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5 우리 A그룹이 들어간 사무실이 단출하다. 테이블 앞에는 고지식하게 생긴, 턱수염이 하얀 신사가 앉아 있다. 그가 세상을 살면서 둘도 없는 호기를 잡는 일은 어렵다면서 자기들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환상을 품지 말라고, 품질과 가격을 동시에 충족하고 싶은 이중성을 단념하라고 강변한다. 나아가 이승에서의 삶이란 높은 차원에서 볼 때 기껏해야 눈물의 계곡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런데 한참을 떠들어 대던 그가 느닷없이 가짜 턱수염을 떼서 휴지통에 내던져 버린다. - P51
15:00 나는 방법론적인 효과를 구하기 위해서 세 가지 난제를 분류한다. 하나는 생물학적 문제, 다른 하나는 심리적 문제, 마지막은 실천적 문제인데,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 P57
내가 볼 때 지구인들은 단순한 산술적 계산에 치중할 뿐 장기적인 안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을 자각하면 고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데도 자기 잘못을 시정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 P62
20:00 나는 8시 미사에 가까스로 도착한다. 이웃집 여자와 노닥거린 탓이다. 설교는 장황하면서도 꽤나 흥미롭다. 그대를 속이는 자들을 믿느니, 차라리 그대를 안 속이는 자들을 믿으라. - P72
이 도시에는 안락한 가정들이 두 가지 문제를 두고 고민한다. 자식을 공부시키자고 미국으로 보낼 것인가. 주차는 어디에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래전, 그러니까 자동차가 없었을 때는, 아니, 자동차는 고사하고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당시 건축물에서 지하에 둔 것은 기껏해야 지하실이나 창고, 헛간 아니면 감옥이었다. - P78
09:00 나는 람블라스로 내려가는 도중에 구석구석 나 있는 샛길로 접어든다. 이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 얼굴색이 다양한데, 이는 바르셀로나가 항구 도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도시에는 온 세계의 인종들이(물론 다른 행성에서 온 나도 포함된다.) 모여들거나 뿔뿔이 흩어진다. 발길을 옮기는데, 이 지역이 키워 낸, 이제는 역사의 침전물로 남아 있는 애송이들 중 한 녀석이 내 지갑을 슬쩍 빼 간다. - P86
11:00 길을 가다 보니 여러 구역과 동시에 접해 있는 광장이 나온다. 광장 한복판에 털이 수북한 야수처럼 생긴, 잎이 성성하고 빳빳한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고, 벤치에는 햇볕을 쪼이는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가족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기 가족이 노르웨이 협곡으로 종단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지난 여름에 가족에게 버려진 노인들이 화석처럼 굳어 가듯, 보름 전에 버림받은 노인들도 머잖아 안락한 삶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어느 노인 옆에 앉아서 누군가가 버리고 간, 마드리드에서 발행하는 어떤 일간지 문학 면을 들여다본다. - P87
12:00 한가했던 광장이 갑자기 어수선해진다. 학교를 빠져나온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거나 팽이를 돌리고, 그러다가 함께 어울려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우리 행성에는 지구에서 말하는 아동기라는 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각자의 사고 기관에 필수적인(동시에 권위적인) 지식과 지혜와 경험이 축적된 데이터를 주입받고, 필요하면 돈을 지불하고서 백과사전이나 지도, 평생용 달력 외에도 시모네 오르테가의 요리에 관한 책이나 <미슐랭 가이드》(그린 가이드와 레드 가이드 둘 다) 등을, 또한 예비시험을 치를 나이가 되면 도시 교통망과 조례 모음집이나 법정 판결문 선집을 충전받는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아동기가,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이 없다. 우리 별에서 우리가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타인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에 어울리는 (그리고 적확한 삶을 살아가는 반면, 지구인들은 곤충과 비슷한 세 가지 성장 단계 혹은 성장 과정, 즉 아동기, 청장년기, 노년기로 나뉘어 살아간다. 아동기에는 지시하는 것을 행하고, 청장년기에는 지시하는 것을 행하되 그 대가로 보수를 받고, 노년기에는 수당이 생기되 거의 일이 없다. 늙으면 근력이 딸리고, 그러다 보니 지팡이나 신문 외에는 손에 쥔 물건을 놓치기 일쑤다. 반면에 이 도시의 아이들은 다르다. 한때는 광산에서 석탄 캐는 일을 시키기도 했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오후 나절에 텔레비전을 보거나, 폴짝폴짝 뛰어 놀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저희들끼리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 대화를 나눈다. 한편, 지구인들도 우리처럼 네 번째 단계가 있기는 한데, 이른바 주검의 상태로 보수가 주어지지 않는 그 단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차라리 생략하는 게 나을 성싶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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