설을 읽지 않고 바로 본문에 진입한다.
인생도 그렇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현인들이 아무리 주장해도 깨닫는 건 개인의 몫일 뿐이다. 저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조언은 될 수 있어도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오늘을 돌아보는 것.
그래.
밤이 스승이다. - P226

나는 『파리 대왕』의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다르다는 것. 장애든 가난이든 다르다는 것은 무리에서 밀려나는 일이다. 성숙한 사회는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같이 간다. - P227

둘째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 음악성이 있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한 번 들은 곡을 연주했던 아버지처럼 그도 음을 감각으로 찾아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로드리고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운지법이 그에게 맞지 않아 힘들어할 때였다.
"오빠, 세상에 표준은 없어. 내게 맞는 게 표준이야." - P228

이 영화를 이경원 기자에게 바친다는 엔딩 자막이 떴다. 디아스포라가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주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진입해야 한다. 권리를 인정받는 가운데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소수자인 디아스포라 가정에서 부모에게 냉대받는 소수자 게이, 데이비드 김의 이야기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등이 어떻게 포용으로 나아가는지 말이다. - P245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데이비드 김만 탈락했다. 한국인도 몰랐던 그가 40% 이상을 득표했다는 것이 경이롭다. 영화는 소수자로 불리는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공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정치와 종교, 출신지, 성 정체성, 세대 차에 대한 이들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다. 영화 엔딩 음악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이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본 후 봉은사 절 계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고층빌딩과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쓸쓸했다.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어찌 이민자뿐이겠는가? 우리 안의 모든 소수자를 응원하고 싶다. - P246

생과 사가 화려했던 이들에겐 흥미가 없었다. 천수를 다해 안장된 이들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니어도 환호해 줄 이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내가 가는 곳은 꿈 많았을 젊은이들의 묘지였다. 묘비를 읽으면서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곳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가질 수도 있었던, 가질 뻔도 했던 그 모든 것을 생각했다. - P248

사실 나는 박흥식 감독과 작은 인연이 있다. 4년 전인가? 나는 이야기 생산자를 ‘storyteller, storywriter, storyshower‘라고 한 이가 발터 벤야민이라고 기억하고 있 었다. 그의 논문 「이야기꾼」을 출처로 생각했는데 착각이 었다. 문장의 주인공은 박흥식 감독이었다. 그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평론에서 벤야민을 언급하며 ‘말로 이야기를 하는 호머는 storyteller, 글로 이야기를 하는 페터 한트케는 storywriter,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빔 벤더스는 storyshower‘라고 분류했다. - P256

옛날 중국에 ‘만다린‘이란 부자가 살았다. 그는 딸을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군에게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딸은 하인과 사랑에 빠져 도망갔다. 두 사람은 추격당하면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섬에 숨어든다. 섬에 안착해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으련만 하인의 문필력이 세상에 알려지고 만다. 비천한 하인 출신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병사들을 보내 그를 죽였다. 딸은 자기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타 죽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그냥 동화다. 그들의 사랑에 감탄한 신이 그들을 비둘기로 환생시켰다고 전해진다.
사랑은 죽어야 증명되는 것인가?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부자인 아버지는 신분 상승 욕구를 참을 수 없었고 딸은 사랑을 참을 수 없었고 하인은 글을 참을 수 없었다. - P259

한나 아렌트의 글을 보자.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 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 P262

거리에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문득 두려워진다. 사는 게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전시에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고독의 죽음. 그 대척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 P263

어떤 것도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편지는 점점 옅어지고 흐려져 힘을 준 자국만 남을 것이다. 사라짐은 아름다운 일이다.
예전에 강원도 국도 여행 중 FM 93.1에서 이 노래가 나와 길가에 차를 세우고 들었다.

기억하라, 함께 지냈던 행복한 나날을
그때 태양은 더 뜨거웠고
인생은 행복하기 그지없었지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다
- 자크 프레베르Jaques Prevert 「고엽Les Feuilles Mortes」 중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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