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곳이 겨울에는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 그가 나에게말했다. "눈밖에 없어."
"눈을 보고 싶어." 내가 대답했다.
그 눈이 바로 거기 있었다. 이 눈은 해발 3천 미터에 있는 협곡의 꽁꽁 언 눈이 아니었다. 신발로 파고들어 발을 적시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눈이었다. 발을 들면 발자국 안에 뭉개진 8월의 꽃이 보이는 것이 묘했다. 눈은 거의 발목까지 쌓였지만 오솔길의 모든 흔적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매 걸음마다 덫을 숨길수 있을 만큼 눈은 관목과 구덩이, 돌을 덮었고 눈 위를 걷는법을 몰랐던 나는 브루노만 쫓아가며 그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가 어떤 본능 혹은 기억을 따라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뒤만 졸졸 따라갈 뿐이었다. - P121

그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아침마다 짐을 나르던 당시에 그의 어머니를 자주 만났다. 그녀는 안장을 고정시키고 노새의 옆구리에 연장이나 판자를 매달고, 또 노새가 나아가지 않으려고 할 때 유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돌아온 것과 본인의 아들과 함께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본 그녀는 우리의 인생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다른사람들은 마치 계절이 지나듯 그녀 곁에 잠시 머물다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든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 P162

"대들보는 크기가 어느 정도여야 하고 간격은 얼마나 두어야 하는지, 어떤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야 좋을지. 전나무는 부드러운 나무라서 적합하지 않아. 낙엽송은 그보다 견고한 나무야. 너희 아버지는 내가 그렇다고 하는 말로는 성에 차지 않았어. 늘 모든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지. 전나무는 그늘에서 자라고 낙엽송은 양지에서 자라거든. 햇빛은 나무를 단단하게 만들고 그늘과 물은 나무를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나무는 대들보로 적합하지 않아."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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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어느 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냐에 매혹될 수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적어놓은 글에 심취해서 이탈리아 알프스 클럽 안내서를 일기 마냥 다시 읽었고 한 발 한 발 오솔길을 되짚어가는 듯한 착각 에 빠져들었다. ‘풀로 뒤덮인 험준한 절벽을 타고 버려진 목장 까지 올라가며‘, ‘여기서부터 자갈길과 일부 남은 만년설을 따라 계속 나아가며‘, ‘표시된 계곡 근처에 솟아 오른 산봉우리로 향하기 위해‘. 그러는 사이 내 다리에는 핏기가 사라졌고 긁힌 자국과 까진 상처가 아물었으며 쐐기풀로 인한 가려움과 맨살에 느껴지는 여울의 냉기,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가 지나고 이 불이 주는 편안함이 잊혔다. 이 정도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겨울의 도시에는 없었다.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게 하는 필터 뒤에서 도시를 바라보았고, 하루에 두 번씩 지나쳐야 하는 안개같이 뿌연 사람들과 자동차뿐이었다. 창밖으로 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라나에서의 일상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 흔자 지어냈거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을까? 발코니에서 새로운 빛 조각, 도로의 차선 사이의 잔디에서 새싹 하나가 몸부림치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밀라노에도 봄이 찾아왔고 그리움은 그곳으로 돌아갈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 P79

나는 그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나를 믿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내가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을 거리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나쁜 짓이란, 무모한 짓이나 바보 같은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다른 의미의 위험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외출을 허락하면서 금지나 당부의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P81

한때 지하 석탄고가 있었던 가장 메마른 층 바로 아래의 땅은 아직도 석탄의 색을 띠었다. 숲은 발굴 흔적과 쌓아올린 더미, 폐물로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고 죽은 언어의 기호라도 되는 듯이 브루노가 나를 위해 해석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과 더불어 표준어보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되는 방언을 가르쳐주었다. 마치 책 속의 추상적인 언어를 산에서는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사물의 구체적인 언어로 대체해야 하는 것 같았다. 낙엽송은 브레가, 붉은 전나무는 페차, 쳄브라 소나무는 아룰라이고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돌출된 절벽은 바르마 였다. 돌 Petra은 베리오이자 나, 피에트로였다. 나는 이 이름에 무척 애착을 느꼈다. 모든 개울은 계곡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발레이라 불렸고, 모든 계곡은 성격이 반대인 두 개의 경사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햇빛에 잘 드는 아드레이 양지 바른 비탈면 이고 이곳에는 마을과 들판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습하고 그늘진 앙베르로 숲이 있고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이 둘 중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그늘진 경사면이었다. - P82

무슨 말이 이럴까 나는 생각했다. ‘무난하다‘라는 단어를 누가 선택한 걸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브루노에게는 무난함이란 없었다. - P87

나는 열네 살 된 아들 피에트로와 함께 이곳에 왔다. 선두 등반가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얼마 후면 아들이 선두에서 나를 이끌게 될 테니까.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가장 멋진 대피소에서 보낸 날들을 기억하며 떠나겠다. 서명: 조반니 과스티

글을 읽고 나는 감동받거나 자랑스럽지 않고 짜증이 났다. 뭔가 가식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에서와는 다른, 산의 수사법이었다. 산 위가 천국이라면 왜 우리는 여기에 살지 않는 걸까? 산에서 나고 자란 한 아이를 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걸까? 도시가 그렇게 진절머리가 난다는데 왜 구태여 아버지를 우리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일까?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묻고 싶었다. 타인의 인생에 무엇이 이로운 건지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째서 못 하는 건가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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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우리가 함께 산을 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산에 대한 나의 대단한 열정이 처음 발현한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아직 잠자리에 있던 시각, 아버지는 부츠를 신고 집을 나서려다 따라나설 채비를 마치고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침대 위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나는 실제 내 나이인 예닐곱 살보다 훌쩍 자란 모습이어서 아버지는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장차 변화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 아들을 암시하는 것이자 미래의 환영이었다. - P22

나는 몇 가지 명확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 첫 번째 규칙은 멈추지 않고 리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말하지 않기이고 세 번째는 갈림길이 나오면 항상 오르막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 P52

겨울 산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평온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에 대해, 혹은 아래쪽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을 피해 위쪽으로 도피한다는 그의 철학에 따르면 가벼움의 계절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일하는 시기, 평지에서 생활하는 시기 그리고 우울한 시기인 중력의 계절을 따라야 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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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도주의협회에 따르면, 건강하다고 추정되는 전국의 고양이와 개 약 270만 마리가 해마다 살해된다고 한다. 대략 11초에 한 마리가 죽는 꼴이다(통계는 이들의 병이나 장애 유무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동물 교배는 더 많은 동물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그 동물들이 보호소의 수많은 동물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을 집들을 차지하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가중시킨다.

불구이고 의존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능력 없는 인간이 비효율적이고 의존적고 불구인 개를 돕고 또 그의 도움을 받는 것에는 무언가 적절하다는 느낌, 아니 사실무언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있다. 종이 다른,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두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일말이다. 서툴고 불완전하게,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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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가공육이 암의 원인이며 적색육은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린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가공육을 담배연기, 석면, 알코올과 나란히 제1군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 P312

"도축 공장에서 노동자가 부상을 입거나 질병을 얻을 확률은 같은 사람이 탄광에서 일할때보다 6배 커진다." 아이스니츠는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소에게 맞아 부상당한 직원들, 화학약품에 화상을 입은 직원들, 칼에 찔린 직원들, 뼈가 부러진 직원들, 유산과 열기, 빠른 작업 속도와 독가스 때문에 기절한 직원들의 사례에 대해 알게 됐다고 보고한다. - P313

산업화된 농장과 도살장의 노동자들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들은 동물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 사이의 명백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동물들이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직접 봐야 한다. 전직 도살 현장 책임자였던 이는 이렇게 증언한다. "가장 나쁜 것, 물리적 위험보다 더 나쁜 것은 정서적인 대가예요. 돼지를 죽이는 현장에서 돼지들은 제게 강아지처럼 코를 비벼요. 그런데 2분 후 저는 그 돼지들을 죽여야 해요. 죽을 때까지 파이프로 때려야 하는 거죠. 마음을 쓰면 안 되는 거예요." - P314

"우리는 어떻게 온갖 종류의 신체들, 즉 식물과 동물, 유기물과 비유기물, 비인간과 인간의 몸들을 개조하고 훼손하는 불의를목격하고 명명하고 저항할 수 있을까. 장애를 불의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 P320

동물실험의 실패로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도 1960년대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탈리도마이드는 동물들에게 처방됐을 때 부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은 약물이었기에 곧 입덧을 진정시키는 용도로 임신한 여성에게 처방되었다. 그러나 이 약물 때문에 수천 명의 아이들이 사지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 P332

비거니즘은 단지 음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먹고 입고 쓰는 것을 통해 비장애중심주의에 저항하는 체화된 실천이자, 동물을 위한 정의가 장애인을 위한 정의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정치적인 입장이다. - P337

나는 비거니즘을 어떤 보편주의로 내세우려는 게 아니다. 그런 주장은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들, 즉 서로 다른 관점과 세계관을 폄하하는 경향 그리고 이러한 경향과 떼놓을 수 없는 서구 지배의 유산에 대해 너무 쉽게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의 환경 그리고 이 환경을 우리와 공유하는 다양한 종들, 우리의 삶과 얽혀 살아가는 동물들하나하나를 계속해서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해 바라보는 한 장애해방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들을 우리 인간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존재, 즉 처분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고 죽일 수 있는 존재로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말이다. 비거니즘은 각종 차이들을 억압하는 대상화와 착취에 맞서 몸을 통해 저항하는 행위, 즉 일상에서한 사람의 정치적·윤리적 신념들을 정립하는 육체적인corporeal방식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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