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침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항상 목숨을 건 위태로운 줄타기 신세에 처하게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망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이므로. - P309
‘여기서 탈출하지 못할 거야. 방법이 없어. 토머스 하디가 쓴 「비운의 주드」라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 있잖아? "누군가가 와서 그 소년의 두려움을 달래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아무도 남의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 옳은 말씀이야. 너를 구해 줄 배는 오지 않을 거야. 너 하나 살리겠다고 구명정을 타고 올 사람은 없단 말이야.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하느라 할리우드 영화 촬영장에 가 있거든. 서부극에 나오는 정의의 수호자는 아침 식사 시리얼 광고 찍느라 바쁘고, 슈퍼맨은 영화 찍느라 바쁘단 말이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폴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겠지. 이제는 너도 정답을 알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 P340
기분이 안 좋다. 30분 동안 잠을 자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다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마약 같은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다. 내가 써 놓은 글을 오늘 오후에 읽어 보았다······. 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상상력이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모조리 채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난 척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마법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같은 현실 속 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더 있다간 미쳐 버릴 것이다.
—존 파울즈, 「콜렉터」— - P383
‘폴, 작가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특히나 아픈 기억들을. 작가 한 명을 홀딱 벗겨 놓고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 그 작가는 작은 상처들 각각에 얽힌 사연을 들려줄 거다. 커다란 상처들을 통해 장편 소설을 얻는 거야, 망각은 소설 쓰는 데 아무 쓸모도 없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은 재능 정도는 갖고 있는 편이 좋겠지만, 단 한 가지 진짜로 필요한 것은 모든 상처에 얽힌 사연을 철저하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야.‘ ‘예술은 연속된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 P395
그때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날이 폴 셸던을 위한 추억의 명곡 신청일로 지정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브루드」에서 미쳤지만 말솜씨 하나는 기가 막힌 과학자를 연기한 영화배우 올리버 리드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리드는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 원형질 연구소(폴은 상큼하게 웃기는 이름이라고 느꼈다)와 인연을 맺은 환자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힘들어도 참아 내야 해! 힘들어도 꿋꿋이 참아 내는 거야!" 가끔은······ 그것도 괜찮은 충고일 것이다. ‘나는 한 번은 꿋꿋이 참아 냈어.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해.‘ 한 번 참고 보니 그 충고는 정말이지 개소리였다. - P397
‘미저리 Misery‘ 는 보통 명사로서 고통을, 일반적으로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런 단어가 적당한 소설에 인용되면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성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확실히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 대단원을 맞을 참이었다. 미저리는 폴의 인생에서 마지막 4개월(어쩌면 5개월)을 관통하여 흘러왔다. 그렇다, 수많은 미저리가 있었고, 미저리의 날이 밝았다가 미저리의 날이 저물어 갔다. 확실히 너무나도 단순한 인생이었고, 확실히······. ‘오, 아니야, 폴. 미저리에 관해서라면 단순한 것은 하나도 없어. 네가 미저리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만 빼면. 아마도 넌······ 넌 결국 세헤라자데가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야. 안 그래?‘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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