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06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 P107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 P136

흐린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멀고 가까운 산의 능선들, 아직은 덜 우거져 듬성한 봄 숲의 연한 잎들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며 바삭거리는 소리, 검은 비닐과 주황빛 흙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 내는 교차가 땅의 파도를 보는 듯 현기증을 일으키는 밭들······ 어느 순간 그녀의 의식은 또 길을 잃었다. 호수로 통하는 희끗한 가르마 같은 오솔길, 모든 작별의 불가피성을 안다는 듯 손바닥 모양의 잎을 은밀하게 반짝거리는 발코니 앞의 단풍나무······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속으로 차곡차곡 흘러들어와 그녀와 동일한 분량으로 희석되었다. 풍경과 사물은 그녀의 절반을 차지하고 기저에서부터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까닭 모를 슬픔에 사로잡혀 격랑에 흔들리는 작은 배에 탄 듯 양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꽉 붙들었다. - P151

그날 숲을 산책하기로 결정한 것이 달의 얘기 때문인지 우연히 발견한 메모 때문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산책을 하자고 권유해도 번번이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어 거절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2층 발코니에서 그녀는 무심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구겨진 메모지 한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며칠 전 심한 불면과 숙취에 시달리다 격렬한 필체로 휘갈겨놓은 것으로, 더 많은 햇빛 산책 햇빛 산책,이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어찌나 크고 기괴하게 써놓았는지 글자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화투짝처럼 보일 정도로, 아무리 눈이 먼 위현이라도 주의 깊게만 읽으면 알아볼 수 있을 성싶었다. 글자들 아래에는 메모지가 찢길 만큼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고 끝에는 부들부들 떨리는 세개의 느낌표가 찍혀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녹슨 칼로 팔목을 마구 그어대는 듯한 살의와 파괴력으로 충만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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