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름이면 보리밥에 짜고 맵게 졸인 강된장과 연한 줄기의 열무김치를 넣고 비벼 먹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비빈 밥을 먹다가 문득 입이 짜서 접시에 놓인 오이로 입가심을 했는데, 그때 뜬금없이 입안에 온통 은은한 버터의 맛이 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 오이에서 버터의 고소하고 느끼한 맛이 났습니다. 그 유사성을 저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그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유사와 인접이 협조하여 만들어낸 복합적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입속에 남은 된장의 짠맛과 보리의 구수함, 오이 속씨의 달착지근함의 콤비네이션이 어느 경계에서 버터의 맛과 겹쳐진 것인지도요." 잠시 뒤 그는 자문하듯 물었다. "유사성과 인접성,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일까요?" • • "어느 쪽이든 간에 분명한 건, 시각을 잃게 되면 두 우주 모두에 서 참으로 넓은 기쁨의 영토를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대꾸는 어쩌면 추의 방식이었다. 그는 새도 나뭇가지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아마 그가 보았다면 발견하고 향유했을지 모를 유사도 인접도 결코 발생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게 가장 가슴 아팠다. - P165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 P168
"나는 심지어 나하고도 눈을 마주칠 수 없습니다. 거울을 봐도 내 얼굴에서 분간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죠. 눈동자는 커녕 표정, 눈매, 주름 그 어느 것도.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아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드리우는 땅거미처럼 자체의 엄격한 가속도로 내 눈에 그물을 찬찬히 드리우는, 도래할 어둠의 시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 P171
"당신은 누굽니까?" 그가 물었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놀란 그녀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 P172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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